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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21)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8-17 10:49:47 ] 클릭: [ ]

▧김동수

제7장 서북에 머물다

1. 보계에서 체포

한락연의 진동남(晋东南) 지역에서의 활동은 국민당 당국과 특무들의 의심을 자아냈다.

1940년 5월, 한락연은 팔로군 전선총부에서 떠나 93군에 가서 위위에게 팽덕회의 의견을 전달하였다. 위위는 편지를 써서 한락연에게 넘겨주면서 팔로군서안판사처 아니면 중경에 있는 주은래공관에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한락연은 서안에 와서 칠현장(七贤庄)에 있는 팔로군판사처에 편지를 넘겨주고 보계를 거쳐 중경으로 가려고 하였다.

양공소가 함께 동행하였다. 두사람이 보계역에 도착했을 때는 경비가 매우 삼엄했다.

보계시 금대구인민정부 청사 앞거리가 서광로이고 155번지에 옛 보계기독교청년회가 있었다.

양공소(杨公素)는 1937년에 연경대학을 졸업하고 국민당 93군에서 지하공작을 하였으며 194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팔로군 총부 비서를 담임하였다. 그는 해방 후에 선후로 중국 주재 네팔, 윁남, 희랍 등 나라의 대사를 지내다가 1983년에 리퇴직한 로혁명가이다. 그는 〈한락연동지를 회억하여〉란 문장에서 한락연이 보계에서 체포될 때의 정황을 아래와 같이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1940년 4월 5일, 우리 두사람은 태항산을 떠나 황하를 건너 서안에 왔다. 우리는 서안에서 이틀 묵었는데 그 사이 한락연은 칠현장에 있는 팔로군판사처로 다녀왔다. 우리는 중경까지 가는 뻐스표를 사가지고 기차를 타고 보계로 갔다(당시 중경으로 가는 뻐스는 보계에서 출발하였다). 저녁 무렵에 기차는 보계역에 도착하였다. 갑자기 군경들이 밀집해 늘어서며 경계가 심해지는 것이 알렸다. 출구에서는 헌병들이 눈을 부릅뜨고 증건과 짐을 검사하고 있었는데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차고넘쳤다. 한락연은 나의 귀가에 대고 두려워 말라고 말하였고 조금 긴장된 표정이였지만 그는 인차 안정된 모습으로 무사히 검사를 통과하였다. 그와 나는 보계 기독교청년회초대소에 주숙을 정하였다.

우리는 서로 마주하고 있는 단독방에 들었다. 한락연은 나보고 보계현 현장은 오랜 친구이고 동북사람인데 저녁에 함께 만나 식사를 하자고 하였다. 두사람이 현장을 찾아가자 그는 열정적으로 접대하였는데 한락연은 모인 사람들을 잘 알고있었다.

식사 후 려관에 돌아와 방에 들어서는데 헌병들이 무리 지어 들이닥치더니 한락연과 그의 짐까지 함께 끌고 갔다… 나는 한락연이 체포된 것을 현장에게 알렸고 93군에서도 알게 되였다.”

한락연은 놈들에게 체포되여 섬서성국민당정부 청사에 갇혔다. 적들은 한락연의 입에서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자 그를 서안 태양묘문특별구류소[서안시 태양묘문감옥(太阳庙门监狱)이라고도 불리웠음]에 압송하였다.

태양묘문감옥

 

한락연은 옥중에서 전우들과 단합하여 기민하고 슬기롭게 적들과 싸워 생활대우와 식사를 개선하였고 병을 보이고 약을 쓸 수 있도록 쟁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간수들에 대한 귀순공작도 하였다. 그의 공작으로 류(刘)씨 성의 한간수는 적들과 결렬하고 1940년에 연안으로 갔고 후에 혁명에 참가하였다. 1952년, 한락연의 제자인 화가 황주는 란주군구 문화부에서 사업할 때 그 간수를 만나보았는데 그는 이미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군대 계급의 대위였다고 한다.

한락연이 체포되였던 보계역과 기독교청년회 옛터가 바로 우리가 답사해야 할 지점들이였다.

보계(宝鸡)는 섬서성 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서북, 서남과 중원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중추였다. 보계시는 국가급 위생도시답게 밝고 깨끗하였다.

보계시당안국에 찾아가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통일적으로 의무로동하러 가고 금방 입사한 새내기 직원 혼자서 텅 빈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보계 기독교청년회 옛터 관련 당안자료들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금시초문이라며 어리둥절해했다. 한참 후 국장이 돌아와 사연을 들은 후 여러 곳에 전화를 넣고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며 식사를 배치하였다. 시정부 판공실에서 부임되여왔다는 녀국장은 생김새와 같이 성격이 시원시원하였다. 식사 후 나는 보계시민족종교국으로 찾아가 쉽게 방주임을 만났다.

방주임의 소개로 나는 보계에서 제일 오랜 력사를 가지고 있다는 승리로교회와 안시교회를 찾았다.

승리로교회 책임자인 리예란(李艺兰)녀사와 머리가 희슥희슥한 남성분이 나와 일행을 안내하여 보계시금태구(金泰区)에 위치해있는 서광로(曙光路) 155번지를 찾아가 옛 교회가 이곳에 있었고 교회내에 기독교청년회가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공업합작사(工业合作社) 보계판사처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80여년전에 한락연이 드나들었던 력사의 현장에서 아무리 사면을 둘러보아야 당년의 흔적과 모습은 티끌 만큼도 찾아볼 수 없고 그 대신 새로 지은 고층아빠트들이 허우대 크고 싱거운 나그네마냥 줄줄이 서있었다. 더 정확하게 확인하고 옛 사진이라도 수집하려고 나는 안시교회에 들어가 방주임이 알려준 대로 조장로를 찾았다. 현재 교회를 맡아보고 있는 조장로의 딸은 아버지는 년세가 많은 탓에 지난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딱한 표정을 지었다. 늦게 찾아온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런대로 전화번호를 남기고 자료 부탁을 드렸다.

보계 답사를 마치고 서안으로 가는 내내 나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무거웠다. 살기등등한 헌병놈들에게 끌려 침침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한락연의 뒤모습이 마치도 높고 웅장한 바위처럼 눈앞에서 커져만 갔다.

옛도읍 서안에는 종루, 장안성, 서안사변 유적지 등등 중후한 력사 문화 유적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그래서인지 서안 사람들은 서안시 자체가 거대한 로천박물관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팔로군서안판사처기념관을 찾은 필자

서안팔로군기념관(西安八路军纪念馆)은 서안시 북신가 신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서안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이곳을 ‘칠현장’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섬서성은행에서 1935년부터 개발하고 건설하였는데 칸만 해도 2,0000여칸이 된다고 한다. 칠현장이면 한락연이 마지막으로 국민당93군 참모장 위위의 편지를 전해주었던 곳이였다.

1937년초 홍군 서안 주재 판사처는 칠현장에 정식으로 건립되였는데 엽검영(叶剑英)이 총책임자로 되고 장문빈(张文斌), 리도가 선후로 련락처 비서장을 맡았다. 1946년 10월 팔로군 서안 주재 판사처는 연안으로 옮겨갔다. 1985년 1월 유적은 전국중점 문물보호단위로 되였다. 오늘 이곳은 서안의 중요한 홍색관광명소로 되여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었다.

전람실에서 나는 여러 곳을 누비며 그토록 애타게 찾던 서안 태양묘문감옥 사진을 발견하였다. 바로 한락연이 체포된 후 감금되였던 감옥 사진이였다. 나는 날듯이 기뻤다.

‘엎드린 김에 절’이라고 해설원에게 서안 국민당성당부 사진도 있으면 제공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전람실에는 그런 사진이 없고 오후에 사업일군들이 출근하면 물어보라는 것이였다.

이미 정오 12시가 넘었는지라 길가에서 빵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 오후2시 출근 시간이 되자 직접 관장실 문을 노크했다.

50대 초반의 성이 상궁(上宫)이라는 친절하고 상냥한 녀성 관장이 열정적으로 맞아주면서 자기들한테는 그런 사진과 자료들이 없고 극히 필요하면 양호성 장군의 막내딸 양증영(杨拯英)씨가 지금 서안시 성정협 사택에서 살고 있는데 서안의 어제와 오늘의 력사변천을 손금 보듯 잘 알고 있으니 한번 찾아가보라는 것이였다.

일생에 이런 기회도 드물었다. 유명한 장군의 딸을 만나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나는 피곤해하는 박회장님과 함께 무작정 떠났다.

양호성장군의 막내딸 양증영녀사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 필자

이리 묻고, 저리 묻고 끝내 서안시 건국로에 자리한 성정협 사택 37호1단원 1층 1호에서 살고 있는 양증영씨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더니 70여세 되여보이는 바깥로인이 누구냐며 경계의 어조로 물었다. 신분을 밝히고 사연을 말했더니 객실로 안내하고 조금 기다려보라는 것이였다.

방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저으기 놀랐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평범하고 소박했다. 솔직히 유명한 장군의 딸이니 아주 으리으리하고 궁전같이 화려한 자택에서 살고 있으려니 여겼는데 너무나도 생각 밖이였다.

조금 후 기척이 나면서 보라색 털실적삼 우에 붉은 바탕에 하얀 꽃을 수놓은 솜조끼를 받쳐 입은 안로인이 조심조심 거실에 들어섰다.

보는 첫 순간 양호성 장군과 많이 닮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후리후리한 키와 불거진 관골, 그리고 구리빛 얼굴에서는 더없이 강의하고 굳센 의지를 가지 분이라는 것이 력력히 나타났다. 1934년생인 양증영씨는 다리가 골절되여 오래동안 투병중인데 요즘 좀 차도가 있다는 것였다. 그는 사유가 더없이 명석하고 똑똑하였다.

보통 관례는 먼저 성정협에 련락하여 동의를 거친 후에 찾아올 수 있는데 어떻게 왔느냐며 대단히 의아해 했다.

나는 자아소개를 한 후 한락연의 일생에 대해 상세히 말씀드리고 찾아온 사연을 말하였다. 그는 한참 사색을 더듬더니 태양묘문거리에 확실히 감옥이 있었고 섬서성 국민당정부는 지금의 섬서일보사 부근이라고 확실하게 찍어 말하였다. 또 부근에는 서안녀자고중도 있었다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근간에 출판한 《양호성전》(杨虎城传) 두권을 선물하고는 1937년 10월 한락연이 양호성 장군과 함께 귀국할 때 배의 갑판에서 찍은 사진을 펼쳐보이고는 “이 분이 한락연이얘요. 저는 어린 탓에 그를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락연이라는 이름을 많이 들은 것 같아요. 그림을 잘 그렸대요.”라고 말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접때 북경에서 한건립녀사가 나에게 보여주던 사진과 똑같은 사진이였다.

내가 한락연의 자녀들이 현재 북경에서 살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저으기 놀라시며 이제 만나게 되면 꼭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앞으로 기회가 되면 만나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 세대 사람들의 많은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싶다고 심정을 털어놨다.

내가 싸인을 부탁했더니 거절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그러고는 이 크나큰 도시에서 길잡이 하나없이 어떻게 찾아다니겠냐며 지인을 소개해준다며 전화를 넣었는데 련락이 되지 않았다.

투병중인 로인에게 더 심려를 끼치기 저어되여 기념사진을 남기고 작별하였다. 나는 비록 주글주글하고 거칠지만 더없이 따뜻하고 포근한 양증영씨의 손를 잡고 빌고 빌었다. 부디 옥체건강하시라고!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다. 나와 박호만 회장이 양증영씨를 만나는 사이에 섬서성당안국에서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섬서성 국민당정부 사진을 찾았다는 것이였다. 알고 보니 섬서성당안국의 모 처장이 직원들에게 특별 임무를 하달하여 백사불구하고 머나먼 동북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우리들의 요구를 해결해주라고 시켰던 것이다. 참으로 너무나도 감사하고 고마운 분들이였다.

서안시기독교청년회(西安市基督教青年会)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여러 곳을 물어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풍채가 좋고 어딘가 인정이 많아보이는 75세의 전전덕(田全德) 총간사가 나를 만나주었다. 나는 한락연에 대해 소개하고 여기까지 찾아온 까닭을 이야기하였다.

보계역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필자

“혹시 한락연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어요?” 하는 나의 질문에 그는 “예, 희미하지만 어렸을 때 아버지한테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요.”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는지요?” , “저의 아버지 이름은 전경복(田景福)이라 하는데 서안기독교청년회의 창시자입니다. 아버지는 1940년대에 두번이나 국민당에게 체포되여 전문 공산당 혐의분자들을 투옥하는 태양묘문감옥에 갇히셨어요.”

“태양묘문감옥은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지금도 서안에는 태양묘문거리가 있어요. 바로 그 곳에 있었어요.”

그러면서 시간을 따져보면 한락연과 함께 갇힐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태양묘문감옥이면 바로 한락연이 갇히였던 감옥이였다.

전전덕 총간사는 선친이 생전에 회억록을 출판했는데 시간이 오래고 수차 이사를 하는 통에 찾을 수 있겠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선친의 증명사진을 제공해주었다.

서안에서 많이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악―화산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5악중의 하나인 화산의 그 당당한 기세와 장엄함은 뭇산이 비길 수 없었다. 화산은 또한 도교(道教) 명산으로서 산속에는 세월의 이끼를 머금은 많은 도교 절간들이 있는데 그 절묘함과 은은함을 바라보노라면 나도 어느새 구름 속을 유유히 노니는 신선이 된 느낌이 들었다.

인간으로 말하면 화산은 근육이 울끈불끈하고 골격이 우람진 남성에 비할 수 있었다. 생겨난 모습 그대로 언제나 변함없는 산, 비바람 몰아치고 광풍이 불어도 언제나 신음을 모르는 산, 수많은 사람들의 무참한 발길도 한품에 너그럽게 품어주는 산, 이것이 곧 화산의 매력이고 웅성(雄性)의 매력이 아닐가?

그러면서 ‘한락연이라는 인간이 어찌 보면 화산이라는 존재로 남아있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에 머리가 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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