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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새 터전 새 삶 찾아 》순방일지6 (청도-일조-상해)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9-10-20 16:40:25 ] 클릭: [ ]

10월 5일, 연길에서 함께 떠났던 전광훈씨가 불시로 몸에 열이 오르고 머리가 아파 이틀동안 휴식했지만 낫지 않아 귀가결정을 내렸다. 신종플루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시기라 병원에 갔다가는 보름씩 격리관찰될 가능성이 크다는것이 주요한 원인이였다.

하여간 둘이서 하던 일을 혼자서 하게 되였다. 일정안배가 주밀하지 못한데다 조선족집거지가 연변처럼 집중되지 못하다보니 여기저기 헤매도 시간랑비가 많고 예상했던 결과를 얻지 못할때가 많았다.

중복되는 내용을 피하려고 청도에서는 기업인들보다 일반인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열심히 일하지만 그냥 힘들게 사는 분들도 있었고 금방 시작한 분들도 있었다. 일일히 기사에 담을수 없었음을 일지를 통해 알려드리고 싶다.

차창밖으로 건설중인 청황대교가 바라보인다.

15일로 예상되였던 일조행이 16일에야 이루어졌다. 4~5년전까지만 해도 5천명을 웃돌던 조선족이 천여명도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화로 들었지만 그래도 들려서 알아보는것이 일조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이나 독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사방구에 위치한 청도장도뻐스역을 떠나 동삼고속도로를 따라 189키로메터를 달려 일조에 도착한것은 오후 3시경, 화룡 서성 태생인 리정섭(27)씨가 일하는 회사에 도착하느라 다시 약 반시간이 소요되였다. 신분증을 출시하고 방문허가를 받아서야 그가 일하는 공장까지 갈수 있었다. 한창 일하던 리정섭씨가 상사로부터 허락을 받고 나와 맞아주었고 그의 안내로 일하는 현장을 돌아볼수 있었다. 회사측의 요구에 따라 일하는 현장은 사진을 찍을수 없었다.

45명 조선족들이 일하고있는 일조시 현대위아회사

2층에 위치한 널찍하고 깨끗한 사무실은 설계, 생산지원 등 여러부문으로 나뉘여있었고 물뿌린듯 조용한 가운데 가담가담 컴퓨터마우스로 클릭하고 자판을 치는 소리만 들린다. 리정섭씨가 여기서는 무엇을 설계하고 여기서는 무엇을 한다고 설명을 해주었지만 문외한이라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였다. 기나긴 사무실구역을 지나 다시 1층에 내려오니 생산차간이였다. 넓이 50여메터 길이 100여메터 되는 큰 차간에서 일하는 사람은 불과 20여명, 할일이 많고 대부분 기술자들이기에 어슬렁거리는 사람은 보기 어렵다는것이 리정섭씨의 설명이다. 여기에는 조선족 몇이 있고 저기에는 조선족이 몇이 있다고 일일히 설명해주었지만 머리속에 남지 않아서 공장밖에 나와 다시 물어서야 조선족이 45명이나 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22일에 금형공장 준공식이 있게 된다고 한다. 마침 준공식준비로 밖에서 일을 보던 리우칠(한국인)과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다. 기자는 여기 방문한 사연을 이야기하고 회사정황과 여기서 근무하는 조선족들의 정황을 알아 보았다.

리우칠과장은 현대위아에서 500억원(한화)을 투자하여 지난 1월에 착공한 금형공장은 22일에 준공식을 하게 되며 주로 각종 자동차의 판넬과 그 부품을 만들기 위한 금형을 제작하는 금형회사라고 소개해주면서 회사에 근무하는 조선족들은 회사에 온 시간은 부동하지만 모두들 열심히 하고 있어 보기좋다고 말하는것이였다. 그는 조선족직원들은 일할때 한국에서 온 기술자들로부터 배우고 다시 한족직원들에게 전달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기술을 자기것으로 만들어 한국기술자들로부터도 인정받고 또 한족직원들로부터도 인정을 받는 그런 사람으로 될것을 바랐다.

원래 회사일이 많아 저녁 7시까지 잔업을 하게 되였지만 기자의 방문때문에 리과장은 리정섭씨를 5시에 퇴근시켰다.

리씨는 일조에 온지는 석달밖에 안되였고 나이도 어렸지만 관내경력은 5년이란다. 연길 모 직업고중을 졸업하고 삼촌의 회사에서 일을 방조하다가 청도에 들어온것은 2004년, 황도개발구에서 악세사리를 전문 생산하는 한국 모 회사에 5년간 근무하면서 개발팀의 중층간부로 인정받았지만 금융위기로 회사가 흔들리자 회의를 느끼고 큰 회사를 물색하였다는것이 리씨의 설명이다.

그사이 장가가고 3살되는 아들까지 본 리씨는 일조의 조선족사회정황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면서 저녁 7시가 되자 회사에 근무하는 친구들을 불러 기자와 대면시켰다. 녕안 태생인 림명복(29), 룡정 유신태생인 박걸남(28), 연길 태생인 엄호(24) 등은 리씨보다 한발 앞써 이 회사에 온 회사원들이였다. 연변대학 기계학부를 졸업하고 금방 취직한 엄호를 빼고는 관내진출경력이 꽤 오래된 친구들이였다. 천진, 청도 등지에서 회사원으로 근무한 림명복씨와 상해에서 금형설계를 한 경력이 있는 박걸남씨가 여기로 오게 된 목적은 모두 리씨와 비슷했고 회사적응이 비교적 빨랐단다. 하지만 대학졸업후 인터넷으로 배운 지식과 알맞는 직업을 찾다가 면접을 거쳐 입사한 엄호씨는 관내행이나 한국회사입문이 처음이라 적응되기 어려워했다.

이튿날은 토요일이였지만 그들은 일하러 나갔고 낯선 일조땅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없는 기자는 그들의 말대로 조선족가게가 꽤 있다는 해빈3로를 향해 떠났다. 천진로를 따라 한창 걸어가니 해빈5로가 나오고 4로, 3로가 차례로 나온다. 3로 어귀에 신궁클럽이라는 조선글이 보이기에 거기에 대고 샤타를 눌렀다. 전화번호대로 전화를 걸었더니 사장이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다.

일조경제개발구가 멀리 바라보인다.

조일남사장을 만난것은 약 3분후, 흑룡강 계서태생인 조일남(35)씨는 눈에 정기가 돌고 하는 말 마디마다 조리정연한 사람이였다. 알아보니 신궁클럽은 일조에서 조선족도우미가 있는 유일한 조선족노래방, 개업한지는 1개월도 되지 않았지만 영업이 잘되는 노래방이란다. 일조항구에 배가 운항을 정지하면서 한국인들과 한국회사들이 줄어들고 조선족들도 대거 철퇴한 이런 시기에 80만원을 투자하여 노래방을 개업한 목적에 대해 알아봤더니 시장이란 다른 사람이 개척하는것이 아니고 바로 자기가 개척하는것이 아닌가고 되묻는다.  

그의 말을 들으면 리해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일조항에 배가 다시 뜨면 한국사람들이 올것이고 또다시 조선족들이 올것이란다. 1985년에 현급시로, 1989년 6월에 지구급시로 된 일조시는 현재 동항구, 거현, 오련현, 란산구, 일조개발구, 산해천지관광구의 6개가두, 46개 향진 284만인구를 가진 나어린 도시다. 하지만 그 지리적위치와 우혜정책 등 조건은 청도나 위해, 연태와 다름없다고 한다. 신궁클럽외에도 목단강에서 온 리용희씨가 차린 재일식당이 영업중이였고 우리글 간판을 달았지만 이미 문을닫은 가게도 여기저기 보였다.

일조에서 2일간 머물고 18일 오전 10시에 상해행 고속뻐스에 몸을 실었다. 2004년 1월 1일에 정식으로 개통된 동삼고속도로를 달리며 기자는 중국이란 대국의 패기를 가슴속에 느낄수 있었다. 흑룡강 동강으로부터 해남도 삼아에 이르는 동삼고속도로는 길이가 5700키로메터인데 일조-상해구간은 680키로메터, 8시간반가량 달려 상해남역에 도착하였다.

동삼고속도로에서 내다본 소북평원은 그냥 황금물결이다. 동북지방은 늦가을일텐데...

저앞으로 총길이 32.4키로메터, 최고높이 300메터의 소통대교가 펼쳐진다.

600키로메터를 달려온 뻐스앞에 다가온 소통대교.

뻐스에 올라서 핸드폰문자로 연락한 후배가 반갑게 마중을 나와 있었다. 상해에 온지 6년이 되는 교사시절 후배다. 조양천1중에 있다가 23살 어린 나이로 하해, 물덤벙술덤벙 가시밭길을 걸어온 후배가 6년전의 애숭이로부터 훌쩍 커버렸음을 그의 일거일동에서 느낄수 있었다.

상해의 거리는 국경절분위기가 여전하다.

신장에서 하루밤 묵고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고있다는 민행구 룽바이(龙柏룡백)로 자리를 옮기느라 하루를 소비했다. 취재일정을 빽빽하게 잡고 약 5일간 상해조선족사회를 들여다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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