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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천령에는 호랑이가 없었다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3-30 10:44:12 ] 클릭: [ ]

금슬좋은 리호천옹부부.

리호천옹은 83세의 고령에도 강파른 몸과 득달같은 성격은 변함이 없었다. 심장병때문에 매일병원을 오가는데도 홀로 오토바이를 타고 씽씽 다닌다. 

《호랑이는 아니구》 우편배달을 갔다가 호랑이를 만났다고 하던데 하는 물음에 리옹은 손을 홰홰 젓는다. 《덕신골에 범이 있을수 있는가? 그냥 승냥이무리였지!》

23살 한창 혈기방강한 청년 리호천은 왜소한 체구였지만 매일 백여근의 우편물을 메고 100리 길을 걸어다닐만큼 체력만은 왕성했다. 그날도 일을 마치고 금곡에서 석문촌으로 넘어오는데 노루꼬리만한 늦가을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어둠이 슬슬 깃들더란다. 무인지경의 령을 향해 발걸음을 재우치는데 이름할수 없는 두려움이 앞길을 가로막더란다. 멀리 령마루에 검은 그림자가 얼른거려 걸음을 뚝 멈추고 바라보니 개보다 좀 더 큰 짐승 서너마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에서는 퍼런 불이 뚝뚝 떨어지더란다. (에키, 호랑이구나!) 머리칼이 곤두섰다. 어렸을적 어른들이 범을 만나 소리를 낼수 없으면 손으로 머리를 빗어올리라던 말이 떠올라 머리를 빗어올렸지만 소리를 쳤는지는 지금도 기억할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그놈들이 굶지는 않았는가봐, 내가 돌멩이를 주어들고 쉴새없이 던졌더니 길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데.》 리옹은 60여년전의 그때를 회상하면서 후에 어르신들이 하는 말을 들어서야 범이 아닌 승냥이를 만났다는것을 알게 되였다고 설명한다.

광복을 맞았지만 째지게 가난한 가정형편때문에 리호천은 16살 먹던 1948년에야 연길현지신소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1952년 아버지가 일하다가 척추를 상하는 바람에 부득불 학업을 포기해야 했고 왜소한 체구때문에 덕신우전국의 배달원으로 되였다. 그는 7개 대대 49개 생산소대의 1500여 가구의 우편배달을 책임졌는데 매일 80여근, 잡지가 발행될때에는 100근도 넘어되는 우편물을 메고 11갈래 하천을 건너고 4개의 령을 넘으면서 왕복 100리길을 도보로 다녀야 했다.

《지금처럼 아스팔트길이였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진흙길에 비가 오면 신에 붙는 흙만해도 댓근은 더 되였지! 아예 맨발바람으로 걸어 다녔지, 한번은 깨진 병사리 쪼각을 밟고 아느새 고생한적도 있지. 허허허.》 그뿐만이 아니다. 배달길에 갑자기 내린 비때문에 골물이 불어 먼길을 에돌아가야 했던 일, 눈보라치는 령길에 올랐다가 눈에 메워진 골짜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두시간을 고생한 일…

리옹은 고생했던 일보다 재미있었던 이야기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많은 마을을 돌아다녀야 하고 먼거리를 다녀야 하다보니 신문 나누어주는 시간을 절약해야 했다. 그는 나팔을 들고 다니면서 마을어구에 도착하면 나팔을 불었다. 그러면 마을사람들이 기다리기라도 한듯 우편물을 받으러 달려나오군 하였다. 《해방군들의 기상나팔소리와 비슷하게 불었지. 나팔을 들고 다니면서 가장 좋은건 그래도 승냥이와 같은 짐승을 만나도 두렵지 않은것이였지.》 리옹의 얼굴에는 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나팔소리에 짐승들이 놀라 달아났다는것이다.

지금도 영동과 금곡사람들은 두 마을사이의 높은 령을 호천령이라 부른다. 청년 호천이가 우편물을 메고 매일 어김없이 넘나든 호천령, 이름없던 령에 사람들은 그의 이름자를 붙여 호천령이라 정답게 부른다.

그의 선진사적이 연변일보를 비롯한 여러 언론에 소개되고 그도 연길현청년사회주의 적극분자, 연길현우전국 1등 모범으로 당선되였다. 사업에 참가한지 4년만인 1956년에는 전국우전계통 선진생산자, 전국로동모범으로 되여 모주석과 당중앙위원들의 접견을 받는 영광을 지녔다.

젊었을 때의 리호천

호천이가 전국로동모범이 되자 길림성 우전관리국에서는 진흙길이 대부분인 덕신길에서 자전거를 타기 바쁜 점을 감안하여 1964년도에 그에게 말 한필을 장려하였다. 말을 타고 하는 신문배달은 매우 신사스런 일이였다. 하지만 신사배달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잠잘 때에도 서서 자는 까다로운 짐승인 말이 호천이와 함께 배달한지 얼마 안되여 잘 먹지도 않고 자주 드러눕었기때문이다. 말이 병이 들었다고 인정한 성우전관리국에서 다른 말을 바꾸어 주었지만 그 말도 마찬가지였다.

1956년 전국 우전계통 선진생산자대표대회에서 상으로 받은 호랑탄자.

마침 해방군들이 덕신향에 주둔하였었다. 말을 먹이는 전사를 찾아가 자기 말을 보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말이 메는 짐과 배달로정을 료해한 그는 말이 너무 지쳐서 그렇다고 확정적으로 대답하였다. 호천의 몸무게와 짐을 합하면 200근이 더 되고 왕복 100리를 매일 다녀야 하니 천리마도 지칠수밖에 없다는것이다. 하는수 없이 성우전국에서는 1966년에 말대신 오토바이를 내려보냈다. 《길림성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일한 향촌우편배달원은 아마 내가 첫사람일거야!》 리옹의 주름진 얼굴에 또다시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잠간이였다.

수많은 영예를 지닌 전국로동모범이였고 1960년에 장춘영화촬영소에서 그를 원형으로 《기러기》라는 예술영화까지 제작하여 그의 사적은 수억수천만의 중국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교육시켰지만 문화대혁명기간에는 《주덕해보황파》, 《류소기 가짜로동모범》, 《조선특무》 등 터무니없는 감투를 쓰고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는 각종 회의에 참가할 권리마저 박탈당하였다. 반란파들은 성우전국에서 장려로 준 오토바이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그는 남몰래 오토바이를 분해하여 금곡마을의 개인집에 감추어 두었고 그때문에 반란파들로부터 모진 매를 얻어맞아야 했다.

《1958년도에 입당한 나는 당의 부탁대로 인민을 위해 일하였을뿐이지요, 남들보다 더 잘했다면 남들보다 일하는 조건이 좀 특수했을뿐이지요. 나를 영웅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자신을 영웅이라고 생각한적이 단 한번도 없었수다. 퇴직후에도 전국로동모범이라는 리유로 조직이나 단위에 손을 내민적은 단 한번도 없구.》 1980년부터 룡정시우전국 부국장으로 사업하다가 50세가 되던 1982년에 퇴직한 그는 퇴직후에도 자진하여 10여년간 농촌의무배달원으로 신문잡지를 배달하면서 농민들을 위해 일하였다고 한다. 오랜 공산당원이고 로동모범인 그는 오직 당과 인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60년 1월 4일 신화사에서 발표한 리호천(오른쪽) 사진 (사진/류은태).

자식에게 일자리를 물려주기 위하여 일찍 퇴직한 리호천옹의 퇴직로임은 현재 3000원도 안된다. 무직업자인 안해에게 퇴직금이 없다보니 두 로인은 그 돈으로 만년을 보내야 한다. 생활이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리호천옹은 《이만하면 만족해야지요, 자식들도 생활비를 보태주는데 내가 나라에 손을 내밀어서야 되겠수? 로력모범이라는 사람이 나라 얼굴 깎지 말아야지.》하면서 자기 생활에 만족을 표시한다. 그는 10여년 전부터 오정묵의사가 무료로 병도 봐주고 약도 지어준다고 감사한 마음을 표시했고 2013년에는 연변주인대 차광철주임이 위문을 왔댔는데 신문에 《연변주인대주임 차광철 극빈 전국로력모범 리호천을 위문》했다는 기사가 나와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고 푸념도 하였다.

30여년을 하루와 같이 호천령과 팔도하를 넘나들면서 96만리(지구 12바퀴 거리)를 대장정한 농촌의 훌륭한 우편배달원 리호천, 빠듯한 퇴직금에도 만족한 인생을 살았다고 자신하는 83세 고령의 리호천옹, 전국로력모범의 광환에 파묻히지 않고 평범한 백성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로력모범의 모습을 찾아볼수 있었다.

호천령에는 애당초 호랑이가 없었고 인제는 승냥이조차 없어졌지만 청년 리호천의 힘찬 발걸음과 넉살 좋은 웃음소리만은 그냥 그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산이 되여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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