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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잊어서는 안되는가?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인민일보 ] 발표시간: [ 2020-12-16 09:40:02 ] 클릭: [ ]

2020년 12월 13일은 우리 나라 제일곱번째 법정 남경대학살 희생자 국가 추모일이다. 83년전의 이날,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전대미문의 대학살 참상을 빚어냈다.

우리는 왜 83년전의 그 한단락 력사를 잊어서는 안되는가? 아래 이들의 이야기가 아마도 그대에게 답을 줄 것이다.

그들은 력사의 산 증인

1937년 12월 13일, 하숙금은 이날을 평생 기억하고 있다. 그 해 그녀는 여덟살이였다. 집에는 외조부모, 부모와 16살 나는 큰언니, 14살 나는 둘째언니와 네살 나는 녀동생이 있었다. 그 전해에 또 녀동생이 태여나면서 일가족 9명은 남경 신로구 5번지에서 세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1937년 12월 13일 오전, 30여명 되는 일본 병사들이 문을 두드려댔다. 막 문을 연 집주인이 어쩔 새 없이 총살당했다. 일본 병사 앞에 꿇어앉아 제발 다른 사람들은 살해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던 숙금의 아버지도 결국에는 총에 맞아 숨졌다. 한살배기 녀동생은 일본군에 내동댕이쳐 죽고 어머니는 륜간을 당한 후 찔려죽었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일본 병사는 또 네 자매를 목숨 걸고 지키려는 외조부모를 살해했다. 큰언니와 둘째언니도 륜간을 당한 후 살해되였다. 숙금은 칼에 세번이나 찔린 후 기절했다. 후에 그는 네살 나는 녀동생의 울음소리에 깨여났다. 두 아이는 친인들의 시체가 널려있는 집안에 14일 동안 숨어있었는데 이웃들이 발견해서야 비로소 구원될 수 있었다.

숙금 일가가 조난당한 후의 광경은 16미리메터짜리 촬영기에 의해 기록되였다. 촬영자는 미국의 목사 요한·마지였다. 그는 하숙금의 가족들이 살해당하는 영상에 종이 한장 가득 설명을 덧붙였다. 이는 그가 남긴 모든 영상 설명중 제일 긴 한단락이였다.

 
요한·마지가 찍은 남경대학살 영상

하숙금 일가의 참상은 또 다른 사람에 의해 일기로 남겨졌다. 바로 독일인 라베. 이는 그가 기록한 500여개 참안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8살 난 녀자애와 1937년에 남경에 남기로 마음 먹은 이 두 외국인은 모두 력사의 중요한 증인으로 되였다.

라베는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남경안전구를 결성해 25만명 넘는 중국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었으며 매일과 같이 일본군 만행 기록을 정리해 일본측과 여러 나라 대사관에 보내는 것으로 항의를 표했다. 또한 압력에 못이겨 남경을 떠날 때까지 집에 600여명 되는 중국 백성을 수용했으며 떠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 비행사 왕광한을 데리고 갔다.

 
요한·라베의 1938년 1월 29일 일기

요한·마지는 그 촬영기로 105분짜리 화면을 비밀리에 찍었다. 1938년 2월, 누군가가 일부분 필림을 외투에 꿰매여 비밀리에 남경을 빠져나옴으로써 이 대재난에 유일한 동태적 영상을 남겨놓았다. 1946년 극동국제군사법정은 도꾜에서 일본 전범들을 심판했다. 요한·마지가 법정에 출두했는데 그의 영상은 남경대학살의 철증으로 되였다.

그들은 력사의 추적자

58년 후 이미 로인으로 된 하숙금은 미국에서 온 한 예쁜 처녀애한테 신로구 5번지의 참사를 다시 한번 들려주었다. 처녀애의 이름은 장순여, 중국계 미국인 작가였다. 우연하게 남경대학살 력사 사진을 본 그녀는 남경대학살을 기록하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간주하리라 다짐했다.

 
1995년, 하숙금(좌2)과 장순여(우2)가 함께 있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지난 세기 90년대 일본의 우익들은 남경대학살은 거짓말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벌이였다. 서방사회는 남경대학살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었다. 라베의 일기가 오간 데 없이 종적을 감추고 요한·마지의 영상은 행방불명이 되였으며 존재하지도 않는 ‘귀신영상(鬼片)’으로 모함을 당했다.

1995년 장순여는 남경으로 날아가 하숙금 등 수십명 생존자들을 취재했다. 연후 그녀는 예일대학 도서관에서 라베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냈다. 이로부터 그는 라베 일기 찾기에 나섰다.

라베를 찾는 과정에서 장순여는 소자평을 만났다. 그는 1936년 남경에서 태여났으며 후에 가족을 따라 대만으로 건너갔다. 그도 남경대학살수난동포기념련합회를 내오고 줄곧 남경대학살 증거를 찾고 있었다.

그간 라베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50여명 찾아본 끝에 그들은 마침내 독일에서 라베의 손녀를 만났으며 일기를 공개할 것을 재삼 설복했다. 1996년 12월 12일,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한 2,000여페지에 달하는 라베 일기가 전세계에 공개되였으며 선후로 중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출판되였다.

 
라베 일기 사진판

미국에서의 여러모로 되는 탐문을 거쳐 소자평은 마침내 마지의 아들을 찾았다. 그들은 함께 잡동사니들이 한가득 쌓여있는 지하실을 뒤졌다. 여기서 그들은 드디여 4개의 동함(銅盒)에서 13개의 작은 네모함을 발견하게 되는데 네모함마다에는 소형 필림이 담겨져있었다. 이렇게 37분 5초 길이의 마지의 영상이 다시 빛을 보게 되였다.

1997년, 남경대학살 발생 바로 60년 후 장순여의 《남경대학살》이 출판되였다. 이는 남경에서 저지른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한 최초의 영문 저작으로서 련속 5개월간 《뉴욕 타임스》의 베스트 셀러에 선정되였다.

20여세 나는 한 처녀애와 60여세 나는 한 로인이 단 하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꾸준히 찾아다니고 또 찾아다녔다. 어쩌면 그들은 평화롭고도 간단한 나날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여 이미 고혼이 된 동포들을 위한 납함(呐喊)을 택했던 것이다.

 
2019년, 요한·마지선생의 두 아들과 ‘미국뉴욕남경대학살수난동포기념련합회’는 중국침략일본군남경대학살조난동포기념관에 ‘37분’판 마지의 영상 자료를 기증했다.

그들은 력사의 수호자

당시 하숙금도 ‘대학살 부정파’들의 미친 듯한 공격을 받았다. 1998년 히가시나카노 슈도는 《남경대학살의 철저한 검증(南京大屠殺的徹底檢証)》이라는 책을 출판, 하숙금은 ‘가짜증인’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책은 다섯번이나 재판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문자로 번역되기도 했다. 하숙금로인은 법률의 경로를 통해 력사의 진상을 수호하기로 마음 먹었다.

2000년 10월부터 담진, 오명수 등 변호사들이 하숙금로인을 대리해 일본 우익분자들의 명예훼손사건을 기소함으로써 우리 나라 경내에서 일본 우익분자들을 기소하는 시작을 열었다.

국내에서 승소한 후 히가시나카노 슈도는 일본에서 하숙금로인을 기소했다. 담진과 남경변호인단은 일본에 가서 맞고소를 진행, 일본 우익분자들에 대한 법정 투쟁을 펼쳤다.

전국 나아가 세계에 이름난 이 사건은 전후로 9년 동안이나 지속되였다. 이 기간 담진을 대표로 하는 중국의 변호사들은 엄청난 노력과 심혈을 기울였다.

하숙금은 이렇게 회억한다.

법정을 열기전 담변호사는 적어도 15분간의 법정 대질을 해야 한다고, 용감해야 한다고 그녀를 격려했다. “전 문화도 없는 할멈이예요. 그러나 이렇게 많은 대변호사들이 나의 명예를 위해, 대학살 생존자들이 집단적으로 받은 상해를 위해 이처럼 사심없이 뛰여다니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온밤 반복적으로 련습했지요. 그렇게 결국 법정에서 저와 변호사는 완정하고도 확실하게 30분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2007년 11월 2일, 일본 도꾜지방법원은 하숙금이 승소했다고 판결하고 피고가 원고에게 450만엔을 배상할 것을 명령했다. 승소 후의 기자회견에서 하숙금은 큰소리로 선포했다. “저는 가짜증인이 아닙니다. 저는 남경대학살의 생존자입니다. 남경대학살 력사를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당년의 그 8세 소녀가 고희의 나이를 넘어서 재차 력사를 위해 증인으로 나섰다. 다름 아닌 진상을 수호하기 위해 중국의 변호사들과 그녀는 근 10년을 어깨 겯고 싸워왔던 것이다. 남경대학살은 그들로 말하면 하나의 력사사건이 아닌 그들의 옹근 인생을 관통하고 개변시켰던 것이다.

아래는 그 이후의 그들의 이야기이다.

 
단란한 하숙금 일가

오늘날 이미 4세대의 대가정을 이루고 있는 하숙금로인은 2011년 일본에 9급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선뜻 기부에 나섰다. 로인은 지금도 신체단련을 견지하고 있다. 살아서 력사를 위해 증인으로 나서기 위함이라고 로인은 말한다.

2020년 역정 기간 라베의 자손들이 도움을 구했다. 남경에서는 즉각 독일에 항역 물자를 기증했다. 수증(受贈)자란에는 ‘토마스·라베’라고 적어넣었다. 이는 80여년을 뛰여넘는 감사의 표시이기도 했다.

남경대학살이 있은 지 80년 후 요한·마지의 손자는 남경에 와서 일찍 조부가 찍었던 매개 지점들을 다시 렌즈에 담았다.

《남경대학살》 집필 과정에 장순여는 늘 분노로 가슴이 떨리고 악몽에 시달렸다. 후에 그녀는 우울증에 걸렸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녀와 그 가족들은 또 끊임없이 일본 우익세력의 보복과 소란을 받았다. 2004년 그녀는 총으로 자살했다. 그 때 나이 36세.

2018년 12월, 남경시는 80여세 나는 소자평을 위해 남경 호적을 특별 비준했다. 주소는 그가 어릴 적 거주했던 고루구 마가거리였다.

 
소자평이 중국침략일본군남경대학살조난동포기념관을 돌아보고 있다.

담진변호사의 추동하에 2017년 12월 23일, ‘남경대학살력사진상수호변호사대련맹’이 설립되였으며 남경대학살 생존자 권익 보호에 진력했다. 2020년 6월 12일, 담진은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왜 남경대학살을 잊어서는 안되는가?

그것은 바로 이 전대미문의 피비린 학살에서 30만 동포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며 생존자들이 굴욕과 아픔을 안고 용감하게 그리고 견강하게 살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력사의 진상을 기록했기 때문이며 누군가는 력사의 진상을 추적하기 위해 생명의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시간은 증인을 데려갈 수 있다. 그러나 시간 자체는 바로 영원한 증인인 것이다. 83년이라는 세월 속에 그 때의 그 재난은 이미 항구적인 견지, 엄청난 용기와 묵직한 책임으로 변했다.

오직 남경대학살의 력사를 명기해야만 쉽지 않게 이루어진 평화를 소중하게 여기고 수호할 수 있으며 오직 력사의 진상을 수호해야만 비로소 평화와 정의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인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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