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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11)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5-16 12:18:24 ] 클릭: [ ]

〇김동수

2. 흑토에 남긴 자취

1925년 10월, 한락연은 당의 지시를 받고 봉천을 떠나 할빈으로 갔다.

현재의 흑룡강성 할빈시에는 로씨야 작가 고골리(果戈里)의 이름으로 명명한 100년 력사를 자랑하는 상업거리인 ‘고골리거리’와 조일만(赵一曼)의 이름으로 명명한 ‘일만거리’가 있다.

할빈보육중학교 시절의 한락연(전무송 그림)

이 두거리 교차점으로 되는 곳―지금의 할빈시 남강구 고골리대가 9호에 비취색 기와에 누른빛 담장을 한 궁전식으로 건설한 웅장한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이 바로 1923년 중동철도에서 투자해 지은 보육중학교(普育中学) 교사인데 근 100년의 연혁을 거친 오늘의 할빈시제3중학교이다.

한락연은 보육중학교 미술교원의 신분으로 지하당 사업을 하였다. 한락연은 학교 지하실에 기숙하였는데 이 곳은 한락연의 화실인 동시에 할빈 지하당의 비밀 아지트였다. 한락연은 교수를 하는 한편 초도남(楚图南), 조상지 등과 함께 청년독서회, 평민 야학을 조직하고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 진보적 사상을 전수하였다. 그가 보증하고 입당시킨 왕순일(王纯一)은 직업혁명가로 되였고 부천비(傅天飞), 부천균(傅天钧)은 항일유격대장으로 활약하다가 희생되였다. 중국의 이름 있는 작가 소군은 자기의 소설 〈8월의 향촌〉에서 부천비를 모델로 하여 유격대장 철응의 형상을 창조하였다. 한락연은 왕순일, 소자원을 도와 수분하 비밀련락소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심양 중공만주성위유적기념관 부관장 장로(张璐)는 〈한락연의 동북에서의 혁명활동〉(韩乐然在东北的革命活动)이라는 문장에서 부천비, 부천균은 모두 한락연이 보육중학교 시절에 공청단원으로 발전시켰다고 지적하였다.

할빈시제3중학교(보육중학교)

보기에 너무나 평범한 보육중학교 지하실, 이곳에서 한 열혈청년이 신앙을 안고 원대한 리상을 실현하기 위해 심신을 불태웠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이곳이 혁명가들의 불굴의 정신을 기리고 후대들을 교양하는 기지로 변모되기를 두손 모아 빌어보았다.

1926년 손락천(孙乐天)은 할빈 도리중국팔도가에 락천사진관을 세웠다. 사진관은 자체의 특수성으로 정보공작을 진행하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미술에 조예가 있을 뿐만 아니라 촬영에도 지식이 연박한 한락연은 주동적으로 사진관에 드나들면서 손락천과 사귀면서 많은 사진 리론과 기교들을 전수하였다. 하여 사진관은 갈수록 명성이 높아져 할빈 사진업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굳혔다. 한락연의 드팀없는 계발과 교육하에 손락천은 혁명의 길에 들어섰으며 락천사진관은 공산국제와 우리 당의 비밀련락지점으로 되였다.

지금 할빈시 상지대가와 서14도가가 린접하는 곳에 락천사진관 유적이 색바랜 사진 속의 풍경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다. 시커먼 벽, 때 묻은 층계 손잡이와 유럽식의 층계모양, 이제 금방이라도 한락연이 층계를 내려 손목을 잡을 것 같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치치할시 조선족학생들이 한락연 추모활동을 진행했다.

1926년 4월, 한락연은 오려석 등과 함께 중공북방지방위원회를 건립하였는데 그는 초도남, 소자원, 조상지 등과 한 지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의 노력하에 이 해 겨울에 공청단북방위원회가 설립되였다.

그들은 또 국공합작을 힘 있게 추진하여 국민당원들과 함께 국민당할빈시특별지부를 창건하고 한락연이 집행위원을 맡았다. 한락연은 오려석 등과 함께 1926년 6월에 국민당의 명의로 《할빈일보》를 창간하고 반제, 반봉건 사상을 선전하고 민중을 단결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는 봉계군벌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할빈일보》의 주필 목소무(穆绍武) 등이 ‘적당’(赤党)임을 발견한 봉천성장 공서의 편지(函)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할빈일보》 주필 목소무 등은 한(광우)과 같은 당이다. 한은 조선 당 우두머리(朝鲜党魁)이다. 길림적(吉林籍)이고 일찍 봉천미술전문학교를 세웠다. 자는 락연이다. 주의하기를 바란다.󰡓

1926년 10월 24일, 《할빈일보》는 창간 3개월 만에 군벌 당국에 의해 강제 페간되였다.

1928년 6월 중공중앙은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를 쏘련 모스크바에서 열기로 하였다. 대표들이 안전하게 모스크바에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4월초 만주성위에서는 할빈에 대표접대처를 설치하였다. 1928년 10월, 6차 대회에 참가했던 주은래, 라장룡, 왕덕삼 등은 수분하를 거쳐 귀국하다가 할빈에 묵었다. 그들의 신변 안전을 고려하여 라장룡은 한락연의 거처인 보육중학교 지하실에 배치하였다. 이것은 당시 할빈의 살벌한 형세하에서 한락연에 대한 당조직의 더없는 신임과 믿음이였다.

봉천과 할빈에서의 한락연의 혁명활동이 봉천경찰서의 주의를 일으키자 조직에서는 한락연에게 할빈을 떠나 치치할시에 가 사업할 것을 지시하였다.

당시 치치할시는 흑룡강성의 수부도시로서 시내 인구는 7만여명이였고 수륙 교통이 사통팔달하여 흑룡강 서북부의 문화, 상업, 경제의 중심이였다.

한락연을 룡사공원 감리로 임명하는 임명장

1929년 3월, 한락연은 치치할시 시정공정과 과원 겸 룡사공원(龙沙公园) 감리로 발탁되였다. 한락연은 한편으로는 지하당 공작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룡사공원 건설에 동참하였다. 드넓은 룡사공원은 한락연이 천부적인 예술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광활한 천지였다.

한창 신록이 짙어가는 여름철에 나는 룡사공원을 찾았다. 100년 고풍을 자랑하는 룡사공원은 치치할시 룡사구 공원로 32호에 자리하고 있었다. 공원 대문을 들어가니 정면에 ‘룡사공원(龙沙公园)󰡑이라는 커다란 자연 석비가 맞아주었다. 비문에는 󰡒룡사공원은 1907년에 세워졌는데 당시에 치치할시 서남쪽에 위치해있던 창고기지에 건설했다고 하여 ‘창서공원(仓西公园)󰡑이라고 부르다가 1917년부터 󰡐룡사공원󰡑으로 개명했다.󰡓고 썼다. 룡사공원은 중국 원림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한다.

비석을 지나 좌측에 수령이 몇백년이 잘되는 비술나무 숲속에 유럽식으로 건설된 더없이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정자가 바로 한락연의 대담한 착상으로 설계한 ‘격언정’(格言亭)이였다.

높이가 10여메터 돼보이는 정자 정면 한복판에 커다란 시계를 설치하였고 그 밑에 ‘격언’이라는 한자 두 글자를 투각하였고 량쪽에 치치할시 룡사구정부에서 명명한 력사유적 보호 패말 두개가 높이 걸려있었다. 여덟개의 백색의 화강암 기둥이 전반 삼각모양의 루각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뒤쪽 4개의 기둥에는 내리체로 “마음이 안정하면 초막도 편하고 성정이 바르면 풀뿌리도 향기롭다”(心安茅屋稳,性定菜根香)는 중국 고대의 경구와 파란 바탕에 “목표는 크게 하고 마음은 작게 하라, 지혜는 둥글게 하고 행동은 모나게 하라.”(眼欲大而心小,智欲圆而行欲方)는 흰색 글씨를 쓴 손사막의 격언이 류달리 시선을 끌었다.

격언정 좌측에는 중문과 영문으로 ‘한락연동지의 간력’이라고 쓴 불수강으로 제작한 안내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격언정을 둘러보면서 더없이 불안하고 락후한 년대에 시대와 리념을 초월한 대담한 착상으로 유럽 풍격의 품위 높은 정자를 설계해낸 것도 대단하지만 격언정이 21세기에 들어선 오늘에도 여전히 빛을 뿌리고 있다는 자체는 기적이라고 되새기게 되였다.

우리 말에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다.

가죽 한장, 산중의 왕인 호랑이가 남겼기에 더 소중한 가죽이 아닐가?

한락연의 활동과 재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치치할 홍창성백화상점의 총경리 장경청

1929년 9월, 장경청(张镜清) 총경리는 천진, 심양, 할빈 등 곳을 시찰한 후 8만원을 투자하여 치치할시 복규대가(卜奎大街) 85호에 홍창성백화를 건설하고 10월 15일에 개업하였다. 영업청은 동서로 40메터, 남북으로 20메터였는데 후에 400평방메터를 덧붙였다. 영업실에는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48개의 유리 진렬장과 200메터 되는 목제 매대, 그리고 여러가지 전기설비들이 구전하여 신식 백화의 규모를 갖추었다. 모든 것은 미술 설계사의 도안설계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락연은 개업을 맞으며 독특한 풍격의 매대 광고를 설계하고 출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절찬을 받았다고 한다. 필자는 상술한 자료에서 지적한 미술 설계사가 바로 한락연이 아닐가고 추측한다.

홍창성백화상점이 자리하고 있던 치치할 복규대가

필자가 룡사공원 답사를 마치고 홍창성백화상점 유적지를 찾았을 때는 한창 낡은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짓고 있었는데 유적지는 높다란 양철과 널바자를 둘러막은 공지로 변해있었다.

한락연은 이처럼 초창기 동북 지구의 당조직 건립과 발전에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심양에서 발간하는 《화상조간신문》(华商晨报) 2011년 7월 1일자는 〈력사의 먼지 속에 파묻힌 중국공산당 원로 한락연〉이라는 제목으로 한락연의 일생을 폭넓게 소개하였다.

중국혁명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엽정은 1924년에, 류지단은 1925년에, 라영환은 1927년에, 하룡은 1927년에, 팽덕회는 1928년에 입당하였다. 물론 한락연을 상술한 원수나 장군들과 비교하는 것은 어딘가 타당치 않은 점이 있겠지만 시간적으로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한락연을 중국공산당 원로라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2016년 6월, 중공료녕성위 당사연구실과 료녕성중공당사인물연구회에서 공동으로 출판한 《료녕당사인물전》(료녕인민출판사)은 50명의 중요한 당사 인물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였는데 그 속에 한락연이 들어있었다.

한락연은 한치 앞도 가려보기 힘든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 광명을 찾아 떠났으며 자기의 신앙과 행동을 홰불 삼아 사람들의 앞길을 밝혀주었다.

심양에서 발행되는 《화상조간신문》에 〈력사의 먼지 속에 파묻힌 중국공산당 원로 한락연〉이라는 제목으로 한락연의 일생을 폭 넓게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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