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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새 터전 새 삶 찾아 》순방일지7 (상해-이오)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9-10-26 10:41:39 ] 클릭: [ ]

상해에 대하여

상해 중환로에서 바라본 상해일각

중국 4개 직할시중의 하나인 상해시는 중국 최대 도시다. 6,340.5평방키로메터의 면적에 1888.46만의 인구를 가진 상해시는 18개구와 1개현을 관할한다. 상해는 우리나라 대륙해안선 중부의 장강입구에 위치하여있는데 중국최대의 공업기지와 최대의 대외무역항구를 가지고 있다. 현재 2000만을 초과하는 인구가 상해지역에 거주하고있는데 강절(강소,절강)계가 대부분이고 상해말(오어태호편방언)을 위주로 쓴다.

자그마한 어촌이였던 상해는 1842년 《남경조약》체결후 중국의 대외무역항구로 되면서 동서방무역교류중심으로 신속하게 발전했다. 20세기 30년대에 상해는 다국적기업들의 무역과 상무 중심으로 아태지역에서 제일 번화한 상업도시로 발돋움하였는데 《동방의 빠리》로 불리였다. 1949년 건국후 외국인과 다국적기업들이 떠나버린 상해는 몰락의 일로를 걷다가 개혁개방이후 다시 활기를 띠고 신속한 발전을 가져온다. 90년대에 다시 중국 최대의 경제중심도시와 세계 최대의 무역항구도시로 된다.

상해중환로에서 바라본 놀이공원

오늘날의 상해는 중국의 과학기술, 무역, 금융과 정보중심일뿐만아니라 국제금융중심과 항운중심으로 되였고 명년에는 《2010상해엑스포》를 개최하게 된다.

룡백구(룽바이)부근의 자등로 일각

개혁개방후 고향을 떠나 상해로 온 조선족들은 민행구 룡백(룽바이)구역과 오중로부근에 집중되여 오붓한 조선족동네를 이루고 있으며 기타 17개구 1개현 그 어느 곳에서든 조선족의 발자취와 숨소리는 다 찾아볼수 있을 정도로 침투되여 뿌리를 내리고 있다.

상해와 조선족

상해와 조선족의 인연은 남다르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 대한민국림시정부가 상해에 있을 당시에 벌써 상해는 조선족의 활동중심의 하나였다. 상해를 무대로 한 우리민족 력사의 발자취는 우리가 책이나 영화를 통해 많이 알고 있는바다.

50년대 중국정부의 조선지원 일환으로 수백명의 조선로동자들이 상해에 와서 방직, 무선전 등 기술을 배우게 되였다. 언어소통을 위해 동북지구에서 120명의 혈기왕성한 조선족전문가들을 뽑아 상해에 파견하여 통역과 학습을 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해방후 첫패의 상해진출조선족이란다. 학습완료후 조선의 로동자들이 륙속 귀국하자 대부분의 조선족 통역일군들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중 30여명의 재능있고 전도유망한 전문가들은 상해에 남아 상해시 각 분야에 배치되였다. 그들이 바로 오늘의 상해조선족사회의 원로들인데 그들가운데서 반수는 아직도 생존해있으며 그들의 자녀들은 상해태생의 첫 조선족으로 되였다.

60년대 상해시의 일부 대학들에서 조선족학생들이 공부하면서 상해 조선족사회가 생기를 띠는듯하였으나 문화대혁명으로 대부분이 돌아갔고 대학입시가 회복된 77년을 계기로 상해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화룡태생인 상해복단대학 국제문제전문가 박창근교수 

중한수교가 이루어진 1992년까지 상해시 호적등록 조선족은 730여명이였다. 중한수교후 한국기업들이 상해에 대거 들어오면서 상해의 조선족수는 기하학적으로 불어났다. 이시기 과학기술분야와 정치분야 위주이던 상해조선족사회구도가 2차산업과 3차산업분야로 확대된다. 계통학과 한국학을 연구하는 상해복단대학 국제문제연구원 박창근(62)교수에 따르면 중한수교이후 상해에 온 조선족가운데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은데 기회의 도시 상해가 그들의 활무대로 되였단다.

인공지구위성학자출신으로 선뜻 하해하여 자유중개인으로 된 김민달회장

중국 최초 인공지구위성인 《동방홍》총체설계연구를 하였고 후에는 자유인으로 거듭나 한중간의 다리역할을 수두룩히 해온 김민달(69)회장은 슬기롭고 근면한 조선족은 한국기업의 중국진출에서 가교작용을 하면서 자기로서의 독특한 촉각으로 국내와 국제무역에 눈길을 돌렸고 훌륭하게 자리매김했다고 말한다. 그는 연변조선족자치주나 중앙부서에서 사업하는 조선족간부들이 조선족사회문제에 조금만 관심을 더 돌린다면 화동지역의 조선족사회가 더욱 발전장대해질수 있다고 말하면서 요즘 교회에 접수되나 다름없는 조선족사회일반에 대해 근심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상해조선족사회가 창조한 경제적부는 믿기 어려울정도로 어마어마하다. 그 내면에는 한국의 선진적인 기술과 경험, 그리고 상해라는 경제, 금융, 무역의 중심도시, 조선족의 언어우세와 근면, 대담성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다.

상해의 서성사람들

상해에서 백만원이상의 부를 창조한 사람은 부지기수다. 화룡시 서성태생인 송춘화(가명)양은 단돈 500원을 들고 상해로 온 19세의 담찬 소녀였다. 상해에 와서 처음에는 닥치는대로 양말도 팔고 브래지어도 팔고 하면서 열심히 돈을 모았다고 한다. 사람이 많은 상해에서 그런 장사를 해도 월 3000원씩은 벌게 되더란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부동산회사들에서 조선족직원을 모집하게 되였고 송춘화는 삐여난 미모와 장사를 하면서 는 언어실력으로 부동산업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처음 30만원을 벌기 힘들지만 돈이 돈을 버는 상해에서 돈모으기는 정말 식은죽먹기라》고 말한다. 부동산회사에 근무하면서 여기저기서 모은 27만원으로 구입한 집이 5년만에 160여만원에 처분되면서 백만원꿈이 이루어지고 그돈이 다시 부동산에 투입되면서 눈덩이굴리듯 커가더란다.

연길에 홀로 있던 어머니를 3년전에 상해에 모셔왔고 심심해하는 어머니한테 민박을 경영하게끔 집도 두채 장만해주었다. 《영숙민박》이라 이름한 민박은 연변처럼 간판을 내걸지도 않았지만 손님이 너무 많아 하루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빈방이 없을 정도다. 룽바이에 왔다가 술마시고 밤에 돌아갈수 없는 사람, 친구한테 놀러온 사람, 한국에서 온 관광객 하여간 자그마한 민박은 문쪽에 불이 날지경이다.  

송춘화양의 어머니가 차린 영숙민박 손님방

《처음에는 울음이 나올 지경으로 어려웠어요.》 2002년에 가흥에서 노래방을 경영하는 형의 친구를 도와주기 위해 3000원을 들고 관내에 진출한 최광원(33)씨는 이렇게 말하면서 기회가 바로 재부라고 말한다. 가흥에 온지 1년도 안되여 노래방이 문을 닫자 오갈데없게 된 그는 안해와 더불어 친구들의 집에 얹혀 살면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 모습으로 고향에 갈수 없었고 부모들을 대하기 싫었다. 다행히 안해가 한국기업에 출근하게 되였고 800원씩 받는 로임으로 간신이 생계를 유지할수 있었단다. 친구들이 한국회사를 소개해주어 소주, 무석, 상해 등지로 자리를 옮겨 다니며 직장생활을 하려하였으나 번마다 한달을 견지하지 못하겠더란다. 성격이나 습관상 한국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것이 가장 큰 원인이였다.

그러던중 우연한 기회에 한국 부산에서 온 조명업체사장을 만나고 쭈욱 5년간 그 회사의 중국측 대리로 업무를 보게 되였단다. 한국에서 오다를 보내면 중국의 공장들에 넘겨주고 완성되면 한국에 보내는일인데 일은 간단하지만 책임성이 수요되는 일이였다. 강한 책임심으로 열심히 일한 덕분에 상해에 집(시가 120만원)도 장만할수 있었고 자가용도 굴리게 되였다. 현재 친구와 합자하여 자동차미용업을 준비중이라고 말한다.

행복이 넘치는 최광원씨네 일가

김철(32)씨 역시 상해진출 경력은 10년이 넘는 친구다. 한국기업에서 근무하면서 무역을 배웠고 지금은 상해한원기전설비유한회사를 설립하고 한국에서 플라스틱자재를 들여다가 국내에 공급하고 있다.

《상해는 기회의 도시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기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 기회란것이 멍하니 앉아있는 사람들에겐 주어지지 않는답니다. 사실 대학교문부근에도 가보지 못한 제가 연길에 있었더라면 무엇이 되였겠어요?》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무슨 일을 하나 꼼꼼한 김철은 오늘의 자기를 두고 상해에 보내준 부모님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제가 세집살이를 한다고 한국에 가서 번 돈을 모두 보내주었어요.》 지금은 그 집이 집을 낳아서 두채로 되였단다.

중국의 건축자재시장은 엄청 큰데 거기에 수요되는 플라스틱자재 또한 놀라운 수자란다. 국산보다 질량이 좋은 한국산을 선호하는 중국건축시장을 노린 전도유망한 사업이 아닐수 없다.

상해남역까지 기자를 바래다준 김철씨.

상해에서 첫걸음마를 뗀 햇내기들

화룡태생인 김해연과 박해연은 갓 대학을 졸업한 24세의 처녀들이다. 《가끔 연길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한답니다.》 박해연이 이렇게 말하자 3개월 먼저 상해에 왔다는 김해연이 까박을 준다. 《처음에는 같이 다니기가 부끄러웠어요. 어찌나 와~와~ 하고 환성을 지르는지.》

장춘대학을 졸업한 김해연은 현재 모 한국회사에서 근무하는데 월 2400여원씩 받고 있으며 연변대학예술학원을 졸업한 박해연은 려행사에서 가이드일을 보고 있단다.

아직도 부모들이 보낸 돈을 쓰는가고 물었더니 둘은 《아니요.》하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우리를 위해 그분들이 이때까지 고생했는데 대학을 졸업한 지금에도 고생시켜서야 되겠어요?》 두 해연의 꿈은 열심히 일하고 사업에서 성공하여 부모님들에게 보답하는것이란다. 《지금은 시작이여서 웅대한 포부는 말하기 어렵지만 상해에서 꼭 성공할것입니다.》 둘의 견정한 결심이다.

18일에 상해에 도착하여 조양천1중시절의 후배도움으로 행장을 풀고 다시 조선족집거구인 룽바이(룡백)에 옮겨서 7일간 상해에 있으면서 대학교교수(학자), 조선족녀성기업인회, 회사원, 기업인, 작은 나눔으로 진한 사랑을 만들어가는 등불회와 주변의 인맥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상해에서 기자의 취재에 큰 도움을 준 등불회 송명한회장과 후배들, 그리고 16년만에 어엿한 모습으로 고맙게 나타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세계최대 소상품집산지 의오시에 대하여

25일, 오전 10시 50분에 발차한 상해-의오행 뻐스를 타고 7일간 머문 기회와 꿈의 도시 상해를 떠나면서 이번에 도착하게 되는 의오는 어떤 도시이고 또 그곳에서 삶의 터전을 닦고 살아가는 조선족들은 어떤 모습일가를 머리속에 그려보았다.

절강성중부에 위치한 의오시는 유엔과 세계은행 등 국제권위기구들에서 확정한 세계 최대 소상품집산시장으로 1105.46평방킬로메터의 면적에 200만인구(시구역상주인구 118.5만/호적인구 74만)를 가진 초대형 현급시이다. 의오시 관할구역에는 16개진 5개향이 있다.

1995년에 설립된 중국국제소상품박람회(의박회)는 목전 국무원에서 비준한 유일한 일용소비품류 세계적인 전람회이다. 《닥털로 사탕바꾸기》라는 전형적인 경상정신문화를 자랑하는 의오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의오간부들은 선견지명이 없지만 의오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이렇게 《흥상건시》전략적기치를 내걸고 시장을 만들고 발전시키고 승급시키는것으로 공업화, 국제화와 도시농촌 일체화를 추진하여 자기절로 부유의 길을 걷는 특색도시에 조선족이 하나둘 발길을 돌리기 시작한것은 개혁개방이후부터다. 불확실한 통계에 의하면 의오시에 조선족이 가장 많았을때는 2만 5000여명이, 현재는 약 2만여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강남구역에는 조선족유치원도 있고 조선족가게들도 많다고 한다.

의오 강남구역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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