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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지금 31]90년 세월의 마을...지금은 조선족 두세대만 달랑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12-06 15:53:27 ] 클릭: [ ]

개혁개방 40주년 기념 특별기획―‘내 고향은 지금’[안도편―고등촌]

“올해 년말이면 고등촌은 빈곤모자를 쓴 촌민이 없게 된다”고 안도현 영경향(永庆乡) 고등촌(高登村) 의 제1서기 방명일(41세)씨는 말한다.

기자 일행이 장춘발 고속철을 타고 마을에 내려갔을 떄는 황금가을이 무르녹는 국경절 전야였다. 안도서역에 도착하니 장백산맥에 자리잡은 기차역 주변은 안개가 자욱하여 인간선경을 방불케 했다.

기자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 방명일씨는 안도서역에서 우리를 싣고 한시간 40분가량 굽이굽이 산길로 차를 달려서야 촌사무실에 도착할수 있었다. 안도서역에서 100킬로메터 떨어진 고등촌은 촌의 대부분 지역에서 핸드폰 신호가 약하고 데이터 신호가 없어 대뜸 편벽한 산골마을임을 실감할수 있었다.

고등촌의 빈곤해탈사업을 고찰온 안도현민족종교국 최송학국장과 방명일 제1서기.

한때 우리글 소리 도란도란 흥성흥성하던 마을

지금으로부터 근 90년전인 1930년대 초, 조선 이민들이 이곳에 처음 정착하면서 최초에는 영경촌 고등툰이라 부르다가 점차 고등촌으로 불려졌다. 동네의 어른들로부터 전해온데 따르면 이 마을의 첫진의 이주민들이 한국의 ‘고등리’라는 동네에서 이주하다보니 마을의 이름도 ‘고등’이라 지었다고 한다.

기자가 검색해보니 한국에는 세종특별시 소정면과 경기도 수원군 일형면,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등 세곳에 ‘고등리’라는 마을이 있지만 고등촌 태생 주계월로인(68세)은 어느 지역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있었다.

촌의 김승일로인(68세)은 어렸을 때 동네로인들로부터 “조선 이주민들이 이 마을에 정착할때에 마을에는 일본침략군이 주둔해있었는데 마을 북쪽 1킬로메터 남짓한 산꼭대기에 일본군 포대가 있은 관계로 마을은 포대촌(炮台村)이라고도 불리웠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회고한다. 김승일이 마을에 이사왔을 때도 마을에는 둘레길이가 몇킬로메터, 높이가 한메터가 넘는, 일본군이 남긴 흙담장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주계월로인의 회억에 따르면 어릴때 마을 뒤쪽의 포대산에는 산짐승이 없는게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사슴, 메돼지, 승냥이, 곰……심지어 호랑이를 보았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촌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글소리 도란도란 들리던 그제날의 교정은 오간데 없고 페교된지 30여년이 지난 지금은 학교 옛터조차도 찾아볼수가 없다고 아쉬워한다.

안도현민족종교국 최송학국장과 방명일 제1서기가 고등촌에 체육용품을 증정하고있다

1960년대 초반에 외지로부터 20여가구의 타민족 농민들이 고등촌에 이사왔다가 다른 촌으로 이사를 갔다. 현재 마을에 살고 있는 타민족 촌민들은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촌당지부서기 장운국(张运国, 46세)도 1998년에 통화시 휘남현에서 이사왔다.

사실 방명일은 서너살때 가족을 따라 고등촌에 이사와서 몇년동안 거주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고등촌은 호도거리를 실시하기 전이였고 촌에는 70여가구의 조선족이 살고 있었으며 아주 흥성흥성하였다”고 회고한다.

방명일이 제1서기로 부임된 후 자금을 유치하여 일떠세운 고등촌사무실

지금은 마을의 조선족가정, 달랑 두세대

예로부터 자식교육을 중시해온 전통이 있는 고등촌의 조선족촌민들은 학령기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 부득불 고향을 떠나 안도현성으로, 연길시내로 하나둘 이사를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방문취업제가 출범하기전까지만 해도 마을을 떠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던 2006년, 방문취업제의 본격화와 더불어 촌민들이 대거 한국에 돈벌러 떠나면서 조선족 세대가 썰물처럼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고등촌의 빈곤해탈을 위해서라면 힘든 일,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방명일 제1서기 

안도현민족종교국 번역중심 주임으로 있던 방명일은 2015년 7월에 고등촌의 빈곤부축 제1서기로 부임되여 왔다. 올때만도 촌에 살던 친한 어릴적 친구들도, 이웃들도 많을줄 알았는데 정작 와보니 촌에 등록된 인구는 84가구에 216명이였지만 실제 거주인구는 36가구에 124명밖에 없었다.

특히 조선족촌민은 달랑 한가구에 2명, 1950년생 동갑내기 부부인 김승일과 주계월 량주뿐이였다. 김승일 로인은 지난세기 50년대 중반, 대여섯살때 이웃마을인 요퇀촌(耀团村)에서 고등촌으로 이사왔으며 70년대초반에 고등촌 태생의 주계월을 만나 결혼했는데 어언간 40여년이 지났다. 현재 김승일부부의 두 딸도 전부 외국에 나가있다.

방명일이 부임되여온 당해에 촌을 떠난지 근 30년이 되는 주계월의 외조카인 석순애(1963년생)가 남편 김영덕(1958년생)을 따라 고향마을에 돌아와 규모화 황소사양을 시작하면서 촌에는 조선족가정이 2가구로 늘었다.

고등촌의 1950년생 동갑내기 부부인 김승일과 주계월 량주

안도현통계국의 2017년말 통계에 따르면 안도현의 인구는 19만 9690명, 그중 조선족인구는 3만 6203명으로 집계된다. 그중 영경향의 조선족인구는 향인구의 10%인 938명으로서 명월진(2만 1931명), 석문진(5413명), 이도진(2472명), 량병진(2136명), 송강진(1532명), 만보진(1231명)에 이어 일곱번째로 조선족이 많다. 량강진(437명)과 신합향(113명)이 그 뒤를 이었다.

안도현에서 유일하게 조선족이 다른 민족보다 더 많은 석문진은 조선족인구가 근 70%를 차지한다.

 

단오명절에 한복을 차려입은 안도현민족종교국의 사업일군들이 고등촌 촌민들에게 윷놀이를 가르치고있다

50대 촌민 두세대 “고향에 돌아와 살 것”

방명일서기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 가있는 50대의 두 가정이 고향 고등촌에 돌아올 의향을 밝혔다고 한다. 그나마 그들은 밭은 타민족 촌민에게 양도해주었지만 집은 그대로 남겨놓았기에 고향마을에 돌아와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남아있다. 그외의 대다수 촌민들은 출국 당시, 출국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집에다 밭까지 헐값에 팔아넘기보니 이젠 돌아오고싶어도 막무가내라고 한다. 촌의 90헥타르의 밭은 대부분이 논이였는데 벼농사에 능한 조선족 로력들이 전부 마을을 떠나면서 대부분이 밭으로 변해 현재는 고개숙인 황금색의 벼이삭 대신 옥수수와 콩이 주요 작물로서 한창 무성하게 그 자람새를 자랑하고 있었다.

안도현민족종교국의 사업일군들이 고등촌의 빈곤호들을 위문하고 있다

우리 말의 긁읽는 소리, 애기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하던 고등촌, 현재 촌에는 조선족 가정이 두가구만 남아있다. 자그마한 구멍가게도 없어 조미료나 술 한병 사려 해도 8킬로메터 떨어진 향소재지에 가야만 한다. 현성에서도 100킬로나 떨어진 고등촌, 예전에는 교통이 불편해 현성에 한번 가려면 며칠전부터 계획해야만 했었다.

방명일 제1서기가 고등촌의 빈곤호 정황을 료해하고있다

현재 촌까지 세멘트도로가 깔려서 현성에서 뻐스로 두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방명일이 제1서기로 부임될 무렵에 구매한 자가용은 벌써 근 4만킬로를 달렸다. 만약 현성에서 민족종교국에 출근하면 1만 5000킬로면 족하다고 한다. 그만큼 촌의 빈곤부축을 위해 밤낮없이 오르내리며 기울인 방명일의 로고를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방명일서기 등 빈곤부축 촌주재 간부와 촌간부들의 노력에 힘입어 올 년말전에 빈곤촌민 전부가 빈곤모자를 벗게 된다고 한다.

안도현민족종교국의 사업일군들이 고등촌 촌민들의 빈곤해탈을 위해 휴일을 마다하고 달려왔다

고등촌의 빈곤호를 위문하고있는 방명일 제1서기

조선족가정이 달랑 두가구만 남았지만 고등촌의 조선족 전통풍속을 체현한 벽화는 아주 인상적이다. 

조선족가정이 달랑 두가구만 남았지만 고등촌의 조선족 전통풍속을 체현한 벽화는 아주 인상적이다. 

조선족가정이 달랑 두가구만 남았지만 고등촌의 조선족 전통풍속을 체현한 벽화는 아주 인상적이다. 

 

조선족가정이 달랑 두가구만 남았지만 고등촌의 조선족 전통풍속을 체현한 벽화는 아주 인상적이다. 

안도현 영경향 고등촌 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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