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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탄탄대로에서] 제3집 대업 위해 기초 다지다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CCTV방송 ] 발표시간: [ 2019-11-18 15:12:36 ] 클릭: [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 제3집 대업 위해 기초 다지다

1950년 6월 6일부터 9일까지 당중앙 7기 3차 전원회의가 북경에서 소집됐다. 이번 회의는 경제문제를 중심의제로 했다. 이는 전 당의 사업중심을 혁명전쟁에서 경제건설에로 전환했음을 표지한다. 그 해 새 중국의 대량의 군인들이 군복을 벗고 경제건설에 뛰여들었다.

천란(天兰) , 천성(天成), 성유(成渝), 운남귀주(滇黔) , 귀주광서(黔桂), 호남광서(湘桂) 등 철도로선의 건설현장에서 군인들이 활약하는 모습이 안겨왔다.

해방을 맞은 인민들은 의기가 충천했다. 새 중국을 위해 기초를 다지려는 행동이 즉시 진행되였다.

항미원조전쟁중 중국인민지원군이 조선으로 나가고 있다.

중국인민이 여러 면에서 당중앙 7기 3차 전원회의의 포치를 시달하고 있을 때 1950년 6월 25일 조선내전이 폭발했다. 미국은 즉시 군대를 파견하고 무장으로 간섭했으며 조선에 대한 전면 전쟁을 발동했다. 이어서 유엔 안전보장리사회를 조종하여 결의를 채택해 이른바 ‘유엔군’을 구성하여 조선침략전쟁을 확대시켰다. 이와 함께 미국은 또 제7함대를 출동시켜 중국 대만해협을 침략했다. 10월, 조선을 침략한 미군은 38선을 넘어 바로 압록강변에 이르러 비행기를 출동시켜 중국 동북 변경도시 단동을 폭격했는바 새 중국의 국가안전이 엄중한 위협을 받게 되였다.

‘유엔군’ 총사령 맥아더는 총공격의 명령을 내렸다. 그는 크리스마스절전에 압록강변까지 쳐들어가면 조선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여겼다.

10월 1일, 3일, 조선정부와 김일성 수상은 두번이나 중국정부의 출병지원을 청구했다.

10월 4일과 5일, 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중남해 이년당에서 소집됐다. 이 때의 새 중국은 할 일이 많이 밀려있었고 국민경제를 회복시키는 것이 우선적인 임무로서 그 어떤 전쟁의 간섭으로 인해 건설 진척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되였다. 신중한 토론과 반복적인 득실을 따져 모택동과 당중앙은 최후에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란 중대한 결책을 내렸다.

10월 8일, 모택동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건설하며 팽덕회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하는 명령을 발포했다.

분명한 것은 이는 실력 차이가 엄청 난 전쟁이였다. 미국군대가 전쟁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가지고 있었고 기타 지면 부대는 전부 기계화 부대였다. 반면에 지원군은 대체적으로 보병과 소량의 포병에 의해 작전했으며 무기장비도 상당히 락후했다. 극히 대칭되지 않으며 극히 곤난한 그런 조건에서 조선인민군과 어깨 나란히 작전한 중국인민지원군은 기세를 떨치고 위풍을 과시했으며 세계를 뒤흔들어놓았다.

1950년 10월 25일부터 이듬해인 6월 10일까지, 중조 군대는 긴밀히 배합하여 량수동 첫 전투, 운산성 격전, 청천강 회전, 장진호 악전고투 등 련속 5차례 전역을 벌여 침략군을 압록강과 두만강 변에서 38선 부근에로 쫓아내 조선 북부의 드넓은 땅을 수복했다.

국가박물관 진렬창 안에는 흙이 한삽 진렬되여있다. 이는 조선전장 상감령에서 퍼온 흙이다. 이 흙 한삽에는 파편이 절반이나 들어있다.

삼감령 소재의 오성산은 중조 군대의 중부 방어선의 전략적 요충지이며 미군 공격의 중점지역이기도 하다. 미군은 한달 반 동안 6만여명의 병력을 집결시켜 대포 300여문, 탱크 170여대, 비행기를 연차로 3,000번 출동시켜 약 3.7평방키로메터 되는 지원군 진지에 포탄 190여만발, 폭탄 5,000여매를 쏟아부었다.

43일 동안 지원군 장병들은 갱도공사에 의거하여 반보도 후퇴하지 않고 900여차의 상대방의 충격을 물리치고 2만 5,000여명을 섬멸함으로써 진지를 굳게 지켰다.

그 때는 적개심에 불타는 시기였다. 조선전장의 봉화가 세차게 타오르고 전방을 지원하려는 국내의 기세는 드높았다. 전국적으로 비행기, 대포를 기부하는 운동은 1952년 6월에 이르러 종결되였다. 기부금이 인민페로 도합 5억 565만원에 달하였는데 전투기 3,710대를 구매할 수 있었다.

전대미문의 전쟁 속에서 중국인민지원군 가운데는 양근사, 황계광, 구소운 등 영웅공신 30여만명과 공신집단이 근 6,000개 용솟음쳐 나타났다.

영용하게 희생된 지원군렬사 가운데는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도 있다. 모안영은 1950년 10월 19일 조선에 나갔다가 11월 25일 미군의 폭격에 맞아 희생되였다. 당시 지원군이 조선에 간지 불과 36일 밖에 안되였다.

1953년 4월, 모택동은 특별히 황계광의 어머니 등방지를 중남해에 모셨다. 한 렬사의 아버지 손이 한 렬사의 어머니 손을 꼭 잡아주었다. 모택동은 “당신은 아들을 잃었고 나도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영광스럽게 희생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렬사가족입니다.”고 말씀하셨다.

1990년, 모택동께서 남긴 유물을 정리할 때 사업일군은 의외로 모택동이 혼자서 정리하고 수장해놓은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 안에는 적삼 두벌과 양말 하나, 군모와 수건 하나 들어있었다. 모택동은 모든 사람들 몰래 옹근 26년 동안 이 물품을 보관했는데 이는 그의 아들 모안영이 남긴 마지막 유물이였다.

1953년 7월 27일, 참전 각측은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항미원조전쟁이 막을 내렸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을 맡은 클라크는 회억록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부러워할 바가 없는 영예를 가졌다. 나는 승리를 거두지 못한 정전조약을 체결한 사상 첫 미국 륙군 사령관이다.”

당시 지원군 사령원 팽덕회는 이런 말을 했다. “수백년래 서방 침략자들이 동방의 어느 한 해안에서 대포 몇대를 세워놓기만 하면 그 나라를 강점하던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2019년 6월 21일, 습근평 주석은 조선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영렬을 기념하기 위해 보수한 중조우의탑을 참배했다. 습근평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계단에 올라서서 꽃바구에 있는 리봉을 정리했다. 빨간색 리봉에는 ‘중국인민지원군 렬사들이여, 영생불멸하리!’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1953년 새해 첫날 《인민일보》는 양력설 사론을 발표해 중국에서 첫번째 5개년 계획을 집행한다고 선포하고 전국인민은 한마음한뜻으로 공업화를 실현하기 위해 힘껏 분투하자고 호소했다.

1953년 6월 15일, 모택동은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연설을 하며 과도시기의 총로선을 정식으로 제기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으로부터 사회주의개조를 대체상 완성하기까지는 한개 과도시기이다. 과도시기의 당의 총로선과 총임무는 10년에서 15년 혹은 더 긴 시간내에 국가 공업화와 농업, 수공업, 자본주의 공상업에 대한 사회주의개조를 대체상 완성하는 것이다.”

그 후 전국 인민은 사회주의공업화를 건설하는 한편 3대 개조운동을 륙속 진행했다.

공업화를 실현하는 것은 새 중국을 건설하는 장원한 목표이고 천추대업과 관련되는 것이다. 1953년 12월 26일, 대형 압연공장, 무봉 강관공장과 7호 용광로로 구성된 안산강철 3대 공사가 준공, 생산에 투입됐다. 이는 중국이 중공업을 핵심으로 하는 대규모 경제건설을 시작했음을 표지한다.

하북성 존화현의 한 자그마한 마을—서포촌, 새 중국 창립전 농민들의 생활이 극히 어려워 20여가구 되는 농민들은 일년 내내 빌어먹으며 살아왔다.

1952년, 서포촌 촌민 왕국번은 농업합작화의 호소를 받들고 촌에서 가장 곤난한 23가구 농민들을 조직하여 공동 초급사(初级社)를 꾸렸다. 초급사에 하나 밖에 없는 당나귀의 4분의 1의 사용권이 입사하지 않은 촌민에게 귀속되였다 하여 사람들은 초급사를 ‘3개 당나귀 다리’의 ‘가난뱅이사’라고 불렀다. 전체 사원들은 단합해 자력갱생하여 ‘산’에 의거해 얻은 생산자료로 3년 시간을 들여 가난의 면모를 초보적으로 개변했다.

모택동이 친필 편집한 《중국 농촌의 사회주의고조》란 책에는 이런 평어가 씌여져있다. ‘6만만의 가난뱅들이 수십년내에 자체의 노력으로 부유하고 강대한 사회주의나라로 개변하지 못하겠는가?’ 1956년 1월, 이 책이 출판될 때 전국적으로 입사한 농가는 총 농가의 80%를 점했다. 1956년말까지 이 수자는 이미 96%를 초과해 농업합작화를 대체적으로 실현했다.

농업 사회주의개조와 달리 자본주의 공상업에 대한 사회주의개조에 대해 국가에서는 평화적인 유상몰수 정책을 채용했다. 자본주의 공상업의 사회주의개조가 건전하게 발전하도록 추진하고 공상계 사상을 안정시키기 위해 1955년 10월말, 모택동은 련속 두차례 공상계의 일부 대표인사를 초대하여 직접 그들을 설득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 나라가 지금보다 더 크게 발전하고 더 크게 부유해지며 더 크게 강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유는 공동한 부유이며 여기서 말하는 강대함은 공동히 강대해지는 것이다.”

1956년말, 전국 자본주의 공상업의 공유와 사유 합동경영이 대체적으로 완성됐다.

이와 함께 수공업을 상대로 한 사회주의개조도 폭넓게 진행되여 수공업 로동자들이 점차 사회주의 집체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했다.

이들중에는 많은 수공업의 전통 브랜드도 있었다.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공업중의 많은 좋은 물건들을 버려서는 안된다. 왕마즈(王麻子), 장쇼쵄(张小泉) 가위는 만년이 지난 후에도 버려서는 안된다.”

사회주의개조가 대체적으로 완성됨에 따라 1956년 중국의 사회경제구조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는바 사회주의공유제가 이미 절대적인 우세를 점했다. 생산자료 공유제를 토대로 하고 로동에 따라 분배하는 원칙의 사회주의 기본경제제도가 이미 중국에서 대체적으로 건립되였다.

사회주의 경제제도를 점차 건립됨과 아울러 사회주의 정치제도 건설도 가일층 추진되였다.

1953년 7월, 기층 인민대표대회 대표 선거가 빠르게 전국적으로 진행되였다. 많은 선거민들은 고운 옷을 입고 기쁨 마음으로 투표소로 갔다. 2억 7,809만 3,100명의 선거민은 등록한 선거민의 85.88%를 점해 근 3억명 선거민들이 선거에 참가했다. 이는 중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전에 없던 민주실천이였다. 북경의 기층 선거사업은 12월부터 시작되였다. 중남해에서도 전문 투표소를 설립했다.

전국적으로 근 567만명 되는 지방 각급 인민대표들을 선거했다. 이를 토대로 1,226명 되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가 선거되였다.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항주 서호, 유람객들이 줄을 이었다. 서호 옆의 항주 북산로 84호 정원에 있는 자그마한 건물은 새 중국 제도건설의 력사적 표지이다.

1953년 12월부터 1954년 3월까지 77일 되는 주야에 모택동은 한개 소조를 거느리고 이곳에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의 초안 초고를 기초했다고 하여 ‘서호원고’라 불렀다. 81일간의 광범위한 토론과 반복적인 수정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이 정식으로 공포되였으며 정중하게 전국인민들에게 교부하여 토론과 의견을 구했다. 전국 각계에서 도합 1억 5,000만명이 헌법 초안의 토론에 참여했으며 헌법 초안을 열렬히 옹호함과 아울러 118여만가지 수정 및 보충 의견을 제기했다.

1954년 9월 15일, 만중이 주목하는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가 북경 중남해 회인당에서 성황리에 개막됐다.

모택동은 개막사에서 다음과 같이 호탕하게 말했다. “우리는 전진하고 있으며 우리는 앞사람들이 종래로 해보지 못한 극히 영광스럽고 위대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꼭 도달할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꼭 도달할 수 있습니다.”

1954년 헌법은 국가의 근본 성질과 근본 정치제도를 규정했다. 새 중국의 제1부 근본 대법으로서 헌법은 사회주의원칙과 인민민주원칙을 기본원칙으로 확정했으며 중국의 국정에 맞는 국체(国体)와 정체(政体)를 확정했으며 보다 완전한 공민의 기본권리와 의무를 규정했다.

대회에서는 모택동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주덕을 부주석으로, 류소기를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선거했다. 모택동의 추천에 따라 주은래가 국무원 총리로 되였다.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소집과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의 채택은 인민대표대회 제도의 확립을 상징했다. 이와 함께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다당합작과 정치협상 제도가 계속 발전하고 민족구역자치 제도도 점차적으로 보완되였다. 민족구역자치제도가 깊이 있게 실행됨에 따라 여러 민족의 평등호조, 단결합작이 더 강해졌으며 중화민족의 다원일체 구조도 가일층 형성되고 공고해졌다.

1954년 12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2기 전국위원회 제1차 회의가 소집되였으며 새로운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장정〉을 토론 및 채택했다. 장정은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인민정협은 인민민주 통일전선의 기구로서 여전히 존재가 필요하다. 그 기본임무는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더 광범위하게 전국인민을 단합시켜 사회주의사업의 발전을 추진하는 것이다. 일련의 제도의 확립과 〈헌법〉의 출범은 중국의 발전, 부강에 튼실한 정치적 토대를 닦아놓았다.

1956년은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한해였다.

그 해 전국 여러 민족 인민들은 사회주의개조를 완성하고 사회주의의 탄탄대로를 건설하는 길에 들어섰다.

그 해의 국경절에 큰비가 내렸다.

모택동은 천안문 성루에 올라서서 미소를 지으며 기쁨으로 넘치는 군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중국인민해방군 3군 장병들이 비를 맞으며 검열을 받았다.

큰비 속에서 행진하는 사람들은 춤을 추며 환희에 들끓었다.

백년 동안 흐트러졌던 중화민족의 정신력이 응집되였다.

응집된 힘은 얼마나 강대한가!

나젊은 인민공화국은 비바람 속에서 활기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CCTV방송, 편역: 길림신문 홍옥기자

http://news.hebei.com.cn/system/2019/09/17/100046666.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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