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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해탈]“촌민들이 빈곤에서 해탈되면 집으로 돌아갈 겁니다”

편집/기자: [ 김영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6-12 13:53:35 ] 클릭: [ ]

- 로투구진 렴명촌 마을 주둔 사업대 대원 전봉씨의 빈곤해탈 분투기

“고향에 돌아오면 안일한 직장생활이 눈앞에 펼쳐질 거라 생각했지요. 지금껏 저는 공무원은 책상머리에만 앉아 일하는 신사스러운 직업인 줄로만 여겼어요. 알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구요. 허허…”

로투구진 렴명촌 마을 주둔 사업대 대원 전봉씨(오른쪽)

애초 본인의 예상과 빗나갔지만 룡정시 로투구진 렴명촌 마을 주둔 사업대 대원 전봉씨(33살)는 오늘도 촌마을 가가호호를 오가며 빈곤해탈사업에 드바쁜 하루를 되풀이한다.

한국에서 석사연구생 공부를 마치고 회사생활을 해온 지 8년 차 되던 해, 전봉씨는 아이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가장으로서 아이의 곁을 꼭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하고 고향행을 택했다.

고향행을 결심한 그 해 마침 연변에서는 ‘천명 인재영입 프로젝트’로 인재들을 대거 수용해들이고 있던중이였다. 초빙 조건에 부합되여 2017년 5월, 그는 나서 자란 고향인 룡정시경제합작국에 배치되였다.

연장근무를 밥 먹듯이 해대던 분망한 기업 소속인으로부터 화이트칼라(白领)는 그래도 좀더 멋스럽고 여유로울 거라 생각했던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것도 경제합작국에 출근한 지 보름 만이다. 로투구진 렴명촌에 마을 주둔 사업대 대원으로 내려가 빈곤해탈 공략전에 동참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전혀 예고치 못한 ‘씨나리오'였다. 말 그대로 마을 주둔, 나이 서른이 넘도록 농촌에 가본 거라곤 야외들놀이가 전부였다는 전봉씨다. 농촌에 내려가 생활을 해야 한다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파견 기한도 정해진 게 없었다. 렴명촌이 빈곤에서 해탈되는 날까지라는 기약 없는 기약 밖에는.

“잠시 할 말을 잃었죠. 몇번 가보지도 못했던 낯선 농촌에 내려가 살라니요.”

사업대 막내대원에서 촌민들의 든든한 해결사로

하얀 셔츠 대신 팔토시를 껴야 했고 칼주름을 놓은 양복바지 대신 바지단을 걷어올린 운동복에 발 편한 운동화가 필수 아이템이 됐다. 그가 주둔하고 있는 렴명촌에는 347가구에 958명 촌민이 살고 있는데 2016년 168가구에 347명이 빈곤호로 되면서 빈곤발생률이 36%나 되는 빈곤촌이였다.

빈곤해탈 업무에 대해 미처 료해도 하지 못한 전봉씨였지만 일단 드바쁜 일손을 도와 따라나서기로 했다. 부족한 업무지식은 짬짬이 시간 나는 대로 학습을 통해 장악해가며 그는 스스로 업무지식을 쌓아갔다. 여름철이 시작되면서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폭염에도 그는 한집을 여러차례씩 방문하여서라도 촌민들의 실제적인 곤난과 문제점을 기록하고 빠른 시일내에 문제점을 회보하고 해결해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촌마을의 최저생활보조대상들중에 조건이 구비되는데도 장애인증을 발급받지 못해 보조금을 타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장애인 촌민들을 대신해 여러차례 시 관련 부문에 다녀오면서 그들이 장애인증을 발급받도록 노력해 세명의 최저생활보조대상들이 장애인 보조금을 탈 수 있도록 힘써 도왔다.

어려운 촌민들의 수호천사

일년간 촌에 머물면서 빈곤호들에 대한 료해를 쌓은 그는 언제 한번 촌민들의 사정을 그냥 지나칠 때가 없다. 어느 한번 전봉씨는 자녀의 최저생활보조를 신청하러 촌부를 찾은 촌민 정진국씨를 만났다. 한눈에도 다리가 불편해보였다. 전봉씨는 그의 상황을 자세히 캐물었다. 정진국씨는 오랜 시기 당뇨병으로 앓고 있다가 병세가 악화되였는데 당시 직업고중에 다니고 있던 딸애의 학잡비도 부족한 상황에서 배우자도 장애인인지라 수입래원이 전혀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병원에서는 당장 수술이 시급하다고 했지만 10만원이나 된다는 수술비용에 감히 엄두도 못내고 있다는 상황을 료해한 전봉씨는 로투구진 민정부문과 련락해 관련 수속을 신속히 마쳐주었고 해마다 3,000원의 보조금을 향수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