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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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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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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7 09: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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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 작곡가이며 음악평론가인 김덕윤선생(1940년 화룡현 투도구 출생)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70돐을 맞으며 자신의 음악예술생애를 되돌아 감회가 깊다.
연변예술학교 제1기생
김덕윤선생은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창립되면서 민족예술인재를 육성하기 위하여 세운 연변예술학교(1957년) 제1기 음악전업생이였다. 오매에도 바라던 조선민족 예술의 전당에서 학습하게 된 그는 성악전업생이였지만 피아노연주에도, 음악창작에도 관심을 갖고 열정적이고 진취적으로 배움에 힘썼다.
1961년 7월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연변가무단에 배치를 받게 된 그는 저명한 작곡가들을 신변에 모시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꿈만 같이 느껴졌다.
김덕윤선생은 가무단에 입단 한 뒤 선배들의 영향하에〈일터에서 돌아왔네〉라는 처녀작을 발표하고 가수활동과 창작활동을 병행하면서 활약을 펼쳤다. 당시 그는 북경음악출판사에서 출판한 《처녀의 노래》(1958년 안파 한문번역) 단행본을 1960년 경 흑룡강성 치치할 도서관에서 구매하여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음악인재 발굴과 양성
김덕윤선생은 1966년 4월 길림성가무단으로 전근하게 되지만 인차 문화혁명이 일면서 가수활동도 창작활동도 할 수 없게 된다. 1971년 초 다시 연변으로 돌아와 연변총공회 선전부 민예과 과장으로 사업하게 된 그는 해마다 가사창작학습반과 가요창작학습반을 조직하면서 작사자들과 작곡자들의 창작열성을 불러일으켰다.
70년대 말 전 주 종업원문예콩클을 맞이하여 주내 각 공장, 광산, 기업을 순회하면서 준비종목을 검사하는데 화룡 복동탄광에 갔을 때, 탄광로동자인 박학림이라는 나젊은 청년을 만난다.
“꼭 음악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십시오.” 박학림은 김덕윤선생의 옆자리에 붙어앉으며 솔직히 고백하였다.
그 열정과 진정에 감동된 김덕윤선생은 해마다 열리는 가요창작학습반 통지를 내려 보낼 때면 복동탄광지도부에 ‘박학림’이라는 이름을 박아 통지를 보내주었다. 이리하여 해마다 가요창작학습반에 참가하게 된 박학림은 누구보다 열성이 높았고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1981년 경, 전 주 문예콩클이 있게 되자 연변신화인쇄공장에서 김덕윤선생한테 예술지도를 물색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찰나 떠오르는 사람이 박학림이였다. 그렇게 신화인쇄공장 예술지도로 나선 박학림은 인쇄공장선전대 대원들을 지휘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김덕윤선생은 이 기회를 틀어쥐고 연변인쇄공장에서 문예사업을 발전시키자면 박학림 같은 인재가 있어야 한다며 박학림을 적극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박학림은 복동탄광에서 연길 인쇄공장으로 전근하게 되였고 음악사업을 치중하여 할 수 있는 환경을 바꾸게 된다.
그후 박학림은 끈질긴 노력으로 선후로 신흥가두 문화소 소장으로, 상해음악학원 작곡, 지휘 연수생으로, 연변가무단 작곡, 지휘로, 조선평양음악무용대학의 연구생, 박사로 정진하였고 현재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작곡가, 지휘가로 활약하고 있다.
2017년 11월, 김덕윤선생은 연변인민방송국 제32회 ‘음악인 초대석’에 초청되였다. 그 자리에 참석한 박학림작곡가는 “김덕윤선생은 저의 음악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분”이라고 존경과 고마움을 표현하였다.
김덕윤선생은 당시 로동자 가요창작학습반을 조직하면서 연변의 로동자들이 음악예술의 길에 들어서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때를 돌이키며 김덕윤선생은 인재양성은 음악예술사업의 중요한 과제임을 재삼 언급한다.
멀리 울려퍼지는 〈살구나무〉 선률
김덕윤선생은 1981년 4월부터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문학과 예술》잡지의 음악론문, 음악평론, 가요편집을 하면서 음악창작에도 살손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1985년 초 정문준 작사자가 〈살구나무〉라는 가사를 써 갖고 작곡을 부탁하였다. 개혁개방 초기였지만 청춘남녀의 사랑을 감히 노래부른다는 것은 일종의 용기와 도전이 필요했고 또 새로운 풍격이 안받침되여야 했다.
살구꽃이 망울을 터치는 과수원을 거닐며 악상을 무르익힌 김덕윤선생은 창작을 완성하여 연변인민방송국에 투고를 했다. 온갖 꽃들이 화사하게 만발하는 5월 〈살구나무〉는 매주일가로 첫 방송을 탔다. 김경자 가수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속삭이는듯한 노래소리는 〈살구나무〉의 선률에 나래를 돋혀주었고 청중들을 완전 매료시켰다. 잇달아 ‘요청무대’는 〈살구나무〉요청편지들로 쇄도했다. 김덕윤 선생은 〈살구나무〉로 ‘연변청년들이 즐기는 노래’(1986년) 창작우수상, 연변제2차진달래문예상(1988년)을 수상하였다.
가요〈살구나무〉는 또 조선평양만수대예술단의 녀성독창으로 록음, 전파되였고 한국KBS방송 ‘보고싶은 목소리 그리운 얼굴’프로에서도 록음, 방송되였다. 일본 동방언어대학 학자 시라다사게쯔는 “가요〈살구나무〉는 한국풍격도 아니고 조선풍격도 아닌 아주 생신한 미적감각으로 사람들의 귀맛을 돋군다. 일본사람들의 심미요구에도 잘 맞는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과연 음악에는 국계가 없었던 것이다.
김덕윤선생은 300여수의 가요를 창작하고 또 음악론문들을 집필하면서 “음악창작에서 가장 관건은 시대적 심미수요를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 길림신문 김청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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