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20)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 발표시간: [ 2021-08-13 16:02:09 ] 클릭: [ ]

▧ 김동수

4. 금곡원역에서

1939년 한락연은 시찰 당시 서안에서 출발하여 동관(潼关)과 락양을 거쳐 남촌나루터(南村渡口)에서 황하를 건너 산서성으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그의 자취를 하나하나 찾아 밟으며 남하하는중이였다.

오라지 않아 황하를 건넌다니 마음은 저도 모르게 설레이고 흥분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황하 류역은 중화문명의 발상지로서 자고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이 지역 패왕이 되기 위해 엎치락 덮치락 각축전을 벌리던 곳이였다.

뻐스가 먼지가 뽀얀 좁다란 황토길을 빠져나가자 눈앞에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드넓고 푸른 호수가 나타났다. 알고 보니 이 구역은 소랑저(小浪底) 언제의 상류구역으로서 황하가 이처럼 맑다는 것이였다. 늘 머리 속에 싷누런 흙탕물로 기억되고 음각되여있던 황하의 맑은 물에 손을 담그니 차가움보다는 끝없는 감회와 감동의 물결이 손끝을 타고 전신에 퍼졌다.

당지 사람들이 황하대교라 부르는 좁고 긴 다리를 건너니 곧바로 하남성 맨츠현 남촌나루터였다.

한락연의 유작을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있는 산단배려학교 학생들. 이 그림은 현재 중국미술관에 수장되여있다

한락연은 당시 이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 산서성 경내로 들어갔다.

남촌 어구에서 현지 사람들을 만났는데 옛날 나루터 자리는 소랑저호수 건설과 함께 물속에 잠기고 흔적도 없다고 말하였다. 더없이 아쉬운 마음으로 관광용으로 사용하는 현재의 작은 나루터와 남촌마을 어구에서 한락연의 자취를 가슴으로 느껴보고 사진을 남기고 길을 재촉했다.

맨츠현성을 지나 략양까지 100원을 주기로 하고 나와 일행은 낡고 허술한 작은 봉고차에 올랐다. 먼지투성이인 차안을 둘러보니 어딘가 조금 걱정되였다.

휴식도중 길가에 작은 수석관이 있어 잠간 들렸다. 뚱뚱한 녀주인의 말로는 전부 황하석이라고 하는데 그 진가는 딱히 알 수 없었지만 모양이나 문양,색갈이 매우 아름다왔다. 내 느낌으로는 자연석이 아니라 사람의 손길을 입은 100% 제작품이였다. 사실 수석애호가인 나는 가공을 거치지 않은 자연석을 애착하고 즐긴다. 몇년전부터 시간을 내여 두만강, 해란강, 부르하통하, 지어는 왕청쪽의 가야하에까지 가서 강변을 누비며 탐석활동을 하였다. 수석계에서는 자연미, 영구미, 유일미를 수석의 ‘3대 미’라고 한다. 나무와 풀, 물과 돌, 나비와 벌들이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자연의 품속에서 돌과 교감하면서 수석의 3대 미를 찾고 느끼노라면 저도 모르게 자연의 섭리와 리치를 알게 되고 령적인 세례와 감수도 받게 된다.

봉고차는 그런대로 안전하게 락양 시가지에 도착하였다. 모두들 지쳐있었다.

1,500여년의 유규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고 있는 락양은 화하(华夏)문명의 발상지이고 중국의 4대 옛 도읍중의 하나이다. 락양은 자고로 자체의 우월한 지리적 위치와 험고한 지세로 하여 력대 제왕들의 리상적인 도읍지였고 군사적으로 반드시 쟁탈하는 요충지였다고 한다. 무려 열세개 조대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각자 자기들의 통치를 펼치면서 장기간 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이였다고 한다.

1939년 한락연은 통신에서 “23일9시 우리는 락양 금곡원역에 도착하여 친구의 도움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오후에는 제1전구 위사령장관과 참모장을 만나 보았다… 24일 5시 반에 금곡원역을 출발하여7시 반에 맨츠에 도착하였다.”라고 썼다. 위사령장관이 곧 위립황을 가리킨다.

락양의 금곡원역과 제1전구 위립황사령부 유적지는 한락연이 족적을 남긴 곳으로서반드시 답사해야 할 지점들이였다.

하루저녁의 충전을 마치고 아침 일찍 거리에 나섰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나와 일행이 주숙을 정한 호텔 앞거리가 바로 금곡원로(金谷园路)였다.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락양시 기차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리에서 바장이는 로인들께 물었더니 지금의 락양기차역을 이전에는 금곡원역(金谷园站)이라 불렀다고 한다. 더 확인해보려고 락양기차역에 찾아가 당판(党办)이라고 간판을 건 사무실을 노크했다.

내가 서툰 중국말로 자아소개를 하고 한락연에 대해 소개하자 그들은 너무나 좋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당안을 뒤지더니 지난 세기 50~60년대 금곡원역의 오랜 사진을 제공해주는 것이였다. 참으로 고마왔다.

기쁜 심정으로 거리에 나와 금곡원거리라고 씌여있는 도로표식을 사진에 담고 다음 목적지인 ‘팔로군 락양판사처’ 유적지를 찾아갔다.

팔로군 락양판사처기념관을 찾아

1937년 ‘7.7’사변이 폭발한 후 일본제국주의는 전면적인 중국 침략전쟁을 발동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창의하에 국공 량당은 제2차 합작을 하고 광범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하였다. 1938년 11월 국민당정부와 협상하고 우리 당은 제1전구 사령부 소재지인 락양에 팔로군 판사처를 건립하였다. 일찍 류소기, 주덕, 팽덕회 등 동지들이 이곳에서 사업을 지도하였다. 특히 류소기동지는 이곳에서 《공산당수양》이라는 저서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1942년 2월 국공관계가 악화되면서 락양의 형세가 긴장되자 판사처를 철소하였다.

팔로군 락양판사처 유적지는 원래 청나라 때의 민가로서 현지 사람들은 ‘장가대원’(张家大院)이라고 불렀다. 현재 이곳은 하남성 성급 문화재보호단위로서 1987년부터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하였는데 락양시의 중요한 애국주의교양기지로 자리매김되여있었다. 전람실에는 제1전구 사령이였던 위립황(卫立煌)이 모택동, 주덕 등 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료적 가치가 높은 진귀한 사진들이 많이 전시되여있었다.

더욱 나를 기쁘게 한 것은 한락연과 절친한 사이였던 루이 · 애리가 차로 연안에 물자를 수송하는 사진을 발견한 것이였다. 한락연은 그의 유작에서 루이 · 애리가 제공해준 차를 타고 돈황과 신강에 진출하였다고 기재하였다.

뉴질랜드 사람인 루이 · 애리는 1927년경에 중국에 와서 중국 로동자들의 렬악한 로동여건과 생활을 목격하고 중국국제기아원조회를 도왔다. 1932년을 전후로 호북성에서 수재민 원조를 도왔고 30년대 중반에는 홍군을 지원하는 지하공작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41년부터 루이 · 애리는 공업합작사를 위하여 배려학교를 세우고 많은 젊은 기술인재들을 육성하였다. 그가 설립한 감숙산단배려학교(甘肃山丹培黎学校)는 창의적인 현대 교육방법으로 학생들을 교육하였는데 한락연을 통하여 이 학교 정황을 알게 된 장치중장군은 자기의 작은 아들을 이 학교에 입학시키였다. 한락연은 루이 · 애리와 더없이 각별한 사이였는데 그와 거래하면서 국제적인 항일선전을 하였다고 한다.

한락연의 유작 가운데 산단배려학교 학생들의 학교 생활을 묘사하고 반영한 그림이 있는 것만 보아도 그들의 밀접한 관계와 친밀한 우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락양시정부 청사는 락하를 건너 신구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로구역은 어지럽고 란잡했지만 신구역은 도처에 현대적 고층건물이 즐비하고 곳곳에 꽃과 나무가 우거지고 록지가 푸른 주단처럼 펼쳐져있었다. 말 그대로 현대적 화원도시였다.

나는 락양지방지(洛阳地方志) 사무실로 찾아 들어갔다. 산서성에서도 그렇고 하남성에 속한 이곳에 와서도 현지 사람들의 지방말을 알아듣기가 무척 힘들었다.

예상한 대로 모두들 한락연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내가 한락연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하자 그들은 조선족 가운데도 한락연같이 대단한 인물이 있느냐며 놀라운 표정들이였다. 한락연의 력사자료나 사진자료를 수집하려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하북, 산서, 하남과 섬서 일대를 답사중인데 국민당 제1군구 사령부 유적지를 찾는다고 얘기하고 그들의 도움과 방조를 청하였다.

그들은 당안자료를 한참 뒤적이더니 락양시 해방로 아니면 방점로 부근에 계광루(继光楼)라는 옛 건물이 있는데 십중팔구는 우리가 찾고 있는 위립황사령부 유적지일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곳을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오지랍이 좋은 택시기사는 락양에 와서 백마사와 룡문석굴을 보지 않으면 한일 후회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백마사에 가서 향불을 태워야 모든 일이 척척 잘 풀리지 그렇지 않으면 촌보난행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가 태워주는 대로 먼저 방점로에 도착하니 락양시박물관이였는데 새 건물을 짓고 한창 이사중인 것 같았다. 대문 접수실에 있는 로인과 찾고 있는 지점을 물었더니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500메터 더 나가 해방로 입구에 있다는 것이였다.

로인이 알려준 대로 십자로 두세개를 건너 해방로와 중주중로(中州中路) 교차지점 동남쪽에 우리가 찾고 있는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현대식 건물에 둘러싸여 큰 거리에서는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좁다란 골목을 이리저리 꺾어들어가니 4합원식 옛 건물이 나타났다. 걸려있는 간판만 봐도 틀림이 없었다. 나는 더없이 기뻤다.

사무실을 노크하니 50살 쯤 되여보이는 깔끔한 녀성이 우리를 맞아주면서 이곳은 지금 락양시 백마사한위고성문물관리소(白马寺汉魏故城文物保管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면서 간단한 설명을 곁들었다.

남촌 나루터의 현재 모습

이곳은 락양서공병영이라고도 부르는데 민국 3년(1914년에 착공하여 1916년에 준공)에 중화민국 대총통이던 원세개가 세웠고 그 후 오패부가 확건하였다.

1937년 ‘7.7’ 사변 후 장개석은 이곳에 항일 제1전구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1939년 1월 위립황이 제1전구 사령으로 위임되였고 5월에는 륙군 2급 상장으로 승진하였고 9월에는 하남성정부 주석을 겸하였다. 위립황은 팔로군과 서로 우호적으로 지내면서 상호 여러 면의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위립황은 연안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사령부 동쪽에 연안 동굴집을 모방하여 회색벽돌로 된 시음서실(惜阴书室)이라는 책방을 건설하였다. 현재 유적은 전국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명명되여있었다.

밖으로 나와 이리저리 옛 건물을 둘러보다 이 부근에서 한생을 살았다는85살 진중문(陈忠文)로인을 만났다. 로인은 머리가 어찌나 흰지 백설이 그대로 내려앉은 것 같았다.

사합원 서쪽켠 한모퉁이에 수령이 2, 3백년 쯤 되여보이는 큰 나무 한그루가 름름하게 서있었는데 가지에는 얼핏 보면 우리 지방의 줄열콩같은 흑갈색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진로인에게 나무이름을 물었더니 조각수(皂角树)라고 부르는데 나무열매를 물에 담근 후 그 물에 빨래를 하면 거짓말같이 때가 잘 진다고 하였다.

세월은 흘렀어도 조각수는 오늘도 도심의 란잡하고 좁다란 골목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꿋꿋하고 억세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력사의 견증자로 남아있었다. 한락연의 얼과 기운을 머금은 채…

0

관련기사 :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