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08-09 10:09:22
] 클릭: [ ] |
박복선(74세)녀사
“여름철 피서는 연변이 최고지요. 여름이면 꼭 연변을 찾아 오는데 저는 연변생활이 참 행복합니다.”
8월 8일 오전, 북경에서 피서차 연길에 와서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는 박복선(74세)녀사를 만났다.
길림성 서란에서 태여난 박복선녀사는 고향은 비록 연변이 아니지만 다섯살 나던 해인 1954년도부터 연길에 이사와서 살다보니 동년시절은 물론 소녀시절과 청춘시절을 모두 연변에서 보냈다.
박복선녀사는 1975년도에 중앙민족대학 어문학부를 졸업한 후 연변사회과학원 언어연구소에서 사전편찬과 번역연구에 종사했으며 1987년도에 북경에 전근되여 《민족단결》잡지사에서 17년간 기자,편집사업에 종사, 《민족단결》잡지사 조선문편집부 주임,《중국민족》조선문판 주필을 력임하다가 2004년도에 정년퇴직했다.
북경에 전근되여 가기전까지 30년 넘게 연변에서 생활하고 사업했던 까닭에 비록 지금은 연변을 떠난지 오래 됐지만 아직도 어제일처럼 선히 떠오르는 연변의 옛 모습들과 아름다운 추억들이 가득하다.
“연길에 이사와서 공원다리 동쪽, 신흥가 31조에 살고 있었지요. 길만 건느면 바로 지척에 연길하가 있었는데 맑은 물이 흐르는 강가에 나가서 빨래도 했고 많은 사람들이 여름이면 그곳에서 물놀이도 하면서 즐겼던 기억이 납니다.” 박복선녀사가 떠올리는 50년대 연길의 청정자연을 담은 추억이다.
“원 연길복무청사자리에 있던 광장에서 청년들이 축제때면 즐겁게 원무곡을 추군 했지요. 그곳에 영사막을 치고 로천영화구경도 재미있게 했던 기억도 납니다” 박복선녀사가 추억하는 광장이 바로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대회가 열렸던 연길인민광장(일명 서광장)이였다.
“1976년도에 연길시 의란공사에 있는 구룡에 공작대로 하향했는데 농민들과 함께 흙을 지여 나르면서 일했고 인분수레를 타고 가면서도 새콤달콤한 산딸기를 맛있게 뜯어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며칠전 연길에 살고 있는 조카들과 함께 의란에 가보았는데 그토록 락후했던 구룡마을이 지금은 레저휴가촌까지 들어 앉은걸 보고 엄창난 변화와 발전을 실감했다고 터놓았다.
80년대 연변사회과학원 언어연구소에서 사업하던 시절 (웃사진 오른쪽 두번째, 아래사진 왼쪽 첫번째가 박복선)
“언어연구소가 있던 연길백화상점 남쪽 모퉁이 건물에 길림성조선어문사업판공실이며 검찰원 등 많은 사업단위들이 함께 들어 있었구요, 《조선어소사전》이며 《반의어사전》, 《의성의태어사전》 등 많은 공구서적들을 편찬하면서 함께 일하던 다정한 동료들도 잊을 수 없지요.”북경으로 떠나기전 몸 담그었던 80년대의 연변사회과학원 언어연구소에 대한 추억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였다.
연변을 떠난지 30여년 되지만 일가친척들이 모두 여기에 있어 자주 찾는데 매번 올 때마다 연변이 몰라보게 발전하고 있으며 연변은 참으로 살기 좋은 고장임을 심심히 느끼게 된다고 박복선녀사는 말했다.
“북경에서 오후 1시 반에 고속철에 앉으면 저녁 9시가 되여 연길에 도착하지요.” 과거 북경과 연길사이를 오가자면 적어도 이틀간의 품을 들여야 했고 더우기는 차를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새’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교통의 편리로 한결 세상과 가까워진 연변의 모습이 박복선녀사의 체험에서 생생한 현실로 묻어난다.
지난 7월 24일,연길에 온지 일주일 후 남긴 박복선녀사의 일기에는 연길생활의 간단하지만 만족스런 일상들이 글줄마다 묻어나고 있었다.
…불볕더위를 피해 비좁고 물건 많은 북경집을 탈출해 이곳 피서지 연길에 온지 일주일이란 시간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갔다. 이곳에 와서 집에 물건이 별로 없지만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다. 침실에 옷장과 침대밖에 없는 호텔방같은 느낌, 서재에도 책장 하나, 책상 하나이니 공부를 해도 집중이 잘 된다. 물건이 적고 공간이 넓으니 가슴이 트이고 마음이 편하다. 북경에 가면 결심코 버리기를 강행해 집환경을 바꿔야겠다는 마음을 다시 한번 다지게 된다. 게다가 아빠트단지내 잔디며, 측백나무며, 꽃이 만발한 화단이 있기에 공기가 좋아서 무엇보다 좋다. 아침시장에 나가면 우리 입에 맞는 먹거리가 즐비하고 한국마트도 있어 한국식품과 용품도 살 수 있고 뜰안에는 밤 늦게까지 문을 여는 소매점이 있어 필요한 물건을 언제든지 금방 사올 수 있다. 저녁식사후 강변에 산책 나가면 광장무 추는 사람, 태극권을 하는 사람, 정자에 앉아 휴식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채색등이 무시로 변화하는 천지대교의 야경 또한 아름답다. 이곳은 날씨 또한 춥지도, 덥지도 않아 너무 좋다. 물도 좋아 북경처럼 려과하지 않고도 시름놓고 마실 수 있다. 우리가 온 뒤 시동생, 시누이가 번갈아 가며 터밭의 오이며, 감자, 가지, 오얏들을 가져다주어 너무 고맙다. 오늘은 시동생네 집에 모여 시누이랑 불고기를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나는 이 며칠간의 이곳 생활이 참 행복하다. 사실 물건보다 쾌적한 공간이 행복지수를 많이 높여주는것 같다…
남편과 함께 연길모드모아관광휴가 리조트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는 박복선녀사
박복선녀사는 특히 연변은 여름 삼복철 가장 좋은 피서지이며 퇴직후의 권장할만한 훌륭한 양로장소와 양생지라고 생각되며 큰 도시에 비해 오붓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북경의 찌는 듯한 찜통 무더위를 피해 연변의 시원한 여름을 나보지 못한 사람은 이를 잘 알지 못할 것이다. 3년전에는 아예 여름철이면 시름놓고 피서휴가를 즐길 수 있도록 집까지 한채 장만했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박복선녀사는 가족과 함께 연길에 와서 시원한 여름을 만긱하고 있었다.
주변환경을 둘러 보아도 공기가 맑고 물이 좋으며 서시장과 수상시장과 같은 시장들에 나가보면 입맛을 사로잡는 먹거리들이 널려 있다고 했다. 강변유보도와 공원 같은 곳들마다 편히 즐길 수 있는 레저오락 휴식터가 마련되어 있어 좋다고도 했다. 연길시내는 물론 연변의 기타 현시들에도 곳곳에 레저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장소와 시설들이 많아서 좋다고 한다.
박복선녀사는 평범한 보통 백성들은 살아감에 편리하고 사소한 것들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살아감에 필요한 사소한 세절들을 연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으며 그래서 행복지수가 높다고 말한다. 연변에서 시원한 피서를 즐기면서 북경의 친구들에게 자랑했더니 모두들 연변에 와 보고싶어 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박복선녀사는 락후하던 연변을 지금처럼 살기 좋은 고장으로 건설하기까지는 로심초사해오신 허다한 공로자들의 숨은 노력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변의 하늘길과 철도개통 등 교통발전에 큰 기여를 하신 오빠 박유생을 떠올렸다.
1984년도에 오빠 박유생은 도문-심양행 렬차를 도문-천진행 렬차로 연장시킬 데 대한 사업을 맡아 치밀하게 밀고 나갔으며 1985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차출되여 연길민항건설주비위원회 부주임으로 사업했으며 중국민항 연길역이 건립된 후 제1임 당지부서기 직무를 맡아보게 되였다. 오빠 박유생은 밤낮이 따로없이 동분서주하면서 몸을 내번지고 사업에 몰두했다. 연변천지개벽의 대사변으로 일컫는 항공로가 개통된 바로 이듬해 박유생은 안타깝게도 지나친 과로로 젊은 나이에 애석하게 돌아가셨다고 한다.
“오빠가 지금 살아계시여 이토록 륭성발전한 연변의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박복선녀사는 안타까움에 눈시울을 붉히였다. 확실히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70주년을 맞는 오늘날, 연변은 천지개벽의 큰 변화가 일어났으며 갈수록 세상이 부러워하는 살기 좋은 고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올해는 마침 자치주성립 70돐을 맞는 경사스러운 해입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9.3 축제까지 성대히 열리게 된다고 하니 꼭 축제를 보고 나서 북경에 돌아갈가 생각합니다.”
박복선녀사는 비록 자신은 연변이 고향이 아니지만 30년 넘게 살아왔고 정이 들대로 든 연변에 고향보다 더한 진한 감정과 사랑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진정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지속적인 번영과 발전을 축복한다고 말했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