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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구시하고 청렴했던 당간부

편집/기자: [ 김정애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1-05-12 12:33:51 ] 클릭: [ ]

연변 전임 부주장 남명학과의 하루를 회고한다

오늘따라 내가 존중해오던 거의 40년전의 남명학부주장이 머리속에 떠오른다.

1973년, 내가 대대의 과학실험소조에서 일할 때였다. 그때 우리 대대에도 주에서 공작대들이 내려와 있었는데 당시 주당위 선전부 리휘부장이 우리 공사에 온 공작대의 총 책임자로 우리 대대에 와있었다.

그해 여름의 어느날, 리휘부장은 대대의 공작대원들을 거느리고 우리 실험전에 와서 콩기음을 매였다. 그날 오전, 우리가 한창 기음을 매고있는데 찦차 한대가 밭머리에 와 멈췄다. 지금은 찦차라면 보잘것없는 차이지만 그때 세월에는 찦차라면 현급 이상의 간부들이 타고다니는 차였기에 찦차 한대 지나가도 모두 그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던 시절이였다. 그런데 우리 밭머리에 와서 서다니. 우리는 모두 서서 그 차를 보고있는데 한 늙은이가 차에서 내리고 리휘부장이 마중나가 그와 반가이 악수를 하는것이였다. 나는 틀림없이 주의 간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리휘부장이 우리에게 이분이 주정부 남명학부주장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남명학이란 분이 주정부 부주장이라는것은 알고있었지만 한번도 만나본적은 없었다. 그런데 남명학부주장이라고 하니 내 마음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의 옷차림새나 모든 행동거지를 보면 주의 간부다운데는 한곳도 없이 보통 백성과 같아보였다.

그때 우리 실험소조에는 로농 한분이 계셨는데 남명학부주장께서는 인사가 끝나자 자기가 왔기에 일에 지장을 준다며 그 로농의 호미를 앗아쥐고 자기부터 엎드려 기음을 매는것이였다. 그의 기음솜씨는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쉼시간에 우리는 남주장을 에워싸고 둘러앉았는데 그는 노래 한수씩 부르며 즐겁게 쉬자고 했다. 그때는 지정된 몇수의 혁명가요만 부르는 시절이라 모두 혁명가요 한수씩 불렀다. 그 자리에서 누가 이번에는 남주장님의 노래를 들어보자고 하였다. 남주장은 기다렸다는듯 인차 일어나 《여보시오 농부님네 이내 한말 들어보소》하며 노래 첫마디를 떼였는데 《농부가》였다. 모두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자 《왜 이 노래가 나쁜가? 농부의 소박하고 랑만적인 마음을 담은 노래인데 왜 못 부르겠는가?》하며 끝까지 불렀다. 그러자 모두《야, 듣기 좋은 노래다》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내가 《지금 이런 노래를 불러 됩니까?》 하고 묻자 《이 노래가 우리 조선족의 민요인데 왜 자기 민족의 민요도 못 부르겠습니까?》라고 하시는것이였다.

이어 《농사철에 대해서는 로농들이 더 잘 알고있으니 상급의 지시라고 하여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고 로농들의 말을 들어야 하오》, 《조이홰지는 곡우를 끼고 해야 하고 콩갈이는 립하를 끼고 하면 되오》라고 하며 곁에 앉은 로농을 보고 《로인님 제 말이 맞나요?》라고 물으셨다.

로농이 《글쎄 말씀입니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상급에서 어찌나 일찍 파종하라고 하는지 우리는 리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남주장께서는 《지금은 군대대표요, 반란파대표요 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올라앉아 맹목적으로 지휘한다니까.》라고 하며 우리에게 앞으로 로농들을 존중하고 로농들의 말씀을 잘 들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는 《자, 또 한 쉼 매여봅시다.》하며 호미를 들고 일어나 선줄로 나가시는것이였다.

점심때가 되자 공작대원들은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였는데 불시에 닥친 일이라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우리 지방은 한전고장이라 그 시절에는 입쌀 한줌도 없어 그저 조밥을 대접하였다.

남명학부주장은 오후에도 계속 나가 농민들과 함께 기음을 매고 하루 밤 우리 집에서 묵을 타산이였다.

그런데 우리로 놓고 말하면 저녁식사 대접이 문제였다. 어떻게 저녁에 또 조밥만 대접하겠는가? 농촌이라 어디에 가서 돼지고기도 사올 형편이 못되였다. 그렇다고 돼지를 잡아엎을수도 없었다. 그래서 실험소조의 조장은 우리 어머니더러 저녁에 두부를 앗아 대접하자고 했다.

쟁글쟁글 끓는 뙤약볕에서 남주장은 우리와 같이 온 하루 일하고 저녁에 해가 넘어가서야 집으로 들어오셨다. 조장이 나를 시켜 술을 사오려는것을 눈치 챈 남주장께서는 자기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나에게 주면서 이 돈으로 술을 사오라는것이였다. 내가 한사코 받지 않으려 하자 그이께서는 호미자루로 나의 엉뎅이를 때리면서 《왜 小朱 내 말을 안들어?》 하면서 기어이 그 돈으로 술을 사오라고 하시는것이였다.

남주장님으로부터 호미자루에 엉덩이를 한매 얻어맞은 나는 그 한매가 얼마나 기쁘고 좋았던지 모른다. 나는 그런 매라면 자꾸만 맞고싶었다.

저녁식사때 조장이 《남주장께서 모처럼 우리 실험전에 오셔서 온 하루 이렇게 수고를 하셨는데 우리 농촌에는 아무것도 대접할것이 없습니다. 저녁에 두부를 준비하였는데 서거픈(소박한) 음식이지만 많이 잡수십시요》라고 말하자 남주장께서는 《두부만치 좋은 음식이 어디에 있소. 자 어서 가져오오. 그럼 오늘 농촌아주머니가 직접 앗은 두부를 먹어보지》라고 말씀하시며 술잔을 들고 《자, 우리 함께 한잔 들어봅시다》하며 음식상의 기분을 돋구었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다른 사람들은 다 가고 남주장님과 비서, 그리고 리휘부장이 남아서 우리 집에서 주무시게 되였다. 사실 그날 남주장께서는 사업토론을 하려고 리휘부장을 찾아왔었는데 리휘부장이 공작대를 거느리고 우리 실험전에 와서 기음을 매자 그이도 우리와 함께 온 하루 일하시고 저녁에 리휘부장과 사업토론을 하시는것이였다.

사업토론이 끝나자 나도 그 자리에 끼여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이가 리휘부장(한족)과 이야기를 할 때 한어를 아주 류창하게 하는것을 보고 어떻게 한어를 그렇게 류창하게 하시는가고 물었더니 어릴 때에 연길현 동성용의 한 한족지주의 머슴으로 들어가서 돼지를 먹이다가 후에 공산당을 만나 혁명에 참가하였다고 하셨다. 나는 그날 저녁에 그에게서 많은 혁명이야기를 들었다.

이튿날 아침식사가 끝나고 그들이 떠날 때 비서가 식비를 계산하여 내놓는것이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주장어른께서 여기에 오셔서 일하신것만 하여도 대단히 감사한 일인데 어떻게 식비를 받을수 있겠습니까?》 하며 한사코 받지 않았다.

며칠후 우리 어머니가 재봉기을 쓰려고 재봉기에 덮었던 보를 드니 그 밑에 식비명세표와 현금이 놓여있었다. 우리가 보지 않은 틈에 어느새 비서가 재봉기보를 들고 식비를 넣었던것이다.

그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도 감격되여 눈물까지 훔치였다.

/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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