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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연변] 고향은 언제나 가고 싶은 친정같은 곳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09-25 16:15:03 ] 클릭: [ ]
 
재미조선족 리화옥

지난 7월에 뉴욕 서북부와 카나다 온타리오주 국경에 걸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러 갔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듯한 폭포의 웅장함과 뽀얗게 물보라를 일구며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은 유람객들의 환성과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경이로운 대자연의 장관에 흠뻑 취해 있으면서도 나의 마음을 사로 잡는 것이 분명 따로 있었다. 바로 유람선을 타러 내려오는 입구에서 멀리 바라보였던 미국과 카나다를 잇는 나이아가라강 레인보우 브리지(무지개 다리)였다. 두 나라 국기가 나란히 나붓기는 국경다리를 보는 순간 나의 머리속에는 내 고향 연변에 있는 중국-조선 국경다리가 불현듯 떠올랐고 그 다리밑을 유유히 흐르는 고향의 강 두만강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미국과 카나다를 잇는 나이아가라강 무지개 다리

몸은 비록 이국타향에 있지만 고향이라면 눈이 번쩍 뜨이고 귀가 솔깃해지고 마음이 쏠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류학길에 오른 남편을 따라 한국에서 4년, 미국에서 23년, 해외에서 살아 온지도 어느덧 고향떠날때의 내 나이와 비슷해 가지만 고향은 여전히 친정처럼 언제나 가고 싶은 그리운 곳이다.

3년전에 고향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 나는 한동안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아 후유증을 겪었다.

오매불망 그리던 12년만에 찾아간 고향의 변화는 나의 상상을 초월했고 연길국제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떠나기까지 나날들은 실로 감동의 련속이였다.

세명의 언니들과 조카들과의 행복한 만남, 고향친구들의 변함없는 우정, 30여년만에 만난 동창들, 동료들, 지인들 그들이 있었기에 고향은 더없이 포근하고 따뜻했다.

3년전 친구들이 나를 맞이해 공항에 들고 나왔던 프랑카드와 꽃다발

그들중에는 정해진 려행일정을 바꿔가면서 북경에서 날아온 친구도 있고 비지니스를 하면서 눈코뜰새 없이 바쁜 중에도 항주에서, 중경에서 날아온 중고등학교 동창들도 있으며 교학때문에 저녁 늦게 모임에 참석했다가 이튿날 아침 일찍 학교에 돌아간 할빈에서 온 대학동창도 있다.

또 짧은 나의 려행일정에 맞추다보니 5.1국제로동절에 가족들과 함께 명절도 쇠지 못하고 아침 일찍부터 관광에 동행해준 친구들도 있다.

이 기회를 빌어 민페를 끼친 친구 가족들에게 늦게나마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연변 곳곳에 개통된 고속철도와 고속도로 그리고 친척,친구들의 자가용을 직접 리용해보면서 나는 그동안 천지개벽의 변화를 일으킨 고향의 교통수단과 놀랍게 급성장한 고향의 생활수준을 페부로 느끼고 온 몸으로 체험하였다.

 
3년전 고향방문시 고향친구들과 함께
 
 
고향방문시 도문에서 대학교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적극 받아들이고 스마트폰을 리용하여 위챗페이, 알리페이로 눈깜짝할사이에 결제를 끝내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에서 애플페이가 이 정도로 보급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는 하는 의문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연길대교와 연서교의 아름답고 멋진 변신, 오토바이를 타고 씽씽 거리를 누비며 달리는 택배기사들 ,스케이트보드며 서빙로보트까지 리용하는 레스토랑들, 농촌마을에 가쯘하게 늘어선 현대식 건축재료로 세워진 전통가옥들…고향의 발전은 정말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웠고 새로운 느낌들만이 가득했다.

연변의 명소인 룡정 윤동주시인의 유적지 답사와 비암산 일송정 둘러보기, 화룡 장백산진달래 국제문화관광축제 참여, 도문 두만강지역중조변경지대와 석현구경, “동방의 제일촌” 훈춘금삼각주 관광… 등 발길이 닿는 곳마다에서 나는 깊은 감명을 받으며 잊을수 없는 소중한 고향추억들을 하나 둘 차곡차곡 쌓아갔다.

94년 전국 조선족학생 글짓기콩클 고중조에서 일등상을 받은 학생과 함께

 
30년전 연길시2중 교사시절 조선어문교연조 선생님들과 함께(앞줄 오른쪽 첫번째가 필자)

사랑하는 내 부모님의 넋이 고스란히 묻혀 있고 내가 태여나고 자라나고 꿈을 키우던 곳이라서 고향의 상징인 연분홍진달래는 물론 평범한 산천초목도 한줌의 흙도 그렇듯 정답고 귀중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즐비하게 늘어선 높고 낮은 건물들에 조선어와 한자로 씌여져 나란히 걸려져있는 간판들도 각별히 나의 주목을 끌었다. 오직 내 고향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만 볼 수 있는 자랑스럽고 특색있는 풍경들이였다.

미국에서 단일한 영문간판만 보아오던 나는 자신이 그처럼 애착하는 우리글로 씌여진 간판들을 바라보면서 어릴 때부터 몸 속 깊이에 뿌린 내린 문화가 주는 친근감과 편안함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고향에 있을때에는 모르고 지났지만 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사계절이 분명한 내 고향이 참 살기 좋은 곳이라고 느껴진다.

내가 20년 넘게 살고 있는 바다를 끼고 있는 미국의 플로리다(에스빠냐 언어로 ‘꽃이 피는 나라’라는 뜻)주는 온화한 아열대기후에 속하므로 겨울에 눈을 볼수 없다.

미국에서 태여난 5살 되는 딸애를 데리고 2005년도에 고향에 갔을 때였다. 외할머니 무릎에 앉아 내가 고향에 두고 간 여러권의 사진첩들을 한장한장 펼쳐가며 젊은 시절의 엄마를 잘도 찾아내던 딸애가 갑자기 “이츠노트패얼!” (“불공평해요”-주로 어린애들이 많이 사용하는 용어) 하며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영문을 모르는 엄마는 갑자기 왜 그러냐고 당황해하셨고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딸애는 내가 연변대학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함께 커다란 눈덩어리를 안고 찍은 사진을 보았던 것이다.

“나도 눈이 많이 보고 싶은데 엄마는 왜 혼자서만 눈을 봤어요? 저렇게 큰 눈을 엄마만 가지고 놀고…”

공연히 사진때문에 이쁜 손녀를 울린다며 엄마는 “이 여름에 어데가서 돈을 주고라도 눈을 사올 수만 있다면”하며 딱해 하셨고 딸애는 막무가내로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애타게 손녀를 달래는 엄마가 안스러워서 나는 딸애한테 오는 겨울에 꼭 북쪽 동네에 놀러 가서 눈 구경시켜주마고 약속할수 밖에 없었다.사실 겨울이면 거위털 같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모습을 보고 싶고 그 감촉을 온 몸으로 만긱해 보고 싶기는 나도 마찬가지이다.

해마다 첫 눈이 내렸다고 고향친구들이 위챗이나 모멘트에 사진이며 동영상을 올릴때면 내 마음은 괜스레 설레인다. 어느해인가 그 느낌을 주체할수 없어 단숨에 적어 놓았던 글을 다듬어서 옮겨 본다.

고향의 첫 눈

송이송이 배꽃 같은 첫 눈이

하늘 향한 두 뺨에 살포시 내려앉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고향눈

사르르 혀끝에 녹여도 보고

한웅큼 꿀꺽 목구멍 적시며

고향에 고픈 갈증 풀어나 보자

두손 시리도록 움켜잡고

다져가며 눈사람 만들자

동년시절의 추억과 함께

두발 시리도록 걸어보자

뽀드득 뽀드득

두줄기 신발자국 또렷이 남기며

두팔 벌려 벌렁 드러눕고

엎드리며 뒹굴어 보기도 하자

고향친구들과 눈싸움도 하면서

대지를 은빛 단장시킨

고향의 첫눈아

올해도 만풍년 약속해 주렴

귓가에 맴도는 정다운 노래

<흰 눈이 내리네>

향수에 젖어서 조용히 불러본다…

 
연길시제2고급중학교 교사시절 동료선생님과 함께
 
미국에서 살면서 아들딸에게 자기의 뿌리를 알게 하고 자기 민족언어를 배우게 하는 것은 엄연한 부모의 몫이다.

5살된 딸애와 함께 고향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동료이자 은사님이신 선생님들은 오랜만의 만남의 자리에 처음으로 중국에 온 딸도 보고 싶으니 데리고 나오라고 부탁하는 것이였다.

“안녕! 미국애가 왔구나!” 하며 반겨주는 무심코 한 인사말에 딸애는 “나 미국애 아니예요. ”라며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럼 너 누구니?”하고 다시 묻자 “미국에서 태여난 조선족 애 예요” 라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선생님들은“ 오~ 그렇지!” 하고 머리를 끄덕이며 “ 네 말이 맞어! 맞구 말구!” 하고 연신 칭찬해 주면서 조선어문선생님의 딸이 아니랄까바 하며 즐겁게 한바탕 웃었다. 그러던 딸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친구 몇 명과 함께 한국으로 졸업려행을 떠나게 되였다. 나는 경복궁을 돌아보며 한복체험도 해보고 그동안 배운 우리말 실력을 잘 발휘해 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며칠 뒤 딸애한테서 기쁨에 들뜬 전화가 왔다.

“엄마 나 해냈어요! 친구들이랑 한강다리에 놀러 갔다가 전화로 치킨을 주문했는데 제때에 배달 받았어요.”

한국말로 전화주문은 난생 처음인지라 의사전달이 잘 안 될까봐 무척 신경이 쓰였나 보다.

마침 그때 언니들 두명이 한국에 와 있었는데 언니들 걱정과는 달리 딸애는 의사소통에 문제없이 이모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중국에서 태여나 8살때에 미국에 온 아들도 대학입시때 제2외국어 시험을 한국어로 볼만큼 우리 말을 듣고 쓰고 말하고 리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지금은 아들딸이 성장하여 모두 집을 떠났지만 부모들하고 통화할때에는 꼭 우리 말을 사용한다.

 
 해외에서 성장했지만 자기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잘 자라준 아들과 딸

아들은 제2외국어를 장악하고 있음으로 하여 직업상 보너스혜택을 받고 있고 올해 대학을 졸업한 딸애는 자기가 좋아 하는 한국드라마와 팝송을 즐길수 있다.무엇보다도 애들이 자기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자랐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이민 1세대가 자녀들에게 어릴때부터 가정에서 자기 민족 언어를 배울수 있는 언어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의 중요성을 깊이 느끼면서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천직에 충실했음에 뿌듯함을 느낀다.

해외에서 나는 고향 연변을 늘 마음에 품고 살고 있다.언젠가 때가 되면 우리말을 할줄 아는 아들딸을 앞세우고 며느리와 사위도 함께 남편과 손잡고 친정 같은 그리운 고향에 행차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재미 조선족 리화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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