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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명 빈곤녀학생을 대학에 보낸 ‘교장어머니’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人民网 ] 발표시간: [ 2020-12-14 15:08:25 ] 클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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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중앙 선전부로부터 ‘시대의 본보기’ 칭호를 수여받은 장계매(왼쪽 두 번째)

―운남 려강 화평녀고 당지부 서기, 교장 장계매의 녀학생 사랑이야기

“나는 시내물이 아니라 높은 산으로 태여났기에 뭇봉우리에서 평범한 계곡을 굽어볼 것이다!

나는 초개가 아니라 인걸로 태여났기에 위인의 어깨에 서서 비겁한 겁쟁이들을 멸시할 것이다!”

누구든 이렇게 호매로운 구호가 심도빈곤지역에 위치한 운남성 려강시 화평현녀자고급중학교에서 나왔으리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호매로운 구호를 웨치고 있는 화평현녀자고중의 학생들.

‘교육의 기적’—12년간 1,804명 빈곤녀학생 대학 진학

이 학교의 당지부 서기이며 교장이며 뭇제자들로부터 ‘장어머니'로 불리우는 이가 바로 일전에 중공중앙으로부터 ‘전국우수공산당원’칭호를, 중공중앙 선전부로부터 ‘시대의 본보기’칭호까지 수여받은 장계매(张桂梅, 63세)선생님이다.

장계매는 2008년에 사회에서 모금한 자금으로 전국 최초로 전액무료 녀자고중을 설립하고 산간지역의 녀학생들을 모집했다. 12년간 생활이 어려워 중도에 학업을 포기할뻔 했던 1,804명의 녀학생들이 이 학교를 졸업하고 산간지역을 벗어나 대학에 진학했다.

현재 그들이 종사하는 직업은 교원, 의사, 법관, 변호사, 경찰......

학교의 졸업생들이 장계매를 위해 준비한 영상에서 현재 인민교원으로 성장한 한 졸업생은 “12년전에 녀자고중의 학생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제일 큰 행운이였습니다!”, “12년이 지난 지금 저희들은 바로 그 때의 당신으로 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졸업생들은 너도나도 두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장어머니, 저희들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 장계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올 들어 매체의 보도를 거쳐 화평현녀자고중과 학교의 창시자인 장계매의 사적이 한꺼번에 전국 인민들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20여년간 장계매가 겪은 고생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12년이 지난 지금 저희들은 바로 그 때의 당신으로 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동북 녀성의 운남 사랑, 교육 사랑

1957년에 흑룡강성 목단강시에 태여난 장계매는 17살의 어린 나이에 언니와 함께 변강의 개발, 건설을 지원하러 운남성에 갔다. 1990년 대리에서 결혼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대리시 희주진1중에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5년 후에 남편이 위암으로 세상을 하직하면서 행복했던 그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남편의 후사를 치르자마자 대리에 남기 싫어진 그녀는 혈혈단신으로 심도빈곤지역에 위치한 화평진중심학교로 전근했다.

학교에 신청하여 초중 졸업반급 4개를 떠맡고 남편을 잃은 고통을 잊으며 일에만 매진하던 그녀는 1년만에 복중에 5개월짜리 태아만큼 큰 종양이 있다는 병원 판정을 받았다. 종양에 밀려 배속 장기들의 위치가 변하기까지 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학생들이 고중입학시험을 치를 때까지 3개월이나 버티고 나서야 수술대에 올랐다.

퇴원 후, 현부녀련합회대표대회에 대표 자격으로 참가한 그녀를 위해 대표들이 모금을 조직했다.

“장선생님, 두려워하지 마세요. 비록 우리 현이 빈곤하긴 하지만 전력으로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현부련회 주석은 이렇게 말했고 산간지역에서 온 한 대표는 로비로 남겼던 마지막 5원짜리까지 다 털었다.

장계매는 20여년 전의 일을 회억할 때마다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나는 죽을 때까지도 이 은정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화평현을 위해 기여한게 없어서 그들에게 미안하다. 난 반드시 이 곳을 위해 일을 할 것이다!”

젊은 시절의 장계매 부부

2001년, 화평현아동복리원 원장을 맡은 장계매는 복리원 문앞에 버려진 녀자아기를 발견하게 된다.

한 어머니가 아들의 공부 뒤바라지를 위해서라면 대부금까지 맡으면서도 열몇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 딸을 억지로 시집보내는 적라라한 현실을 보고 버려진 녀자아기들에게는 모두 비극적인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으며 빈곤 산간지역의 락후하고 불대등한 교육이 바로 자질이 낮은 녀자아이들을 자질이 낮은 엄마로 만들며 그들이 또 자질이 낮은 다음 세대를 만드는 악성순환이 일어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2002년, 45세의 장계매는 전액 무료 녀자고중을 설립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현의 재정에만 의거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식한 장계매는 ‘우수교원’증서와 자신에 대한 신문 보도내용을 들고 대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경비를 모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그녀를 ‘사기군'으로까지 매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뭇사람들의 수많은 오해와 조롱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선택을 이어갔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리용해 외지로 재정적 지원 조달을 다녔지만 마련한 돈은 고작 만원밖에 안되였다.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자금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는 액수였다.

2007년 당의 17차 대표대회의 대표로 당선된 그녀가 북경에 가서 회의에 참석했을 때 한 세심한 녀기자가 구멍난 바지를 입은 장계매를 발견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취재하면서 장계매와 그녀의 녀자고중 설립의 꿈에 관한 사연이 전국에 알려졌다. 전국 각지에서 후원금을 보내왔고 려강시와 화평현에서 각각 100만원씩 내놓으며 학교 설립을 도왔다.

빈곤녀학생들의 자애로운 ‘교장어머니’

‘시대의 본보기’교장어머니가 이룩한 ‘교육의 기적’

화평현녀자고중의 올해 대학입시 수험생은 159명, 본과 입학률은 94.3%이였다. 이러한 성적을 따내기까지 학교의 창립자이며 교장인 장계매의 피타는 노력이 슴배여있다.

2008년, 화평녀고의 첫 신입생은 100명, 입학 성적에 대한 요구가 없다보니 대부분 학생들의 성적은 엉망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3년 후 그들을 전부 본과 대학에 진학시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나 렬악한 학교조건에 질려 초기의 17명 교원 중 9명이나 사직했다. 페교의 위기에 처하게 된 현실에 락심하던 그녀는 인수인계를 준비하기 위해 자료를 정리하던 중 교원들의 자료에서 학교에 남은 8명 교원 중 6명이나 당원이라는 사실에 눈이 번쩍 띄였다.

그들은 학교 2층의 벽 한면에 당기를 그리고 옆에 입당선서문을 써놓았다. “공산주의를 위해 종신토록 분투하겠다”는 구절을 선서할 때 그들은 눈물바다가 되였다.

새벽 5시 기상, 밤 12시 휴식, 3분 안에 교실에서 식당으로 이동, 식사 시간은 10분을 초과하면 안된다... 그때부터 녀고에서 모든 일은 그녀의 엄격한 규정시간 내에 이루어졌다.

두메산골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식은 어떤 쓸모가 있을가? 그녀는 “녀자아이가 교육을 받으면 3대에 걸친 가족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이는 교원으로서의 초심이고 공산당원으로서의 초심이다.”라고 말한다.

2011년 대학입시에 응시한 화평녀고 1기 졸업생 중 대학에 96명이 진학해 종합 진학률이 100%에 달했다. 심지어 입학 당시에 수학성적이 6점에 그쳤던 한 학생은 대학입시에서 만점인 150점을 맞았다.

이런 기적의 배후에는 바로 보답을 따지지 않고 모든 것을 교육사업에 쏟아부으며 지어는 생사의 대가도 아랑곳하지 않은 견강한 공산당원 장계매의 노력이 깃들어있다.

빈곤녀학생 가정을 방문한 장계매 교장

“조국에서 수요한다면 어디든 달려가야 한다.”

화평녀고에서 좋은 성적이 전해져오는 사이에 장계매 교장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여만 갔다.

자식도, 주택도, 재산도 없는 장계매는 매일 학교 기숙사에 살아왔다. 그동안 페기종, 페섬유증, 소뇌위축증 등 20여가지 질환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6년전부터는 팔이 아파서 더이상 들 수 없게 되자 그녀는 교편을 접고 학교 행정을 맡았다. 매일 새벽이면 교장이자 안전보장요원인 그녀가 확성기를 들고 다니면서 학생들을 깨우고 아침체조를 하라고 독촉한다.

12년 동안 그녀가 산을 넘고 강을 건느며 려강시의 모든 두메산골 마을들을 참빗질하며 가정방문을 하여 ‘지식은 운명을 바꾸고 문화는 가난에서 탈출시킨다”는 리념을 전하고 다닌 거리가 무려 11만키로메터에 달한다. 그동안 손잡이뜨락또르, 오토바이, 심지어 말을 타고가다가 떨어져 륵골이 끊어지기까지 했지만 그의 발길은 끊길줄 모른다.

장교장은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를 위해 기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보람을 느낀다. 여하튼 나는 한 세대의 사람을 구했다.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나보다 잘 살고 나보다 행복하면 된다. 그것이 나에게는 최대의 위안이다.”라고 말한다.

장계매는 수많은 시골소녀들의 인생의 꿈을 밝혀주었다. 그녀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많은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시골의 가장 간고한 일터를 택한 것이다.

올해 두 소녀가 서장에 있는 부대에 입대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계매가 아쉬워하자 아이들이 그녀를 위로했다. “어머니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셨잖아요. 조국에서 우리를 수요한다면 그 곳이 어디든 달려가야 한다고.”

아이들의 말을 듣고 장계매는 순간 눈물투성이가 되여 말했다. “그 때 내가 무엇을 기여하였든 전부 다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인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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