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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10)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4-20 22:48:03 ] 클릭: [ ]

▧ 김동수

제3장 드넓은 동북

1. 봉천성에 불씨를

불씨의 발명은 인류 진화와 사회 발전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한점의 불꽃이 료원의 불길로 타오른다고 위인들이 력설한 것이 아닐가? 중국공산당은 창건된 그 날부터 동북 지구에서 당조직을 건설하기 위하여 많은 우수한 당원들을 동북에 파견하여 혁명의 불씨를 뿌렸다.

심양시 중공만주성위기념관의 제1면에 동북 초기 당 창건 령도자중의 한사람인 한락연을 소개했다.

1922년에는 공산당원 마준(马骏)을 파견하여 동북에서 활동하게 하였고 1923년에는 진위인(陈为人)과 리진영(李震瀛)을 파견하여 대련, 할빈 등지에서 개척사업을 하였다. 1924년에는 또 한락연을 심양에 파견하여 미술학교를 세우는 방식으로 진보적 청년들과 접촉하고 그들에게 맑스―레닌주의와 중국공산당의 주장을 선전하고 청년들로 하여금 나라의 부강과 민족의 독립과 광범한 로고대중들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도록 인도하였다.

봉천(현재의 심양)은 력대로 동북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전략적 의의가 짙은 도시였다. 필자는 여러 차례 심양에 가서 봉천기독교청년회 유적과 성의회 옛터를 답사하였으며 흑룡강성 할빈과 치치할에 가서 당시 한락연이 남긴 발자취를 추적해 보았다.

필자는 료녕성위당학교 당사인물연구사무실에서 《중공만주성위 시기 회억록 묶음 제2책》(中共满洲省委时期回忆录选编第二册)을 찾아보았다. 리유주(李维舟)는 1964년 2월 24일에 쓴 회억록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한락연의 자료를 수집하고 전기를 써야 한다. 한락연동지는 심양 당조직의 창시인으로서 1923년 좌우에 중앙의 파견을 받고 심양에 와서 혁명활동을 진행하였다.”

한락연은 중앙의 파견으로 봉천에 왔고 그 주요한 목적은 당조직 건립을 위하여 준비사업을 하는 것이였다.

1924년 1월 24일 한국 서울에서 발행된 《동아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미술계의 두 수재 상해미술학원 졸업. 1월 15일에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두 청년이 있다. 한사람은 평안북도 의주군에 본적을 둔 김복형군이요, 다른 한사람은 북간도 룡정에서 출생한 한광우군인데 중국의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인 상해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4년의 과정을 항상 우등으로 지내고 이제 졸업한 것이다. 한광우군은 생각이 높고 심히 활발한 청년으로 멀지 않아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국에 들릴 것이라 한다.”

신문은 두사람의 사진도 곁들어 실었다.

그러나 이 기사 내용처럼 한락연은 고국은커녕 고향―사랑하는 처자가 살고 있는 룡정에도 가지 못하고 당조직의 파견으로 봉천에서 당조직 건설을 위한 개척사업을 하였다.

봉천기독교청년회 총간사 염보항과 부인 고소

당시 심양은 봉계군벌 통치의 중심지대로서 당조직 건설에 매우 큰 곤난과 어려움이 있었다. 한락연은 상해기독교청년회에서 봉천기독교청년회에 사람을 파견한다는 명의로 심양에 와서 당시 봉천기독교청년회 총간사였던 염보항(阎宝航, 1895―1968년, 료녕성 해성 사람)을 만났다.

1937년 9월에 주은래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건국 후에는 국가 외교부 판공청에서 사업했던 저명한 정치, 사회 활동가이고 전략적 정보가인 염보항 역시 전기적 색채가 짙은 사람이였다.

1941년 5월, 염보항은 독일이 쏘련을 불의습격한다는 비밀정보를 입수하여 중공중앙을 통해 성공적으로 쓰딸린에게 전했으며 얼마 후에는 동북에서의 일본 관동군의 군사병력 배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쏘련 홍군의 동북 해방과 일본의 패망을 앞당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95년 로씨야 대통령 예리친은 염보항과 그의 맏딸 염명시(阎明诗)에게 ‘쏘련 국가 보위 전쟁 50주년 기념훈장’을 수여하여 2차 대전 승리를 위해 세운 그들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례우하였다.

로씨야 대통령 예리친이 염명시에게 수여한 메달과 증서

1957년 모택동의 통역으로 쏘련으로 동행했고 후에 중공중앙 서기처 서기, 중공중앙 통전부 부장이란 요직에 있었던 염보항의 아들 염명복(阎明复)은 이렇게 회억하였다. “1925년 가을, 한아저씨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잠시 봉천을 떠났다. 1년간 함께 싸우는 가운데서 아버지와 한아저씨는 훌륭한 벗으로 되였다. 한아저씨는 아버지를 방조하여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인 기독교 신자로부터 공산주의 길을 걷게 하였다. 한아저씨는 아버지의 량사익우였다.”

지금의 심양시 심하구 조양가 151―1호에는 봉천기독교청년회 유적이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있었다. 료녕성 성급 문화재인 이 4층 양옥은 1925년에 지었는데 푸른 벽돌과 목조로 된 층계와 바닥, 그리고 창문이 서로 어울려 무척 옛스럽고 고풍스러웠다. 무릎을 맞대고 원대한 리상을 품고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던 한락연과 염보항의 절친한 모습이 답사 내내 스크린처럼 떠올랐다.

1924년 8월 한락연은 중국동맹회 회원인 매불광 등과 함께 손중산의 사상을 옹호하는‘계명학사’를 세웠다. 한락연은 많은 청년들을 포섭하고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단체의 많은 성원들은 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한락연은 진보적 청년 소자원(苏子元)에게 상해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향도》와 《신청년》, 《중국청년》, 《국가와 혁명》, 《매주평론》 등 진보적 간행물을 부쳐오도록 하였다. 이런 진보적인 서적들은 젊은 학생과 교사들 가운데서 맑스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비밀리에 전파되게 하였다. 하여 후에 봉천과 동북에서 공산당조직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5년 2월부터 5월까지 한락연은 중앙의 지시에 따라 쏘련에 가 학습하였다. 귀국 후 그는 리대소가 파견한 임국정(任国祯, 1898―1931년)과 임필시가 파견한 오려석(吴丽石, 1899―1931년) 등과 함께 심양에서 최초로 되는 중국공산당 지부를 건립하였다.

지금의 심양시 화평구 황사로 복안항 3호(皇寺路福安巷三号)에 위치해있는 중공만주성위 유적기념관은 톱 면으로 한락연, 임국정, 공천민(巩天民), 소자원, 장광기(张光奇) 등 다섯사람의 사진을 전시하고 한락연을 동북 초기 당 창건 령도자중의 한사람이라고 주명하였다.

료녕성 성급 문물보호단위인 봉천기독교청년회 유적지

1988년 12월 소자원(1904―1995년)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한락연은 내가 만난 첫 중국공산당원이였다. 그는 믿음직한 형님과도 같았다. 60여년전에 전투하던 나날을 돌이켜볼 때마다 그의 강직하고 기민했던 형상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한락연동지는 무명영웅이다. 간고한 전쟁의 나날,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많은 사업을 했으며 허다한 사업은 개척적인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비밀공작의 특수성으로 그의 이름과 사실이 인민군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한락연의 역할에 대해 심양당사연구실에서 발행하는 간행물에서는 “1924년 1월 당조직의 파견으로 봉천에 혁명의 불씨를 뿌린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한락연은 봉천미술전문학교 창설에도 갖은 심혈을 기울였다. 봉천미술전문학교의 략칭은 봉천미전(奉天美专)인데 1924년 한락연이 세운 전업성 미술학교로서 1925년 5월경에 경비난으로 문을 닫았다. 9.18 사변 후 봉천미전 졸업생 서연년(徐延年)이 다시 학교를 세우고 봉천미술전과학교라고 명명하였다가 1936년 위만 당국의 명령으로 해산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서연년은 또다시 학교를 세우고 료녕예술전과학교라고 개칭하였으며 얼마 후에 료동학원 예술계에 합병되였다.

1924년 1월에 봉천에 온 한락연은 혁명활동을 하는 한편 봉천 성덕성문리(成德胜门里)에서 ‘봉천미술연구원’을 창설하고 원장을 담임하였다. 연구원은 미술의 연구 방향과 미술교육을 위주로 하였는데 이 때로부터 봉천 전업미술 교육의 서막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한락연은 봉천고아학교의 도서관 건설에 자금을 모금하려고 회화전을 열려고 기획하였는데 봉천기독교청년회와 사회 각계 명류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1924년 12월 17일 《성경시보》에 실린 봉천미술전문학교 학생모집 광고

1924년 6월 12일, 《봉천시보》에는 다음과 같은 계시문이 실리였다. “한군 락연, 길림 사람, 상해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성적이 우수하고 유화, 수채화 작품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다. 미술계와 많은 사람들의 숭배와 존경을 받았다. 이번에 한군이 봉천에 왔는데 동호인들은 한차례 회화전을 열라고 건의하였다. 한군은 미술 관념을 선전하고 보급하는 한편 고아학교의 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7월 6일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남대문리제4소학교(현재의 심양시 심하구 남순성로 98호, 沈阳市沈河区南顺城路98号)에 위치한 조양제1소학교에서 그림전시회를 가진다. 입장권은 20전인데 전부 조학금으로 사용한다. 한군의 예술을 우러르는 사람들은 용약 참관하기를 바란다.”

1924년 7월 6일, 봉천성 대남관 봉천성립제4소학교에서 회화전이 개최되였다. 유화, 수채화, 목탄화, 공필화 등 근 100여점의 그림들이 전시되였는데 대부분은 한락연의 작품들이였다. 전시는 봉천 시민들과 사회 각계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참관자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았다. 장학량과 시장 증유익(曾有翼)도 회화전을 참관하였는데 증유익은 마음에 드는 수채화 한폭을 구매하기까지 하였다. 전시회를 통하여 한락연은 자신의 지명도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회 명류들과 사귀는 데 조건을 마련하였다.

전시회 당일 봉천에서 발간하는 《성경시보》는 회화전 소식과 함께 〈학술계의 맹아〉란 사론을 발표하였다.

심양시 중공만주성위유적지기념관을 탐방하고 장욱동 관장과 기념사진을 남긴 필자

1924년 7월, 한락연은 봉천성교육청에 정식으로 미술학원을 세울 것을 신청하였다. 교육청에서는 심열 후 명칭이 합당하지 않으니 ‘사립미술학교’라고 고치고 장정을 수정하여 다시 제출하라고 하였다.

한락연은 영국 화페를 교환한다는 명의로 동3성 은행장을 만나고 미술학교를 세우는 정황을 설명하고 은행에서 경제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간절히 청탁하였다. 회화전을 통하여 한락연이 재능 넘치는 화가인 것을 알고 있는 은행장은 봉천성 의회북거리에 있는 한 민가를 세맡고 학교를 세우도록 소개하고 도와주었다. 염보항과 저명 인사들의 방조로 한락연은 끝내 학교를 세울 수 있다는 교육청의 허가도 받아냈다.

1924년 8월 5일, 한락연은 원래의 봉천미술연구원을 ‘봉천미술전문학교’라고 정식으로 명명하였다. 이는 료심지역에서 첫번째로 되는 전업 미술학교였다. 한락연이 교장으로 되고 교학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직 초시기라 모든 것이 구전하지 못합니다. 교원은 전부 상해에서 초빙하려고 합니다. 영국인들과 로씨야인들도 학교를 세우는 데 도음을 주었습니다.” 한락연은 상해미술전문학교 동창생들인 구양여천(欧阳予倩), 로소비(鲁少飞), 허문천(许闻天), 리맹서(李盟书), 심재용(沈在溶), 왕평릉(王平陵), 륙일소(陆一勺), 천정(钱鼎) 등 선생들을 초빙해왔다. 륙일소가 서양화계 주임을, 허문천이 중국화계 주임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당지의 저명한 화가들인 구연운(邱烟云), 손옥천(孙玉泉), 숭화(崇华) 등을 모셔 강의를 하게 하였다. 봉천미전은 료심지역에서 제일 처음으로 석고 기하모형과 인물사생 교학을 진행하였다. 회화능력을 제고하기 위하여 학교에서는 경상적으로 학생들을 이끌고 북릉, 혼하, 소하연 등 곳에 가서 사생하였다. 1924년10월 한락연은 학생들을 데리고 천산에 가 사생하였다. 11월 6일자 《성경시보》에는 미술학교 학생들이 사생을 마치고 돌아온 소식을 실었다. 11월 15일부터 17일까지 봉천미전 ‘제1기 가을철 려행 도화전람’이 3일간 열렸다.

한락연이 세운 봉천미술전문학교는 갖은 우여곡절을 이겨내면서 조예가 깊고 재능이 있는 수많은 미술인재들을 양성하여 료심 미술교육의 발전을 위하여 빛나는 한페지를 장식하였다. 한락연은 명실에 부합되는 민국 초기 미술교육 제도의 전파자와 시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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