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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국 나의 집6] 60년 당령 로당원의 일편단심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8-03 10:38:19 ] 클릭: [ ]

“오직 당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왔습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얼핏 보기에도 당령 60년의 전경일옹은 차분하면서도 열정적이고 자상하면서도 할말을 다 하는 올곧은 분이였다.

1940년 7월 6일에 훈춘에서 태여나 중학교에 입학하던 1953년에 부모를 따라 흑룡강성 화천현으로 이사갔다가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라”는 당의 호소를 받들고 1959년 겨울에 참군한 전경일은 중국인민해방군 심양군구 모 통신병부대에 배치되였다.

“나는 8년동안 해방군부대에서 근무했어요. 허리까지 쌓인 눈길을 헤치면서 통신선을 검사하고 수리하는 통신선로원으로부터 반장, 대리패장으로 있으면서 5호전사로도 되고 해마다 구두표창(총 8차례)을 받았으며 3등공 1차를 세웠어요.”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때를 회억하면 항상 젊어진다는 전경일옹이다.

전경일옹.

당시는 국무원총리 주은래의 직접적인 포치에 따라 통신병부대가 영구성통신선로 건설과 대공률 단파통신소를 위주로 전국 29개 성, 시, 자치구에 통신망을 구축하던 시기였는데 할 일도 많았지만 후근보장이 잘 되지 못하여 무척 힘들던 시기였다.

참군초기 긴장한 훈련과 기술학습을 소화한 그는 동북의 농촌에서 왔고 키가 작다는 리유로 련대 양계장책임자로 배치받는다. 20살 나어린 청년인 전경일의 국방통신건설 제일선의 어엿한 통신병으로 된 자호감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아픈 순간이였다. 통신병더러 닭을 키우라니 억이 막혔다. 하지만 상급의 명령이라 견결히 집행해야 했다.

양계장이라야 영방에서 수킬로 떨어진 텅 빈 집 한채였다. 수백명전사들의 화식보장을 위해 건설한 양계장이였으나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전경일에게 넘겨진 것이였다. 전경일은 어려서 부모들이 닭알을 부화시키던 방법을 모방하고 다시 양계관련 서적을 탐독하면서 낮과 밤을 양계장에서 보냈다. 현대화설비가 없던 때라 양계장의 환경은 말이 아니였다. 지린내가 코를 찌르고 자체로 닭사료를 장만하느라 동분서주하여야 했다.

전경일옹이 받은 상장과 상패.

“결국 양계장에서 입당했어요. 3등공을 세우고. 허허허…” 전경일옹은 참군하여 2년만에 입당하고 부반장으로 임명되였으며 그후 반장, 대리패장으로 승진하여 항상 맡은 바 임무를 넘쳐 완수하였다.

마침 그 시절 훈춘현 량수공사병원에 근무하는 문명옥(77세)녀사를 만나 아기자기한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다. “화천에서 다시 훈춘으로 이사온 부모님한테 탄친(探亲)왔다가 친척의 소개로 한번 만났는데 첫눈에 마음 들었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전경일옹은 옆에 곱게 앉아 자기 말을 듣고 있는 안해를 돌아본다. 순간 문명옥녀사는 순진한 처녀시절로 돌아간 듯 얼굴에 홍조를 띄운다.

1968년 그는 8년간 근무하던 부대생활을 접고 훈춘현 진교공사(지금의 영안 등) 부주임에 부임되여 사회주의 새 농촌건설을 전두 지휘하게 된다. “한창 젊은 나이였고 또 금방 퇴대한 군인이라 살기 좋은 농촌을 건설하라는 당의 지시를 높이 받들고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다가 1971년 훈춘현 도로공사(양로단)가 설립되면서 기층 당지부서기 겸 보도원으로 발령이 내려왔다.

“처음이라 힘들었어요.” 로동자모집부터 기술학습에 정치학습 거기에 간부대오 건설까지 군대식으로 밀고 나가기 시작했고 그러한 노력은 그가 퇴직하던 1996년까지 이어졌다. “기구개혁 때문에 령도간부가 앞장서 퇴직하라는 상급의 요구가 있었어요.” 퇴직년령이 아닌 56세에 퇴직한 리유에 대해 그는 짤막하게 대답한다.

“기실 공산당원에게 있어서 퇴직이라는 말은 사업환경을 바꾼 것뿐이지요.” 그는 퇴직하기전부터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사회구역의 환경, 위생질서 때문에 눈살을 찌프리고 있었다.

1965년 전우들과 기념사진을.

퇴직한 이튿날, 가두판사처에 찾아간 전경일은 사회구역의 환경, 위생건설을 강화할 데 관한 건의를 제기하고 자기가 조장을 맡겠다고 자청하였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는 초심을 잊지 않은 그는 6년동안을 하루와 같이 군중을 동원하여 강평사회구역(당시는 연하사회구역)을 거리와 광장의 위생환경이 깨끗하고 여러가지 오락시설과 운동기구가 즐비한 살기 좋은 사회구역으로 건설하였다. 지금도 이 구역 주민들은 “전서기가 우리를 이끌고 이 동네를 살기 좋은 동네로 만들었다.”고 높이 평가하군 한다.

안해가 정령퇴직한후 정하가두 로인협회 회장사업을 맡아하던 전경일은 “로무송출로 연변의 경제를 끌어올리자”는 지방정부의 호소를 받들고 결연히 해외로무에 나선다. “군대에서 다져진 신체는 별문제 없었지만 언어소통이 잘 되지 않아 힘들었어요. 지금도 조선말은 잘 하지 못해요.” 전경일은 한국의 어느 농촌에 가서 일하던 시절을 돌이키면서 젊은 사람들이 ‘전경일씨, 문명옥씨’라고 부르면 기분이 좋지 않았던 기억을 되살린다. 이는 같은 문자와 언어를 사용하지만 쓰임이 다른 페단이다.

3년동안 한국에서 일하고 2011년에 훈춘에 돌아온 전경일은 강평사회구역당총지에서 조직하는 여러가지 활동에 적극 참가하는 동시에 로인들의 각종 체육활동에도 빠짐없이 참가하면서 만년을 보내고 있다. 그는 현재까지 7년째 강평사회구역 탁구협회 회장사업을 맡고 있다. “모주석께서 ‘신체는 혁명의 근본’이라고 하셨는데 대단히 지당한 말씀입니다. 제가 몸이 허약하면 어떻게 인민을 위해 복무할 수 있겠습니까? 퇴직한지 벌써 25년이 되였습니다만 그래도 건강하길래 사회구역과 주민들을 위해 일할 수 있은게 아니겠어요? 건강이 밑천이고 건강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경일옹은 이렇게 말하면서 80세 로인답지 않게 여러가지 체조동작과 몸놀림을 선보인다.

회갑잔치에 남긴 가족사진.

“그뿐이 아니지요. 매일마다 자전거를 타고 쌍신3대에 한번씩 갔다오군 합니다.” 옆에 있던 문명옥녀사의 말이다. 쌍신3대에 있는 처남네가 한국에 가면서 집을 봐달라고 하였는데 그 집마당에 남새와 감자, 옥수수를 심었다는 것이다.

쌍신3대는 그의 집에서 자전거로 45분거리로서 80대의 전경일로인에겐 힘겨울법 한데 “그냥 산보삼아 다니고 곡식이 자라는게 참으로 대견스럽다.”고 화제를 돌린다.

21살 젊은 나이에 입당하여 60년간 오로지 당을 믿고 당이 가리키는 대로 걸어온 전경일옹은 슬하에 아들딸을 두었는데 의학원을 졸업한 딸은 훈춘시병원에 출근하고 외국어대학을 졸업한 아들은 훈춘에서 국제려행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어려서부터 엄격한 부모의 슬하에서 항상 자기에 대한 요구를 높여 언행일치, 이신작칙을 대물림보배처럼 여기는 사람들이다.

“중국공산당원이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중국공산당은 영광스럽고 위대한 당이라는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증명하였다. 100년은 거창한 력사에서 하나의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중국공산당은 모주석을 위수로 하는 제1대 혁명가들로부터 습근평총서기를 핵심으로 하는 현재의 당중앙에 이르기까지 전국인민을 이끌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였고 동아병부라 불리던 중국을 세계 최대강국으로 건설하였다. 나는 중국공산당이 앞으로 중국을 더욱 부강하게 건설할 것이라 굳게 믿으며 이런 당이 있는 한 중국꿈은 꼭 실현될 것이라 확신한다.”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을 맞으면서 60년 당령을 가진 한 로당원의 진실한 소감이다.

/길림신문 김룡, 김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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