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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13)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6-04 16:11:04 ] 클릭: [ ]

▧ 김동수

제5장‘화로’ 무한에서

1. 동북항일구망총회

사람들은 한구(汉口), 한양(汉阳), 무창(武昌)을 통털어 무한 3진(武汉三镇)이라고 부른다.

력사 문화 도시―무한. 어제도 오늘도 ‘력사’라는 부지런한 로옹은 쉬임없이 부단히 노를 젓고 저어 매일매일 우리와 멀어져가고 있다. 유구한 도시의 풍운변화와 선인들이 걸어온 발자취는 점점 소실되거나 아예 사라져 구석구석에 조금씩 널려있는 희미한 흔적을 통해 간헐적으로 찾아볼 수 있었다. 일사천리로 내닫는 쾌속 발전은 이 도시의 옛 모습을 개변시켰다. 100여년래 수많은 우국지사와 열혈청년들의 암중모색과 간난신고는 사회의 발전과 사람들의 생활에 거대한 역할을 하였다. 광명과 어둠, 문명과 락후, 휘황과 쇠퇴, 격앙된 웨침과 처량한 탄식, 그리고 모든 시시비비는 어느 땐가는 그 결말을 고하고 또 새로운 서광을 맞이하는 것이였다.

한락연이 그린 《반공》 잡지의 표지

1937년 12월 초겨울, 한락연은 귀국하여 곧바로 무한에 도착하였다. 남경이 함락되기전인 1937년 11월 20일, 동북항일구망총회는 무창의 명월교 순직회관에 옮겨와서 사무를 보았다.

무한에서 한락연은 동북항일구망총회의 주요 책임자들을 만났는데 그 중에서 염보항, 서수헌 등은 모두 한락연의 친밀한 벗들이였다. 고숭민 등 사람들은 한락연이 조기 공산당원이라는 신분을 잘 모르고 있었다. 소자원(苏子元)이 동북항일구망총회 당조 서기인 류란파(刘澜波)에게 한락연의 력사 정황을 소개하였고 류란파가 한락연의 당조직 생활을 회복시켜주었다. 류란파는 주은래에게 한락연의 정황을 회보하였고 주은래는 즉석에서 한락연이 동북항일구망총회 활동에 참가하는 것을 동의하였던 것이다.

무한 시기, 동북항일구망총회의 사업은 주은래가 직접 지도하였고 당조 서기에 류란파, 성원들로는 우이부(于毅夫), 장희요(张希尧), 장경태(张庆泰), 염보항, 진선주(陈先舟), 서중항(徐仲航), 우병연(于炳然) 등 사람들이였는데 여기에 한락연도 가입하였다.

동북항일구망총회의 략칭은 동총(东总)인데 1937년 6월 20일, 북경에서 설립되였다.

1931년 ‘9.18’사변 후, 관내로 망명한 동북의 사회 각계 명인들과 애국인사들, 그리고 청년 지식분자와 대학생들은 선후로 동북민중항일구국회(东北民众抗日救国会, 简称为东抗), 동북민중구국회(东北民众救国会, 简称为东救), 동북인민항일구국련합회(东北人民抗日救国联合会, 简称为东联) 등 10여개 사회단체들을 건립하고 여러가지 반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세워진 동북항일구망총회는 온양, 준비, 건립까지 전부 중공중앙과 주은래의 직접적인 령도 아래 진행되였는데 여러 항일구국단체의 핵심 인물들과 엘리트들로 구성되였다.

‘동총’은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사업들을 하였다.

선전간물을 출판하였다. 1938년 2월, ‘동총’ 은 기관간물인 《반공》(反攻) 잡지를 창간하였는데 ‘동총’의 선전부장 우이부가 주필을, 관몽각(关梦觉)이 부주필, 상무위원회 집행위원인 로광적(卢广绩)이 잡자사 사장을 맡았다.

저명한 애국인사 심균유(沈钧儒)가 《반공》잡지 표제를 썼다. 《반공》반월간 잡지는 중국공산당의 항일정책을 선전하고 일제 침략을 반대하고 규탄하는 보도를 했는데 장학량 장군의 각 부와 산동, 화북에 이르기까지 최고 3,000여부를 배포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동총’은 각종 보고회, 강연회를 조직하여 항일전쟁의 조직형식과 유격전술 및 전국의 항전 형세 등을 소개하고 선전하였다. 또한 항일가요를 부르고 항일연극을 선보였으며 항일 내용의 그림전을 열고 선전화를 여러가지 형식으로 살포하였다. ‘동총’의 활동에는 당시 관내로 망명한 동북 각계 인사들과 국내의 일부 작가, 음악가, 화가 등 예술인들과 문화 명인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동총’은 중국공산당의 항일 민족통일전선 정책을 관철, 집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단체들로 대체할 수 없는 작용을 하였고 항일전쟁의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락연은 회화예술가인 동시에 촬영가로서 그는 높은 예술조예와 풍부한 국내외 학습, 생활, 투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한락연은 ‘동총’에서 자기의 전업과 우세인 화필을 무기로 삼아 항일선전활동을 하였다.

한락연은 《반공》잡지의 목판 표지그림을 창작하였는데 대표적 작품들로는 〈나라를 보위하자〉(保卫我们的国家), 〈우리의 고향을 보호하자〉(保卫我们的家乡), 〈노호하라, 로구교〉(怒吼吧,卢沟桥), 〈항일〉(抗日) 등등이다.

1938년의 제2권 제1기에 실린 〈나라를 보위하자〉는 그림은 추운 한겨울 동북의 어느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처자를 집에 남겨두고 항일전선으로 떠나는 남편과 젊은 처자의 뒤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에는 침침한 검은 구름이 낮게 드리우며 눈바람이 휘몰아치고 동구밖의 앙상한 나무가지는 찬바람에 몸부림을 친다.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로 오른 팔로는 아기를 껴안고서 두툼한 솜옷으로 무장한 남편을 떠나보내는 녀인의 자세에 처절함과 애환이 넘쳐나고 있다.

제2권 제2기의 〈우리 고향을 보위하자〉는 그림은 울울창창한 가을철 수수밭을 배경으로 총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는 두 젊은 남녀의 모습을 생동하게 그렸다. 혹시 적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에서 치렬한 항일전쟁의 한단면을 엿보게 한다.

〈항일〉은 보여주는 내용과 폭이 넓다. 하늘에서는 전투기가 날고 군수품공장 굴뚝에서는 연기가 하늘을 치솟고 전사들은 총창을 들고 결의를 다진다.

〈노호하라, 로구교〉는 전사들이 총을 높이 들고 항일구호를 웨치며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일 앞의 전사가 오른발로 일장기를 밟고 있는 모습에서 일제에 대한 사무치는 증오를 볼 수 있어 매우 인상적이다.

이런 그림을 통하여 한락연은 당의 항일정책을 선전하고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고 규탄하였다.

1938년 9월, 무한에서는 한차례의 집체 창작활동이 있었는데 황학루의 성벽에 〈전민 항전〉이라는 주제의 거폭의 유화를 그리는 것이였다. 중국 미술계에서 명망이 높은 류희림(刘曦林)교수는 한 문장에서 “한락연은 일찍 ‘전민 항전’이라는 거폭의 유화를 그려 무한 황학루에 걸었다”고 서술하였다. 중공당사 연구에서 일정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료녕성위당학교의 라점원(罗占元), 왕은보(王恩宝) 등 교수들도 역시 류희림교수와 같은 해석을 하여 한락연이 집체 창작활동에 참가하였다는 사실의 신뢰도가 보다 명랑해졌다. 《무한시지》(武汉市志)의 기재에 의하면 〈전민 항전〉 유화는 길이가 약 50메터, 높이가 약 30메터였는데 전반 그림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여서 상대적으로 독립된 몇개의 화면들이 련결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전사들을 전선으로 환송〉, 〈항일전사들을 위문〉, 〈전호를 파다〉, 〈부상병을 호송〉, 〈탄약을 운반〉 등 내용의 그림들이 서로 호응하며 주제를 나타냈다.

동북항일구망총회 서명부(한락연은 ‘한수공’이라는 이름으로 서명했다)

한락연은 또 〈장고봉의 어제와 오늘〉, 〈서안에서 산서 남부까지〉, 〈산서 동남부 소탕권내에서〉 등 문장을 발표하여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민중의 항일의지를 고무하였다.

한락연은 이처럼 내용이 생동하고 고동력이 있는 여러가지 항일 선전화들을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동총’의 여러가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38년 3월 20일, ‘동북항일 전망 희생 장병들의 추모회’에 참가했고 8월 13일에는 상해 ‘8.13’ 항전 전면 개시를 기념하는 홰불 대시위에 참가했으며 9월 18일에는 ‘9.18’ 사변 7주기 기념 대시위에 본인이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 항일단체와 련락하여 그들도 참가하게 하였다.

한락연은 자주 장강을 건너 한구 의화로(怡和路)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 녀작가이고 신문기자인 스메트레이(스미들리, 史沫特莱)와 련락을 취하면서 전선 구호일군 양성사업과 팔로군에 보낼 약품 구입도 도와주었다. 그 밖에도 전선에서 보내온 소식과 사진을 가지고 뉴질랜드 작가 루이 · 앨리(路易 · 艾黎), 중국인민의 훌륭한 벗인 미국의 작가 에드가 · 스노(埃德加·斯诺) 등 진보적 인사들과 래왕하면서 국제적인 항일선전을 하였다.

한락연이 국제 우호인사들과 두터운 친분관계를 맺고 국제적인 항일선전활동을 할 수 있게 된 주요한 조건과 원인은 그의 락천적이고 쾌활한 성격과 연박하고 풍부한 지식, 그리고 능통하고 숙련되게 장악한 외국어 덕분이였다.

한락연의 딸 한건립녀사는 “아버지는 여러가지 언어를 장악하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는 언어천재였답니다. 어릴 때부터 한어, 일본어, 영어, 로씨야어를 알았답니다. 영어는 전문적으로 배운 어머니보다는 못했지만 그 실력이 대단했답니다. 이는 아버지의 사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지요.”라고 말하였다.

중앙민족대학 장흥권(张兴权)교수는 〈언어학 각도에서 한락연의 다종 언어 사용과 그 능력을 론함〉이라는 론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한락연은 명실에 부합되는 다종 언어 사용자(multilingual, polyglot)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칼 맑스는 외국어는 인생의 분투중에서 일종 무기라고 했다. 한락연은 두가지 방면에서 사람들이 경탄을 자아내는 높은 전업기능을 구비하였는데 하나는 탁월한 미술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숙련된 다종 언어 사용능력이였다. 한락연의 이런 다종 언어 능력과 생활경력은 다문화의 광범한 교류와 다종 언어의 접촉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시대에서 의연히 중요한 력사적 의의를 과시하고 있다.”

1937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가 남경에서 정식 창건되였다. 1938년 5월 조선의용대는 이미 남경국민정부를 따라 무한에 도착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설립 1주기 기념대회에 주은래와 곽말약이 참가하여 축사를 하였다고 한다.

한락연은 조선의용대 동지들과 련계하면서 그들을 도와주고 이끌어주었다. 그는 사업상의 편리를 리용하여 일부 조선족 청년들을 연안으로 보내주었다.

강극부(姜克夫)는 당시 정황을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1939년 9월, 전장은 매우 긴장하였다. 당조직에서는 나를 류란파동지와 함께 연안으로 파견하였다. 당시 나는 산동성 제6전구 유격사령 범축선(范筑先)부대의 현역 장교였으므로 통행증을 소유하고 있어 다니기 편리하였다. 우리가 떠날 림박에 한락연동지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한테 4명의 조선 청년들을 연안까지 데려가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들로는 리명(李明), 왕수성(王守成), 장영(张英, 녀), 그리고 서양화를 배우는 한 청년이였다. 나는 국민당의 감시를 피해 그들을 안전하게 18집단군 서안판사처의 소개로 연안까지 데려갔다.”

아열대 계절풍 습윤기후에 속하는 무한은 무덥기로 사천성 성도, 강소성 남경과 함께 중국의 ‘3대 화로’라고 불리운다. 여름철 기온이 섭씨 42도까지 오른다니 찜통같은 그 정도를 우리 동북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었다.

중경에 있는 박회장님의 조카며느리의 소개로 동사자인 무한에 있는 판경리가 커다란 선물꾸레미를 들고 호텔로 찾아왔다. 꽤나 곱상하고 다부지고 성질이 시원시원한 젊고 애된 녀성이였다. 그는 전문 차 한대를 내여 나와 일행을 안내해주었다.

밖에서는 보슬비가 잔잔히 내렸다.

나는 국민혁명군 정치부 제3청 유적지인 무한시 무창구역 현화로(悬华路)에 자리 잡고 있는 무한시제14중학교를 찾았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3청 유적지

1938년 1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정치부를 설립하였는데 진성(陈城)이 부 장을 맡고 주은래가 부부장, 곽말약이 정치부 제3청의 청장을 담임하고 선전공작을 책임졌다.

학교 학생기숙사 앞 대문으로 들어가 운동장 바로 옆에 있는 2층 건물이 우리가 찾는 국민혁명군 정치부 제3청 유적지 건물이였다. 건물 앞뒤는 아빠트에 막히고 측면이 길 쪽으로 열렸는데 동으로 주조한 곽말약의 반신 조각상과 검은색 대리석 기념비가 깔끔하고 낮다란 나무울바자 안에 세워져있었다. 전반 건물은 그 보존은 물론 주위의 환경도 아주 정갈하게 꾸며져있었다. 참으로 고맙고 다행이였다.

70여년전, 한락연이 드나들며 여러가지 활동을 하던 곳에 발길을 멈추고 그 때를 상상하며 나는 눈을 감고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이튿날,역(易)씨 성의 열정적인 젊은 운전기사의 안내로 고풍스러운 한구세관 청사와 동북항일구망총회 옛터를 답사하였다.

자료에서 동북항일구망총회는 한때 무창시 명월교(明月桥) 순직회관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명월교라는 곳을 아는 사람이 없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거리에서 목적없이 이리저리 헤매다가 우연히 민간적으로 문화재 보호사업을 한다는 범(范)씨 성의 선생을 만나 이야기했더니 그는 우리를 데리고 청풍항(清风巷)으로 찾아갔다. 길고 좁다란 골목 어구에 청풍항이란 골목 표식이 세워져있었다.

그의 말 대로라면 한자로 청풍명월을 함께 쓰는데 청풍항이 있으면 꼭 명월항도 있다는 것이였다.(里, 街, 巷, 弄은 모두 골목, 혹은 작은 거리라는 뜻인데 지방마다 달리 쓰인다. 이곳에서는 항이라고 쓰고 상해 지역에서는 롱이라고 쓴다) 범선생을 따라 한참을 돌았으나 명월항은 찾지 못했다. 부근에 낡고 오랜 집들을 금방 허물고 정리한 넓은 공지가 있었는데 그 곳이 십분 가능하다고 범선생은 말했으나 확정할 수는 없는 일이였다. 참으로 아쉬웠다.

돌아오는 길에 무창 청도로 7호에 자리 잡고 있는 무한기독교 청년회 사무실에 잠간 들렸다.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는 1938년에 무한기독교 청년회에서 사업하였는데 등유지(邓裕芝)가 로공부(劳工部)를 맡았으며 류옥하가 농촌부를 책임지고 호북, 사천 등 곳에서 항일선전활동을 하였다.

책임자를 만나자고 하니 비서가 손님이 있어 안된다는 것이였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만나려는 기미가 없었다. 우리를 만나는 것을 조금 꺼려 하는 느낌이 들었다. 집을 떠나 거의 한달 동안 사처로 다녔지만 처음으로 당하는 문전박대였다.

허나 어쩌는 수가 없어 조금은 씁쓸한 기분으로 그 곳에서 나와 무한시당위 맞은켠에 자리 잡고 있는 당사연구사무실 자료실을 찾아 들어갔다.

사업일군이 내여주는 1938년 《신화일보》 합정본을 들추어보았다. 《신화일보》는 전민이 항일에 뛰여들던 1938년 1월 11일에 한구에서 창간되였다. 《신화일보》는 중국공산당의 항일민주통일전선을 구축하는 진지로서 국공 량당의 새로운 지평선을 개척하는 사업에서 큰 공로를 세웠다고 한다. 손바닥 만한 《반격》잡지의 광고가 실린 신문란이 보였는데 한락연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이 두편이였다.

밖으로 나오니 얼마 멀지 않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무한의 명물 황학루가 저녁노을에 붉게 물들어있었다. 황학루는 호남성 악양시의 악양루(岳阳楼), 강서성 남창시의 등왕각(滕王阁)과 함께 강남의 ‘3대 명루’라고 불리운다. 황학루는 해발고가 61.7메터 되는 타산 정상에 세워졌는데 청나라 때의 동치루(同治楼)를 모방하여 설계하고 축조하였다. 학의 날개와 같이 쳐들린 60여개의 처마와 10여만장의 황금색 유리기와는 마치도 노란 학이 하늘공중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모양을 방불케 하는데 노을 비낀 하늘과 구름과 장강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그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은 그 어디에도 비할 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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