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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 40년] 네번 찍은 손도장과 소강촌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신화넷 ] 발표시간: [ 2018-04-28 15:58:10 ] 클릭: [ ]

붉은 손도장, 이 중국농민의 소박하면서도 견결한 표현은 중국농촌개혁의 서막을 열었다.

40년전, 안휘봉양소강촌 촌민들은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음으로 “호도거리”라는 생사적 계약에 손도장을 찍었다. 그 후로는 개혁의 앞장에 선 선줄군을 신변에 남기기 위해  붉은 손도장을 세번 찍고 이 중후한 토지 우에 시대적 전기를 써내였다.

처음 찍은 손도장

1978년의 한 겨울 안휘 봉양현 소강촌의 낮고 허름한 초가집에서 18명의 람루한 옷가지를 걸친 촌민들이 가물거리는 기름등잔불을 마주하고 “감옥살이도 할 수 있는” 큰일을 둘러싸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때 생산대에는 굶어죽은 사람이 60여명에 달했고 온가족이 굶어죽은 집이 6세대나 되였습니다.” 칠순이 넘은 소강촌 촌민 엄립화가 당시를 회억하며 말하였다. 그는 이 소강촌의 ‘호도거리’ 인솔자의 한사람이였다.

40년전, 소강촌은 ‘반소량을 먹고 구제돈을 쓰고 대부금으로 생산’하던 소문난 빈곤촌이였다. 늘 기근이 들어 농민들은 외지로 나가 구걸을 하였다.

“처자가 있고 늙은 부모들이 있는 세대들에서도 며칠이고 밥가마에 불을 때지 못하였습니다. 저의 부친은 너무 굶어 침대에서 내려서지도 못하였고 말린 토란이라도 한입 맛있게 잡숫고 싶어했지만 어디서 구할 데가 없었습니다..” 다른 한 도거리호 엄홍창이 눈물이 글썽해서 말하였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18명의 촌민들은 붉은 인주를 묻혀 손도장을 꾹- 꾹 눌러 찍고 그 손을 움켜쥐고 맹세를 다졌다. 집집마다 밭을 나눠가지고 호도거리를 잘 해 보자고.

“감옥살이를 하는 한이 있라도 촌민들이 한끼 배불리 먹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라고 생각했지요.” 역시 호도거리에 앞장 섰던 엄준창의 말이였다.

붉은 손도장을 찍는 순간부터 촌민들은 땅에 대한 무한한 기대로 가슴 부풀었고 농민들의 생산적극성은 드높기만 하였다. 한뙈기 땅이나마 “나누면서” 농민들은 황량한 대지우에 풍작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것을 보는 것만 같았다.

바람 새지 않는 벽이 없다고 했다. 1979년 4월의 하루, 당시 봉양현위 서기였던 진정원이 소강촌 소속인 리원공사로 검사를 내려 왔다가 이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였다.

“진정원은 한 젊은 부부가 밭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두부부만 같이 일하는 걸 보니 당신들도 밭을 나눠가진 거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부부는 아무 말도 없이 수걱수걱 일만 했지요. 진정원도 그때 모든걸 번연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봉양현 인대상무위원회 원 부주임 진회인이 그때를 돌이키며 말하였다.

즉시 압제를 해버려야 하는 건가 아니면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인가? 성 시 현 각급 정부에서는 후자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1980년 음력설이 갓 지난 때, 중공안휘성위 제1서기로 사업하던 만리동지가 소강촌을 찾아왔다. 엄홍창의 집에서 만리동지는 그와 근 네시간동안 담화를 나누었다.

“그이는 우리 집에 들어서면서 ‘마음대로 봐도 괜찮을가요?’라고 묻는 것이였습니다. 그러자 저는 ‘괜찮다’고 했지요. 그이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내 쪽에서는 속이 한죽은 했지요. 그이가 아니라고 한마디만 하면 나는 당장에서 감옥에 가야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간 뜸을 들이던 그이는 ‘나는 언녕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감히 하려는 사람이 없었지요. 당신은 참 잘한 겁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엄홍창은 열띤 어조로 말하였다.

붉은 손도장 18매는 호도거리책임제를 속출시켰다. 1980년 5월 등소평은 한차례 연설에서 공개적으로 “가정단위생산”를 긍정하였다. 1982년, 중앙에서는 처음으로 되는 농촌사업 “1호문건”을 출범하여 “가정단위 도급생산”과 “가구단위 생산도급제”를 사회주의 집체경제의 생산책임제라고 명확히 규명하였다.

“호도거리”를 실시한 첫해, 소강촌의 량곡생산량은 13.3만근에 달하였다. 이는 1955년부터 1970년사이의 량곡생산의 총량과 맞먹는다. 인구당 평균수입은 400원이 되였는데 이것은 그 전해의 인구당수입 22원의 18배에 달한다. 이것은 20여년간 구제량을 타먹던 이 촌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이 없다 싶이 공산당이 없으면 오늘의 ‘호도거리’도 없습니다.” 년로한 엄준창은 격동되여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시 찍은 손도장: 개혁 치부의 선줄군을 위하여

20여년이 지난 후 소강촌 촌민들은 다시 한번 붉은 손도장을 찍었다. 이것은 개혁의 길에서 촌민들을 이끌어 치부의 길로 나아가는 선줄군을 위한 선택이였다.

심호(沈浩), 그는 2004년 안휘성 제2기 파견간부로서 안휘성재정청으로부터 봉양현 소강촌에 와 당지부 제1서기로 된 사람이였다. 후날 소강촌 촌민들은 그를 촌에 남기기 위해 세차례나 손도장을 찍으면서 그를 만류하였지만 처음부터 반겨맞이한 것은 아니였다.

1978년후로 중국의 농촌들은 날따라 새로운 면모로 일신하였다. 소강촌은 “하루 밤 새에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는 선을” 넘어섰지만 “20년간 부유의 대문에 들어서지는 못하였다.”

“당시 심서기는 ‘3개 발전단계’라는 발전사상을 제기하였습니다. 현대화농업을 발전시키고 공업을 꾸리고 관광업을 벌릴 것을 제의하자 어떤 군중들은 심서기가 허튼소리를 친다고 꾸짖었습니다. ” 당시 소강촌의 당지부 부서기를 담당했던 장후화가 터놓았다.

 

“그때 농민들은 자기 밭을 잘 다루어 배를 곯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였지 잘 먹고 잘살자는 생각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역시 호도거리에 앞장에 섰던 관우강이 말하였다.

소강촌은 지리적으로 회하남안에 위치하고 있고 현성과 28키로메터 떨어진 마을이다. 당시 108세대에 경작지면적이 1800무, 인구당 3무 푼한 땅을 다루었는데 이것은 중국전통농촌의 축도로 된다. 먹고 입는 문제가 해결되였으나 촌조직이 장시기 흩어져있고 관리모식이 뒤떨어졌으며 기초시설이 박약하였다.

심호가 소강촌에 발을 들여놓을 때는 촌민들의 인구당수입이 200원을 웃돌고 집체 빚이 3만원이나 되였다. 그는 두달동안 전 촌 108세대를 집집이 방문하면서 마을이 발전해야만 촌민들이 부유하게 살 수 있다는 도리를 설명하였다.

“그는 당원가부들과 군중대표들을 조직하여 화서, 대채 등 이름난 촌들을 참관하면서 비교속에서 차이를 느끼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개혁에서 앞장선 사람들이라 하지만 시대와 함께 발전하지 않으면 결국 개혁의 장애물이 되고마는 것입니다.”관우강의 소감이였다.

오랜 세월동안 소강촌은 단 한갈래 흙길로 외계와 통하고 있었다. 이 페쇄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심호는 50만원이라는 자금을 쟁취하여 포장도로를 수건하였다. 그는 촌민들을 이끌고 물자를 아끼고 로력을 아끼면서 돈을 절약하였을뿐만 아니라 촌민들의 참여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매일 공사장에서 올리 뛰고 내리 뛰면서 닥치는대로 일을 해재꼈다. 팔을 걷어부치고 두손으로 세멘트를 이겨내면서 시공을 질적으로 보장하고 절반자금을 남기기도 하였다.

'우의대로'라고 이름한 이 도로는 소강촌의 첫 홰불로 타올라 그후로 호도거리기념관을 짓고 홍색관광을 이끌어냈으며 자금을 인입하여 공장을 경영하고 촌민들은 집중계획으로 새 아빠트에 입주하였으며 좋은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일어났다…

2006년 소강촌의 인구당 평균수입은 5000원을 넘어섰다. 이해 가을 심호 서기의 임직기가 만기되자 촌민들은 깊은 정을 안고 심서기를 만류하는 청원서를 쓴 후 98매의 진붉은 손도장을 찍고 또 찍었다.

그 무엇인들 이 붉은 손도장보다 더 농민들의 깊은 감정을 잘 표달할 수가 있을가? 심호는 드디여 마을에 남기로 작심하였다.

소강촌: 개혁을 심화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심호가 계속 이 마을에서 사업한 3년은 고스란히 소강촌이 개혁을 실시한 3년이였다.

소강촌은 전형적인 농업형마을로서 농촌토지는 분산된 가정경영으로 다루었는데 이것은 현대농업발전을 제약하고 있었다. 심호는 한차례의 촌민대회에서 자기가 오랫동안 구상해온 발전사상을 제출하였다. 토지를 집중하고 합작사를 룡두로 자원을 종합정돈하며 촌민들은 토지를 가지고 주식에 가입하는 형식을 취하자고 하였다. 이것은 결국 소강촌의 밥가마를 깨는 형국이 되는 것이였다.

어느 때는 '목이 떨어질' 각오를 하며 나눈 토지를 어쩌면 또다시 양도를 하다니?! 대대로 이 땅을 부치며 먹고 살아온 농민들은 그 ‘리론’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속에는 당년의 호도거리능수 엄준창도 있었다.

2016년 4월 25일, 습근평 총서기 일행은 소강촌에 오시여 중국의 개혁려정을 되돌아보시였다.

“과거에 밭을 나눈 것이 개혁이라면 오늘날 토지를 합리하게 양도하는 것도 개혁입니다.” 심호는 엄씨댁으로 분주히 나들며 토지양도 우대정책과 눈앞의 리익에 대해 입이 다슬도록 해석하였다. 엄씨는 드디여 설득되여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그가 이렇게 애쓴 덕에 2년사이에 소강촌에서는 600무의 토지를 양도받아 규모화 량곡, 포도 종식업을 발전시켰으며 양송이산업과 첨국양식기지 등 일련의 현대농업을 발전시켰다. 적당한 규모생산은 파죽지세로 일떠났다.

엄준창의 아들 엄덕우는 소강촌의 현대농업생산의 선줄군이다. 심호 서기의 도움으로 그는 100여무의 밭을 양도받고 포도재배를 시작하였는데 한 무에서 식량생산의 10배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그들 부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잡고 “현대농업이야말로 소강사람들을 살려내는 구성!”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겨울이 가고 여름이 오면서 어느덧 또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소강사람들은 부유하게 잘살고 싶은 갈망과 개혁을 심화할데 대한 기대를 안고 또다시 심호 서기를 남겨두기 위해 붉은 손도장을 찍고 찍었다. “손도장이라고 쉽사리 찍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백성의 인정을 받아야만 손도장도 찍어주는 것입니다.” ‘호도거리’선줄군 엄금창도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2009년 11월 심호 서기는 끝내 이 땅 우에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소강사람들은 세번째로 심호 서기가 이 곳에서 영원히 잠들기를 바라며 손도장들을 무겁게 찍었다.

2016년 그때로부터 소강촌에서는 집체자산주식합작제개혁과 “세가지변화”개혁시점사업을 전개하였다. 2018년 2월 9일, 촌민들은 처음으로 집체경제수익주권분홍을 탔다.

“네차례에 거쳐 찍은 붉은손도장은 소강촌의 발전을 견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국공산당은 영원히 개혁의 견정한 지도자이며 추동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현재 소강촌의 당위 제1서기로 사업하고 있는 리금주는 감개무량하게 터놓았다.

편역: 길림신문 김청수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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