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73년만,항일투사의 넋 청명날 유가족과 “만난다”

편집/기자: [ 박명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3-30 16:06:04 ] 클릭: [ ]

《3․13》운동의 4명 령수중 한명인 김하규선생 묘소 20여년만에 끝내 찾아

중한 유가족들 조선문간행물을 통해 추적,《길림신문》보도 결정적단서 제공

조선문간행물을 펼쳐보이며 증조부 묘소를 찾은 이야기를 자총지종 설명하는 김윤동과 그의 부인

장춘의 퇴직로인 김윤동(78세)은 요즘 반일운동가인 증조부 김하규의 묘소를 찾았다. 증조부가 돌아간지 73년만이다. 지난 20여년간 묘소를 찾다못해 포기할 즈음에 룡정 《3.13》기념사업회 리광평회장의 도움으로 룡정 산속에서 찾을줄이야!

그는 《이번 청명부터는 자랑스러운 증조부님 묘소에 술잔을 올리게 되였다》고 너무 기뻐하며 《조선족유지인사들과 〈길림신문〉을 비롯한 조선문간행물 덕분에 일가족의 숙원을 이루었다》며 거듭 감사의 뜻을 표했다.

중학교때 처음 묘소 찾으라는 가족지시 받아

3월 28일, 김윤동로인은 집에서 양복에 넥타이차림으로 기자를 반겨주었다. 그동안 조선문간행물을 통해 수집정리한 자료를 펼쳐보이며 자신이 증조부를 찾게 된 사연을 자초지종 들려주었다.

김윤동은 한국 경북 울진군에서 자랐다. 다섯살 나던 해인 1942년 10월, 그는 밤중에 자다가 할머니가 깨우는 소리에 부시시 일어나 고향을 버리고 피난가는 부모를 따라 온 마을사람들과 함께 대구역에서 부산-심양행 국제렬차에 올랐다.

그렇게 중국에서 10년 세월이 흘렀다. 길림시조선족중학교를 다니던 김윤동은 어느 날 작은 할머니한테서 처음으로 그의 증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너의 증조할아버지는 일찍 중국에 들어왔단다. 나도 너의 증조할아버지를 따라 오긴 했는데 우리 가족은 중국에 와서 안도 명월에서 너의 증조할아버지를 한번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하루는 너의 증조할아버지가 밤중에 대부대를 이끌고 우리 마을에 내려왔는데 그날 밤으로 떠나면서 우리 가족들이 일본놈들에게 로출될 위험이 있으니 흩어져 살라고 명했다. 그래서 우리 친척들이 연변으로, 길림으로 흩어져 살게 된거야.》

그후 증조부는 일절 소식이 끊겼다가 오랜 시간이 흘러 돌아갔다는 전갈을 한번 받았단다. 작은 할머니는 김윤동에게 증조부가 큰 인물이라며 커서 꼭 그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라고 당부했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1989년, 김윤동은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때 삼촌이 그에게 또 인생숙제를 남겼다. 《너네 증조할아버지가 중국에서 독립혁명을 하시다 돌아갔으니 묘소를 찾아내 꼭 제사를 지내거라.》

김윤동은 족보, 호적부를 갖고 장춘에 돌아온다. 《김하규, 1942년 중국 앵목현 황지강자(鶯睦県 黄地強子)에서 사망》족보에 남긴 증조부의 정보는 이것뿐이였다.

앵목이란 현은 찾을 길이 없었다. 황지강자라는 곳을 찾아 김윤동은 연변 5개 현, 시와 길림성 산재지구인 서란, 교하, 영길, 반석, 화전을 샅샅이 돌다싶이하며 헤맸지만 모두 허사였다.

중한 간행물에서 증조부의 력사를 캐다

그러던 5년전, 김윤동은 장춘시조선족 단오행사장 한 구석에서 조선문도서전을 돌아보다가 어느 화책속의 사진 한장을 들여다 보고 두눈이 둥그래졌다.

사진제목은 《김하규씨의 장례식》 그 아래 《연변의 정신적지주이자 항일운동가, 묘소는 룡정 토성포에 있다.》고 씌여있었다.

김윤동은 날듯이 기뻤다. 이제는 작은 할머니, 아버지, 삼촌, 형의 유언대로 증조부 제사를 지낼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났다.

그는 장춘시조선족애청자애독자클럽 김수영회장과 화책을 출판한 민족출판사 우빈희사장의 안내로 화책 《중국조선족이주사》를 편저한 주성화와 련계를 지었다.

주성화는 그에게 증조부 김하규가 《3․13》운동에 참가한 연변의 정신적지주라고 전해주며 기타 서적들도 많이 보내주었다.

그러나 증조부가 룡정 토성포에 모셔져있다는 단서를 쥐고 룡정까지 찾아가 조선족사회단체 지도자들에게 여러 모로 묘소에 대해 문의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후부터 그는 《3․13》운동에 관한 보도나 서적만 보면 정신을 가다듬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길림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조선족》을 보고 그는 증조부 김하규가 한학가(漢学家)이고 《일본을 배척하고 민족독립사상이 있는 인사》이며 1908년 창립된 룡정 명동학교의 교원이였음을 알게 되였다.

또 한국에서 출판된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을 통해 김하규가 《손꼽힐만한 거유(巨儒)》이고 《꼿꼿한 실학자》였음을 알게 되였다. 책에서는 증조부의 묘소에 대해 《룡정 토성포 뒤산 룡정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모셨다》고 썼다. 작자 문영금은 김하규의 외손녀로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김하규의 넷째 딸)의 회고록을 엮은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묘소위치를 아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꼭 찾아야 하는데…김윤동은 기진맥진했다.

기념활동을 조직한 정부와 인민에게 감사

그러던 금년 3월 17일자 《길림신문》에서 《룡정 <3․13>반일운동 96주년 기념행사》란 기사를 보게 되였다. 기사에는 증조부 《김하규》에 대한 내용이 없었지만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전화부터 걸었다.

먼저 이 기사를 쓴 본사 김태국기자를 통해 룡정 《3.13》기념사업회 회장이며 전임 룡정시문화관 관장이였던 리광평과 련락이 닿았다. 리광평회장은 《김하규선생은 <3․13>운동 4명 령수중 한명》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묘소를 꼭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며칠 지나 리광평회장은 산에 올라가 30분 도보거리에 있는 곳에서 묘소를 찾았다는 희소식을 전해왔다. 감개가 무량했다.

요즘 김윤동은 이번 청명에는 부인과 자식들을 데리고 묘소에 갈 차비를 하고있다. 차례상을 차리는 법과 제사를 지내는 법을 익히는 한편 증조부앞에 올릴 말씀을 작성중이란다.

그는 본지를 통해 《3․13》기념사업을 꾸준히 조직해오고있는 정부와 인민들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전했다. 그리고 《묘소》를 완전무결하게 보존한 룡정시 정부와 인민들에게도 감사를 드렸다.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