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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도시 청춘뻐스 달린다](6) 간고분투 일심전력하는 정신은 잃을 수 없는 근본이다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3-29 13:54:45 ] 클릭: [ ]

 

연길시공공뻐스그룹유한회사 전동화 원로로부터 간고창업 이야기 듣는다

“전기에너지뻐스로 일신된 공공뻐스에 오를 때마다 참 기쁩니다. 진동감 없고 방음처리가 잘 됐으며 친한경적이고... 뻐스가 사르르 옆을 스쳐 지나는 것만 보아도 운행 상태가 좋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기분 좋구요... ”

전동화(74세)선생은 근래에 연길시의 공공뻐스가 전부 전기에너지뻐스로 바뀐데 대한 감회가 남 다르다. 한것은 선생은 오랜 자동차 정비사이고 연길시 공공뻐스와 깊은 연원을 지닌 분 이기에다. 선생은 연길시인민뻐스공사가 설립된 이듬해인 1973년에 이 공사에 입사해서 1976년부터 연길시인민뻐스공사 지도부 부주임, 연길시공공뻐스공사 부경리, 공회주석직을 력임하다 2007년에 정령 퇴직한 분이다.

길림시3320부대 모 퇀 자동차련 자동차 정비사 출신인 선생은 연길시인민뻐스공사에 배치받아 온 날로 팔을 걷고 뻐스 정비 작업에 살손을 붙힌 것이 30여년의 직업생애로 이어졌다면서 이렇게 당년의 추억을 떠올린다.

연길시인민뻐스공사는 초기 조건이 많이 간고했다. 연길시원림처의 부지(인민공원 서쪽켠) 에 간소한 사무실 네칸에다 뻐스 여나무대를 세울 장소를 림시로 제공받은 정도였다. 수동 공구와 선반기 한대, 용접기 한대 외 기타 보조 설비가 없었다. 뻐스 정비용 도랑이 없어서 우리 정비원들은 잭으로 차체를 들어올리고 뻐스아래로 기여들어가서는 땅바박에 누어서 작업해야 했다. 고장난 연축기를 손질하자면 일단 그 옆의 변속기를 풀어내야 하는데 남정네 서넛이서 지레대로 변속기를 메서 내려놓아야 한다...당시 도로상황이 좋지 않다나니 뻐스의 진동 감쇄 활판들이 툭하면 끊어져 나갔다... 예비용 뻐스가 없는 때라 우리 정비원들은 일단 뻐스가 고장 나면 무조건 당일로 뻐스를 손질해 뻐스가 한시 급히 선로에 복귀되도록 보장해야 했기에 공구상자를 챙겨들고 고장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고 그러다보니 연장근무도 여사였다. 지금의 뻐스와는 비길바가 못되는 뻐스조건에서 운전사를 비롯한 각 승무팀들이 겪은 고생은 더구나 이루다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추운 겨울 뻐스 시동작업에 1선 승무인원들이 너무 고생하는 상황을 개변할 소망이 제일 간절했다. 오늘 같은 순 전기에너지뻐스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언제든지 뻐스 보양하우스를 많이 지어 엄동설한에도 운전사들이 뻐스를 하우스에서 바로 운전해서 나갈수 있기를 바랐었다.

70년대 말에 연길시인민뻐스공사는 지금 군민로 이남의 새 부지로 이사갔는데 부족한 기초건설을 우리 절로 했다. 행정인원을 위주로 직원들이 일손을 낼 수 있는 족족 동원돼 수금실, 승무원 기숙사, 보일러실, 휘발유 저장고 등 시설 건설, 뻐스 정비용 도랑이 설계된 1000평방메터 가까운 주차 마당의 콩크리트 작업을 전부 의무로동으로 해냈다.

당년 연길시인민뻐스공사 새 터에서 종업원들이 기건 의무로동하는 장면, 사진은 전동화(왼쪽 사람)부경리와 다른 한 부경리가 담벽을 쌓고 있다/ 자료사진

연길시공공뻐스공사 행정인원들이 당년에 뻐스역에 나가 봉사하던 장면. 사진 속 아이를 받아 주는 이와 그 뒤 남성분은 뻐스공사 간부들이다. /자료사진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부터 도시의 인구 류동이 선명이 많아진데 비해 우리의 운송력은 계속 딸렸다. 재정 조건상 뻐스를 시장 수요를 만족시킬 수준으로 빠른 시일에 증가할수 없는 조건에서 우리 뻐스공사는 행정인원들을 동원하여 승객이 많은 기차역, 하남역에 나가 봉사했다. 정거장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뻐스에서 내리는 손님, 뻐스에 오를 손님들을 도와 주곤 하던 일들이 전동화의 기억에 새삼스럽다.

그 특별한 력사시기의 특별한 뻐스 기억으로 남은 련체뻐스는 한마디로 승객을 많이 싣기 위한 뻐스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차바구니 중간에 회전판(转盘)이 달린 련체뻐스가 돌아지자면 도로나 주차장소가 그만큼 넒어야 하는데 연길시 당시의 도로상황은 좁고 또 아스팔트화도 잘 되지 못한 상황이여서 한 련체뻐스가 회전판이 심하게 밀치여(挤)진 상황에서 운행도중 두 련체 차바구니가 탈구(脱节)한 사고도 발생했었다. 다행스럽게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다.

그 비슷한 시기였다고 생각되는데 뻐스가 부족한 안타까움에 전동화와 동료들은 두 낡은 차체를 절단하고 회전판을 어렵사리 구해서 자체로 그런 련체뻐스를 개조해내기도 했었다. 궁극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창업열의를 전동화는 잊을수 없다.

뻐스 운행 1선에서는 안전운행, 문명봉사, 운송력 제고를 지침으로 각 운행팀(운전사1명에 승무원2명 ,련체뻐스는 승무원이 3명)은 보다 높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초기 운전사 대오 중에 항미원조전선에서 돌아온 전길송 등 두 혁명선배(이미 작고)가 있었다. 이들은 언제나 사회주의 조국의 뻐스를 운전할 수 있는 자랑스러움을 지니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든지 이신작칙 뻐스 운행의 두가지 효과성을 높이는 데서 앞장섰다. 항시 손에 도레이버를 쥐고 다니던 전길송(생전이면 약 90세)선배를 뵈는 듯하다. 해방전에 목탄차를 운전한 경력이 있은 선배는 자신이 운전하는 뻐스를 그토록 애지중지해했다. 발차 전이나 차를 달리고 와서는 그는 한번도 건느는 일 없이 뻐스를 꼼꼼히 체크했는데 그의 뻐스는 라사못 하나 드놀지 않을 정도로 늘 완정, 안전했다. 혁명선배들을 본보기로 일터를 사랑하고 맡은바 일에 충성을 다하는 우수한 운전사, 승무팀이 속출되였다. 뻐스 발동기에서도 먼지를 만져내지 못할만큼 뻐스를 알뜰히 관리한 함영화운전사, 그의 영향을 입어 그 팀 승무원들도 뻐스바닥을 집 장판을 닦듯이 손걸레질해 그들의 뻐스가 늘 감탄을 자아냈었다. 뻐스 관리도 출중하고 늘 가장 높은 탑승률, 출근률을 보장해 두가지 효과성이 뚜렷했던 신경재운전사, 신학수운전사...지난세기 80년대에 들어서서부터 매번 연길시, 연변조선족자치주, 길림성 로력모범 혹은 업종 모범인물 평선에는 연길시공공뻐스운행업의 이런 우수한 종업원들이 이름을 올려왔다. 전동화는 지난해 신학수운전사가 전국로력모범에 당선된 소식을 반갑게 접했는데 그건 하루아침에 따내는 영예가 아니라고 했다.

뻐스공사도 지난 세기 80년대에 들어서서부터 매번 길림성건설청으로부터 ‘안전생산붉은기 단위 ’로 평선되였고 주인민정부로부터 문명단위 ,길림성정부로부터 문명단위, 6가지가 우수한 기업, 선진기업, 납세 우수 기업, 창업선진기업 등 영예와 표창을 받았다.

전동화는 “이런 성과는 몇세대에 걸친 연길시공공뻐스운행업 종사자들이 간고분투 일심전력 창업, 봉사, 혁신해온 성과라고 생각한다.  간고분투, 일심전력 맡은바 일에 최선하는 정신은 언제나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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