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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19)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 발표시간: [ 2021-07-28 14:00:33 ] 클릭: [ ]

▧ 김동수

3. 보정의 정

1940년 3월, 한락연은 하북성 당현에 있는 팔로군 기중군구 려정초부대를 시찰하였다.

당시 이 부대에서 발간하는 《화선극사》(火线剧社) 사장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하북성문련 주석을 담당했던 왕림(王林)은 1940년 3월 28일 자신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화북 당정군 지도원 한락연은 〈촬영과 국제선전〉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는데 촬영기술상에서 독특한 리해와 견해가 있었다. 례를 들어 말하면 많은 사진 속 인물들은 눈으로 렌즈를 정면으로 마주보기에 의식적으로 사진을 찍기 위한 것이 확연히 나타나 진실하고 생동한 감이 적다고 하였다… 국제적 선전에서 한락연은 초기에는 일제의 폭격 장면 같은 것을 많이 찍었으나 무한이 함락된 후에는 도리여 항전 가운데서의 중국 사람들의 진보적인 면과 신생력량을 보여주거나 표현하는 데 집중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항전승리에 대한 국제적인 믿음을 쌓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한락연은 그 때 벌써 촬영에 대하여 독특한 견해와 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하북성 당현에 있는 진찰기군구사령부 유적지

하북성 당현으로 가려면 보정을 거쳐야 하였다. 보정은 국무원에서 명명한 력사 문화 도시로서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 선 곳이기도 하였다. 현재 저자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 쯤은 화북 지역을 무대로 벌어졌던 《백양전의 용사들》(白洋淀), 《꼬마 병사 장알》(小兵张嘎), 《갱도전》(地道战), 《랑아산의 다섯용사》(狼牙山五壮士) 등 수많은 재미나고 감동적이며 생동한 이야기이나 영화들에 흠뻑 빠졌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아침 일찍 보정시당안국에 들어서니 첫인상에 퍽 후더워보이는 허평주 국장이 열정적으로 일행을 맞아주었다. 그러면서 전국의 당안국은 모두 한집안이라면서 최대한 편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보정에서 당현까지 약 60키로메터, 포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리마같은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기분도 좋았지만 구름 한점없이 쾌청한 하늘과 푸르름이 짙어가는 가없이 펼쳐진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터질듯 시원하였다.

가는 길에 위대한 국제주의 전사 ‘뻬쮼기념관’에 잠간 들렸다. 낮다란 산기슭에 남향으로 터를 잡은 기념관은 비록 면적은 크지 않았지만 품위 있고 우아하게 건설되여있었다. 카나다 공산당원이고 의사였던 뻬쮼은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의료대를 거느리고 1938년초에 중국에 와서 연안, 진찰기변구에서 의료사업을 하였다. 1939년 초겨울, 뻬쮼은 부상자를 치료하던중 손가락 감염으로 중독되여 1939년 11월 12일 하북성 당현에서 희생되였다. 12월 1일, 연안에서 뻬쮼추도대회를 가졌다. 모택동 주석은 〈뻬쮼을 기념하여〉란 저명한 문장을 발표하였다.

나와 일행은 당현 군청진 선전위원인 마녀사의 안내를 따라 화가장촌에 자리 잡고 있는 진찰기군구사령부 유적지에 도착하였다.

유적지의 현재 집주인

구석지고 편변한 이곳에서 일찍 섭영진(聂荣臻)과 려정초(吕正操) 등 장군들은 악렬한 환경을 무릅쓰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나름 대로 용맹히 싸웠다고 한다.

더구나 한락연이 머나먼 이곳에까지 찾아와 국공합작을 위해 애썼다고 하니 자연히 마음이 숙연해지고 한가슴 그 무엇이 차오름을 저도 몰래 느끼였다.

사령부 유적지는 현재 리씨라는 농민의 개인소유로 되여있었다. 다행히도 회색 벽돌과 검은 기와를 얹은 10여평방 되는 건물은 그대로 잘 보전되여있었다. 조금 아쉽고 유감인 것은 문쪽 벽에 붙여 새 건물을 지은 탓에 문물 본체와 주위 환경이 파괴된 것이였다. 그래도 진정부에서 문물보호 간판 두쪽을 문 옆에 걸어놓아 조금은 안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방안에는 세월의 무상함을 자랑하듯이 두터운 먼지가 한벌 깔려있었다. 상처투성이인 낡은 책상 우에는 섭영진 원수의 사진 석장과 그가 쓰던 남포등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나는 마녀사를 보고 이곳은 군청진은 물론 보정시, 나아가서는 전반 하북성의 보귀한 문화재이고 홍색관광명소로서 더 잘 보호하기를 건의하고는 기념사진을 남기고 귀로에 올랐다.

진찰기군구사령부 유적지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고속도로를 잠시 통제한다는 것이였다. 부득불 차머리를 돌려 간이도로에 들어섰다.

좁다랗고 오불꼬불한 산길에 들어서니 지붕이 평평한 가옥들이 눈에 띄였고 길가에는 로인들과 아이들이 지나가는 차량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옷차림이나 표정들을 보니 꽤나 생활형편이 어려운 것 같았다. 함께 차를 탄 보정시당안국 리주임은 이곳은 국가급 빈곤지구인데 현재 이곳에는 ‘386180부대’ 밖에 없다고 하였다. 38은 부녀를, 61은 아동들, 80은 로인들을 가리키는 퍽이나 즉흥적이고 유머스러운 표현이였다. 내가 그래도 3군이 다 구비되여 괜찮다면서 우리 그 곳(연변)에는 ‘80부대’만이 간신히 진지를 고수하고 있다고 말하자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돌아오는 길에 보정륙군군관학교 유적지와 하북성직예총독부 유적지 전람관을 둘러보았다.

청나라 시기 북경 주위의 지역을 직예성이라 불렀다. 직예총독 유적은 보정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유화로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목전 중국에서 유일하게 보존되여있는 성급 아문 건축이라고 한다. 1729년(옹정 7년)에 직예총독부가 세워져 1911년까지 182년 사이에 기선(琦善), 증국번(曾国藩), 리홍장(李鸿章), 원세개(袁世凯) 등 조정의 쟁쟁하고 모모한 많은 관리들이 직예총독을 담임하였다고 한다.

일행은 답사에 많은 방조와 편리를 제공해준 고마운 보정시당안국 사람들과 작별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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