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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국 나의 집9] <빠알간 자화상>에 담긴 이야기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8-23 09:40:04 ] 클릭: [ ]

중국공산당 창건 100돐을 맞는 뜻깊은 7월 1일 오후, 정확히 17시 39분에 연변시인협회 위챗그룹에는 <빠알간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서정서사시가 올랐다. 김영능시인의 당의 백세 생일에 드리는 노래이자 자기의 전반생을 돌아보는 자서전이라 평가받은 이 시속에는 55년 세월을 당의 품속에서 살아온 김영능시인의 빨간 격동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1. 가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중국공산당원으로

1946년 3월 24일, 훈춘시 영안촌의 한 농민의 가정에서 9남매중 맏이로 태여난 김영능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부모님의 슬하에서 례의범절을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여 소학교와 초중에서 학습위원, 수학과 대표, 공청단지부 서기로 활약하면서 전교에서 유일하게 최우등으로 졸업하였으나 가정난으로 고중진학을 포기하고 부모를 도와 농촌에 내려와 농사일을 해야 했다.

김영능 시인.

그시절 가난에 대해 김영능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헐벗음은 참을 수 있었는데 배고픔은 견디기가 어려웠다. 보자기에 책을 꿍겨안고 학교를 오갔고 생활은 괜찮지만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들의 숙제를 해주고 공책과 연필을 얻어썼다. 소학교를 졸업할 때 입을 옷이 없어 옆집 동생벌되는 애의 옷을 입었는데 옷이 작아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팔소매도 반팔처럼 짧았다……”

영안촌에서 생산소대 정치대장, 촌대대위원, 민병련장 등을 력임하면서 청년간부로 열심히 일하였다. 1966년 11월 20일, 영안공사추천으로 연변주당학교 청년간부강습반에 참가한 김영능은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이였던 전인영을 단장으로 하는 사회주의공작대 일원으로 왕청현 신화대대에 내려가 농민들과 함께 일하였는데 그때 그는 화선에서 붉은 주먹을 머리우에 불끈 추켜들고 “공산주의 실현을 위하여 일생을 분투하겠다” 맹세하고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의 일원이 되였다. 입당한 후 공사와 대대의 추천으로 길림사범대학에 입학하게 되였는데 외국에 친척이 있다는 리유로 대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여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요만한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면 공산당원이 아니지, 사원들과 대대지도부, 공사령도들의 배려에 사업을 더 잘하는 것으로 보답하자!” 당시를 돌아보면 아직도 유감이 남아있다는 김영능은 이렇게 그때의 심정을 토로했다.

 

1972년 약혼사진.

그후 1971년 김영능은 훈춘금광로동자모집에 응하여 공광기업에 출근하게 되였고 선후로 훈춘금광, 조양천야금지질탐사대, 조양천중학교, 조양천농기수리공장, 훈춘종이공장, 훈춘시민족복장공장, 훈춘시전자계기공장 등 단위들에서 일반로동자, 대원, 교원, 주임, 과장, 공장장, 당지부서기 등 직을 맡고 사회주의 경제건설과 문화건설에 청춘의 정열을 뿜었다.

“초중학력이라 항상 머리가 빈 것이 가장 큰 근심거리였다. 그래서 꾸준히 자습하여 40세에 성인대학시험에 합격되여 전과대학 졸업증을 따냈다. 그때 훈춘종이공장에서 생산과장으로 일하였는데 화재로 공장재건축을 하게 되였다. 공장장이 조사받는 기간 내가 총지휘를 맡고 앞뒤를 뛰여다녔는데 시공업국 령도들의 인정을 받아 1989년에 훈춘시민족복장공장 공장장 겸 당위서기로 그후에는 훈춘시전자계기공장 공장장 겸 당위서기로 사업하게 되였다.”

2. 정리실업 그리고 국제무역에 도전하다

1993년 훈춘시 기업사업단위 개혁방안에 따라 공장이 파산을 선고하게 되자 47세의 젊은 나이로 령도강위를 떠나 정리실업 수속을 한 김영능은 동시대의 정리실업자들과 마찬가지로 앞으로의 인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은 도전이라고 생각하였다. 메마른 강바닥을 인생이라 하면 분투가 없는 삶은 고인 물이나 다름없다. 어려운 가정에서 태여나 이런 저런 역경도 이겨내고 자랑스런 중국공산당원이 되지 않았던가, 모든 일은 사람 하기 나름이다고 생각을 다잡게 되였다.”

천안문광장에서 기념사진을.

개혁개방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동북아금삼각이라 불리는 훈춘의 지리적위치를 리용하여 국제무역에 뛰여들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자금이 없었다. 크고 작은 단위들에서 공장장, 당위서기와 같은 직위에 있었지만 항상 공과 사가 분명했던 그는 정리실업후 빈털털이나 다름없었다. 안해가 목걸이와 반지들을 저당잡힌 1만9천원을 내놓았다. 그것으로 시작한 무역은 조선과 로씨야의 특산물을 중국의 시장으로 다시 중국의 특산물을 조선, 로씨야의 시장으로 이어주는 삼자무역이였는데 국제무역 초창기의 렬악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무지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아침전 도매시장에서 아줌마들과 좋은 상품을 쟁탈하여야 했고 국제시장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물건을 메고 달리기를 해야 했다. 겨우 5만원을 벌었는데 절반을 잃어버리고 또 40만원을 벌었는데 30만원을 도적맞히고 100만원을 벌었을 때에는 50만원을 강도당히고 그러면서도 돈은 불러갔고 무역규모도 점차 커갔다.”

75세의 나이에 인젠 앞이마가 훤히 벗어졌지만 아직도 청춘의 정열을 안고 사는 김영능시인은 자기의 전반생을 돌아보면서 이런 시구를 남겼다. “공부에도 미치고 /사업에도 미치고 /장사에도 미치고 /련애에도 미쳐라…/사업에 미치니 /스무살에 입당하고 /공부에 미치니 /마흔살에 대학생 되고 /련애에 미치니 셋째딸에 장가들고 /글쓰기에 미치니 /시인도 되더라…”

3. 대가정의 중임을 선뜻 떠멘 안해

16명 식구를 가진 대가정의 맏아들 김영능이 6살 년하인 앞집 처녀 김인숙(69세)을 안해로 맞아들인 건 그가 27살 나던 1973년도, 가난한 집 맏아들이라 늦장가를 들었다. 둘이서 남몰래 자유련애를 한 것은 몇년이 되였지만 정작 처가부모의 허락을 받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사실 식솔이 단촐한 가정에서 애지중지 키운 셋째 딸을 식솔이 구들에 넘치는 가난뱅이네 맏아들에게 시집 보낼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어려서부터 대바르고 역빠른데다 하늘에 별따기나 다름없는 입당까지 한 대대간부인 당사자는 그렇다쳐도 시부모에 시조부모까지 모셔야 하는데다 시삼촌까지 얹혀사는 집에 딸을 선뜻 줄 수 없다는 것이 처가부모들의 립장이였다. 그럼에도 김영능이 아니면 죽어도 시집가지 않는다는 셋째 딸앞에서는 손을 들고 말았다.

가족사진.

결혼 후 40여년간 안해는 열심히 남편의 뒤바라지를 하고 자식을 키우는 한편 시조부모와 시부모를 정성껏 모시면서 시동생, 시누이들을 시집장가 보내느라 눈코뜰사이 없이 보냈고 국제무역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든든한 뒤심과 선봉장이 되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영능은 “안해는 나의 삶의 파란 등이였고 내 생애 최상의 선물이였으며 삶의 기둥이였다. 안해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나의 어머니는 올해 94세이지만 해마다 몇번씩 노래방을 찾을 정도로 건강하다.”고 하면서 9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어머님을 잘 모시는게 자식된 도리이지만 그중에서도 맏며느리인 안해의 공로가 크다고 자랑한다.

그들부부의 영향으로 대학교 전자전업을 졸업하고 은행직원으로 근무하던 아들과 위생학교를 졸업한 며느리도 국제무역에 나섰는데 30대이지만 무역시장에서 알아주는 고참으로 활약하며 딸은 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류학을 마치고 일본회사에 취직중인데 앞으로의 타산은 역시 부모들이 개척한 국제무역이란다.

4. 문학에 미쳐 시인이 되다

김영능이 문단에 데뷔한 것은 그가 55살 나던 해인 2001년이였다. “기실 문학을 좋아한 것은 1962년 초중시절이였다. 어려서부터 일기 쓰는 습관이 있었는데 가끔 시로 일기를 대체하군 하였다.”

김영능시인의 결혼기념사진.

국제무역이 제 궤도에 오르고 안해와 아들며느리가 주력으로 앞뒤를 봐주니 시간이 생기더란다. 그래서 일기책에 적어두었던 시 몇십수를 골라 잘 정리하여 시가 될는지 하는 생각으로 《연변문학》잡지사를 찾아갔는데 당시 시편집인 김응룡선생이 반갑게 맞아주더란다. 동갑내기인 둘은 늦게 만난 것을 원망하면서 시간 가는 줄을 잊고 인생과 문학을 담론하였다. 그렇게 처녀작 <태산에 올라(외5수)>가 볕을 보게 되였다.

그후로 봇물이 터지듯 김영능의 시가 여러 문학지들에 발표되였고 미구하여 2002년에는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해 첫 시집《별에 부치는 노래》가 출간되였으며 그후에 동시집 2권과 시집 3권을 련달아 출간하고 동포문학대상을 수상하는 등 문학창작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현재 연변작가협회 회원, 연변시인협회 부회장, 훈춘시작가협회 법인대표, 고문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영능 시인은 “손가락이 움직일 때까지 필을 놓지 않을 것이다.”고 하면서 현재 시집, 수필집, 려행수기집 등 저서의 편집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김영능의 시는 진실한 생활속에서 온 것으로서 거기엔 아무런 가식도, 구김살도 없이 소박하면서도 정서가 은은하여 그속에 작자의 진정이 담긴 질 줄 몰는, 사람으로 넘치는 마음의 향기가 그윽히 흐른다.”(평론가 전국권), “김영능은 성실하고 도리와 의리가 있는 사람이다. 면목도 잘 모르는 위급한 환자에게 팔을 거두고 수혈도 해주었고 골물에 뛰여들어 생사를 다투는 사람들을 구해주었으며 불붙은 액화가스통에 목숨을 걸고 솜옷을 덮기도 하였습니다.”(시인 김동진), “협회 여러 행사에 해마다 후원금을 보내주고 생활고를 겪는 시인들을 도와 시집까지 내준 분이다.(연변시인협회 회장 전병칠)”과 같이 문학평론과 인생담에서도 김영능시인은 잘 알려지고 있다.

김영능시인이 펼쳐낸 시집들.

김영능시인의 서정서사시 <빠알간 자화상>의 한개 련으로 이 글을 마친다.

반세기를 훌쩍 뛰여 넘은

55년전 낫과 망치 붉은기 아래

인생의 행로를 다짐한 적 없었다면

세월의 소용돌이 겪어 내였을가

세상의 돌개바람 이겨 내였을가

거울속 내 삶의 모양새는

또 다른 어떤 양상이 였을가

/길림신문 김룡, 김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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