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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근평과 그의 부친: 두 세대 공산당원의 ‘릴레이’

편집/기자: [ 김영화 ] 원고래원: [ 중앙텔레비죤라지오방송국 ] 발표시간: [ 2021-06-22 23:57:18 ] 클릭: [ ]

습근평과 부친 습중훈은 모두 신념이 확고한 중국공산당 당원이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습중훈의 모습은 대중속에서 나온 대중 령수'로 언제나 인민들과 함께였다. 그의 일생은 혁명적인 일생이였고 빛나는 전투적인 일생이였으며 일심전력으로 인민을 위해 복무한 일생이였다.

습근평은 부친에 대해 긍지를 느끼고 부친에게서 많은 보귀하고 고상한 품성을 이어받았다.

군중들과 마음이 잘 통해

“백선생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였습니까?”

“66살입니다.”

“띠는 어떻게 됩니까?”

“말띠입니다.”

“아, 그럼 저보다 한살 어리군요.”

2020년 5월 11일, 산서성 대동 방성신촌에서 습근평 총서기는 촌민 백고산 집 온돌에 앉아 마을사람들과 담소를 나누었는데 누구보다 친근감이 느껴졌다.

2020년 5월 11일, 습근평은 산서성 대동시 운주구 서평진 방성신촌에서 이주민 백고산 가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황토지에서 중남해에 이르기까지 습근평은 몇십년동안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정방문을 하면서 대중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장면은 군중들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있다.

20세기 80년대 자신의 집에서 습근평을 접대했던 한 농민은 “농촌에 내려와 시찰하던 많은 간부들은 내가 내놓은 차를 마시지 못했는데 습근평동지는 차잔을 들고 마셨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무척 감동되여 모두 그에게 속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습근평은 부친 습중훈처럼 모든 것은 대중을 위하고 모든 것을 대중에게 의지하며 대중속에서 나와 다시 대중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군중로선을 시종 견지하고 있다. 습중훈과 교제한 적이 있는 미국학자 리돈백은 다음과 같이 회억했다.

“그는 어디를 가도 마을마다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 사람을 만나면 당신 부인의 병은 나았는가고 물어보고 저 사람을 만나면 당신 아버지 허리는 괜찮았는가고 문안했다.”

1980년 8월말부터 9월초까지 습중훈 (왼쪽 첫번째)이 광동성 담강의 농촌을 시찰할 때 청년들과 친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

습중훈은 “지도간부와 군중은 평등하고 고저귀천의 구분이 없으며 영원히 인민군중 속에서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안에서, 광동에서, 농촌에서, 공장에서… 훌륭한 공산당원 습중훈은 언제나 군중속에 함께 있으면서 훈훈한 마음으로 담소를 나누었다.

습근평은 부친의 작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는 “어떤 당원이나 간부도 인민을 위해 봉사할 책임과 의무가 있을 뿐이지 관리가 되어 나으리가 될 권리는 없다”고 말했다.

섬서성 량가하에 편입되였을 때 그는 문맹퇴치반을 꾸려 마을사람들에게 독서와 글을 가르쳤는가 하면 하북성 정정에서 사업할 때 그는 농민들을 위해 년간 량곡수매량을 감면하도록 쟁취해주었다. 또 복건성 복주에서 정무를 주관할 때 그는 만가(万家)를 방문해 만가의 사정을 알고 만가의 근심을 풀어주며 만가의 일을 해결하자'며 이를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당과 국가의 지도자가 된 후 “당신의 어떻게 호칭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나는 인민의 심부름군”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습근평은 이 길을 걸어온 그런 부친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대중들과 밀접히 접촉해야 하는가’를 자세히 배웠다.

조사연구를 중시

1978년, 65세의 습중훈은 남하하여 광동의 정무를 주관하였다.

북방에서 몇십년을 생활한 습중훈은 남방의 습하고 무더운 기후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7, 8월 사이에 그는 뙤약볕을 무릅쓰고 광동 동부의 매현, 산두, 혜양 세 지역의 21개 현을 련이어 시찰했다. 당시 청화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습근평은 여름방학을 리용하여 광동에서 사회실천활동에 참가하면서 부친을 따라 시골로 내려왔다.

1978년 8월, 습중훈 (왼쪽에서 세번째)이 광동성 혜양의 농촌에서 조사연구를 하고 있다. 습근평 (왼쪽 첫번째)이 여름방학을 리용해 부친을 따라 농촌에 내려가 사회실천활동에 참가하고 있는 장면

습중훈은 일관되게 조사연구를 중시하고 ‘관아문’을 벗어나 군중에 심입하고 실제에 심입하며 대중을 통해 가장 적절하고 가장 진실하며 가장 정확한 방법을 찾았다.

부친의 이런 사업방식을 항상 보고 듣다보니 습근평은 어느새 습관이 되여있었다.

정정에서 사업하는 1000여일 동안 그는 전 현의 25개 공사와 221개 대대를 돌아보았다. 처음 절강에 온 후 그는 매일 근무시간이 12시간 이상이였고 기층에서의 조사연구 시간이 그의 유효근무일의 40% 이상을 차지하였다 … 그는 “조사연구를 많이 하고 기층을 깊고도 철저하게 돌아보면 우리의 능력이 커지고 우리의 인식에 비약이 생기게 되며 우리의 사업도 더욱 잘 해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2020년 11월 3일, ‘14차 5개년’ 계획 <건의> 전문을 공포했다. 심원한 력사적의의가 있는 이 문건은 습근평 총서기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완성되였다. 이것을 위해 그는 길림, 안휘, 호남, 광동 등 지역을 시찰하고 조사연구했으며 7차례나 특별 좌담회를 소집했다 …… 그는 “조사 없이는 발언권도 없을 뿐더러 의사결정권은 더 없다”고 말했다.

2020년 9월 17일, 습근평은 호남대학 악록서원에서 고찰시 조사연구를 통해 인재양성, 문화전승 등 상황을 파악했다.

18차 당대회 이래, 깊은 산속에 들어가 빈곤층을 방문하고 흑토지를 밟으며 량곡생산을 살피며 기업생산 일선에 내려가 생산작업 상황을 살피고 피해군중 이전안치소에 가서 생산과 생활 회복 상황을 등을 알아보았다……습근평 총서기는 솔선수범하여 전당이 조사연구의 기풍을 크게 일으키도록 추진했다.

근검절약 엄격히 실행

습근평은 부친으로부터 근검절약의 품성을 배웠다.

“우리가 평소에 입던 옷은 더덕더덕 기운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었고 늘 형제자매의 옷을 입었다……”

습근평은 일찍 중앙텔레비죤방송국 ‘동방시공’ 프로그람 특별인터뷰에서 이렇게 동년생활을 회억했다.

습중훈의 검소성은 거의 가혹할 정도로 그와 그의 부인 제심동지의 가정교육은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 가족들과 밥을 먹을 때 그는 큰 소리로 <민농(悯农)>을 읊조렸고 식탁에 둘러앉은 아이들도 “봄에 한 알의 곡식을 심으면 가을에 만 알의 씨를 거둔다. 세상에 황폐한 밭은 없으며 고생하는 농민들은 여전히 굶어죽는 것을 근심한다”라고 애된 얼굴로 화답하였다. 습중훈은 부주의로 밥상에 떨어뜨린 밥풀이라도 조금도 랑비하지 않았다.

1958년 습중훈이 아들 습근평, 습원평과 함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습근평은 어려서부터 근검절약하는 습관을 키웠다.

“그의 집 거실에는 텔레비죤이 없었고 낡은 소파 몇개가 전부였다.”

습근평과 정정에서 함께 사업했던 왕유휘는 1983년 습근평의 집안을 방문했는데 그는 수년 후 “나는 그때서야 검소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였다”고 회고했다.

습근평 총서기는 근년에 지방에 가서 고찰하면서 지방의 부담을 덜기 위해 여러차례 특별렬차에서 눈을 붙이거나 밤을 보내는 등 접대표준을 낮추었다. 출국방문활동에 대해 그는 대표단의 호텔 투숙일 수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절약할 수 있는 것은 절약하고 랑비하지 말며 숙소는 호화스럽지 말고 깨끗하고 편안하면 된다고 여러번 지시하였다.

검소하고 사치하지 않는 것은 우리 당의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가보이다. 지금은 우리의 생활조건이 좋아졌지만 간고분투하는 정신이 없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검소함으로 수양을 쌓고 검소함으로 사업을 발전시키는 원칙을 견지해야 하며 엄격히 절약하고 근검하게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 총서기는 이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습근평 일가 세식구가 습중훈과 함께

본보기의 힘은 무궁무진하다. 부친의 일언일행은 습근평에게 어떻게 하면 인민에게 유익한 순수한 사람이 될 것인가를 가르쳐주었다. 군중로선, 조사연구, 근검절약……이런 백년 대당의 대대로 물려내려온 가보는 습중훈과 습근평 두 세대 공산당원의 계승, 전승이고 고양이기도 하다.

출처: 중앙텔레비죤라지오방송국 (편역: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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