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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삼의 입당신청서 뜨겁게 화제! 몇마디 글귀에 의기 충만

편집/기자: [ 김가혜 ] 원고래원: [ 新华网 ] 발표시간: [ 2021-05-30 16:07:49 ] 클릭: [ ]

“이는 제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짧지만, 가장 힘 있는 입당 신청서입니다.”

최근, 중국국가박물관 100명 과학자의 입당 신청서가 모두 전시되였다. 그중 아주 짧은 신청서 한통이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저자는 바로 중국항천사업의 정초자 ‘량탄일성(两弹一星)’ 공훈 전학삼이다.

이 입당 신청서의 본문은 아주 짧은 몇줄 뿐

“귀국하여 근 3년 동안 당의 교육을 받으며 저로 하여금 당의 위대함을 깨닫게 했고 공산주의사회라는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당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이 목표를 위해 분투하기를 원하며 또한 당의 사업에 충성하렵니다.”

이는 ‘중국항천의 아버지’ 전학삼이 1958년 9월, 입당신청서에 쓴 글귀이다. 몇마디에 불과하지만 글자마다 의기 충만하다.

1959년 1월 5일, 중국과학원 당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전학삼은 중국공산당 예비당원으로 접수되였다. 같은 해 11월 12일에 정식 당원으로 되였다. 전학삼은 당원의 영예를 아주 소중히 여겼다.

30년 후에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새중국 건립 10주년 때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때는 그야말로 마음이 매우 감격스러웠다.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였다. 너무 격동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중국 2탄(两弹)의 연구 개발을 최소 20년은 더 앞당겼다

5년간의 귀국길, 10년안에 원자탄•수소탄 량탄 성공.

전학삼은 일찍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나의 사업은 중국에 있고 나의 귀속은 중국에 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였다.

미국에 있던 전학삼은 귀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캘리포니아리공대학 제트분사추진쎈터 주임으로 있었다.

귀국하기 위하여 그는 선후로 미국에서의 모든 직무를 사임했다.

그런데 미군측은 그가 해병대 5개 사단과 맞먹는다고 말하면서 차라리 쏴죽여버릴지언정 중국으로 보내줄 수 없다고 했다.

그 후 장장 5년간 연금했다.

후에 전학삼은 담배종이를 사용하여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조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중국정부의 교섭하에 그는 겨우 몸을 뺄 수 있었으며 1955년 9월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 전학삼은 중국과학원에 배치되여 일했으며 력학연구소의 설립을 준비했다.

그는 중국의 미사일 연구제작에 대해 신심이 충만했다.

“외국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중국인이 못한단 말인가?”

 
전학삼이 발사현장에서 지도를 하고 있다.

1956년 10월 8일은 전학삼이 조국으로 돌아온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였다.

이날, 전학삼이 명을 받고 조직한 우리 나라 최초의 로케트 및 미사일 연구기구인 국방부 제5연구원이 설립되였다.

 
전학삼이 인솔하여 조직한 우리 나라 최초의 로케트 및 미사일 연구소

10년 후인 1966년 10월 55세의 전학삼은 실험의 총기술책임자로서 원자탄과 수소탄 결합 실험의 성공을 직접 목격했다.

이때부터 중국의 핵미사일은 마침내 무력위협과 실전능력을 모두 갖추게 되였다.

전학삼의 결연한 귀국으로 중국의 미사일, 원자탄의 개발이 최소 20년은 앞으로 앞당겨졌다.

찬양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과를 당에 돌리며, 성과는 집체에 속한다."

그는 또 “사람들은 내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을 했다고 말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상이다!”

당과 국가에 대한 열애와 약속은 말 속에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우기 행동에 달려있습니다.

전학삼 어르신께 경의를 표합니다!

/기사래원 신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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