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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황혼을 불태우는 ‘보배회장’— 김형섭

편집/기자: [ 차영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5-22 08:41:15 ] 클릭: [ ]

-영길현조선족로인협회 회장 김형섭의 이야기

 
영길현조선족로인협회 김형섭 회장.

김형섭 략력: 

1938년 강원도 울진군 출생

1958년 길림철로국 근무

1965년 영길현서양공사 흑어포조선족마을로 귀향 생산대 소대장, 생산대 대장, 대대 당지부 서기 력임

1979년 서양진 부진장 겸 서양진벽돌공장 공장장

1982년 영길현로동모범 길림시로력모범

1997년 길림시인대 대표 당선

1999년 길림성로력모범

2008년 영길현로인협회 회장

2018년 영길현조선족로인협회 회장

 

여든의 고령에 영길현조선족로인협회 회장직을 맡고  협회사업에 온갖 정력을 몰붓는 김형섭, 영길현조선족로인협회 회원들은 그를 우리의 ‘보배회장’이라고 부른다.

젊어서부터 조선족학교의 어려움이라면 힘자라는데까지 도와주려고 애썼고 퇴직 후에는 조선족로인협회와 조선족로인들의 어려움이라면 발벗고 나서는 김형섭, 그의 인생은 나눔과 베품으로 관통된 일생이였다.

 
김형섭 회장이 수상한 상장들.

시종일관 교육사업에 원조를 아끼지 않은 한 사람

집안의 장자로 태여나 가정생활이 구차한 탓에 초중도 채 못다니고 18살에 사회에 진출한 김형석이였기에 그는 뉘집 학생이 가정곤난으로 학업을 중퇴했다는 소식만 들으면 안절부절못했다.

서양진의 빈곤가정 3명의 한족학생에게 련속 3년간 학잡비를 대주었으며 서양진 한족학교에서 한겨울에 난방이 떨어져 발을 동동 구른다는 소식을 듣고 8톤의 석탄을 지원해주었다.

그때는 김형섭이 서양진에서 벽돌공장을 운영하던 시기였다.

1985년 영길현조선족실험유치원을 지을 때 김형섭은 철근과 철사를 지원했고 겨울에는 난방용 석탄을 무상으로 공급했다.

영길현조선족제1중학교 운동장이 수평면보다 낮은 관계로 비만 오면 잠긴다는 고충에  인력과 장비를 지원하기로 했는데 근 한달사이에 인부들의 점심 한끼를 학교에서 제공하는 외 기타 모든 비용을 자신이 부담했다.

2015년에는 영길현조선족제1중학교 음향설비 갱신용도로 자금 만원을 지원했고 그후 수년간 물심량면으로 되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영길현조선족로인협회 회장단 기념촬영

조선족로인협회와 로인들의 곤난을 자기일로 간주

영길현구전진조선족로인협회가 초창기에 활동장소가 없어서 떠돌이생활을 하게 되자 당시 벽돌공장을 운영하던 김형섭은 활동실건물을 지을 것을 제안하고 벽돌, 세멘트, 철근 등 건축자재와 인력비용 모두를 자신이 지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협회 활동실을 지을 터전 마련부터 난항에 봉착했다. 로인협회에서 수개월간 집터를 물색했지만 하늘의 별따기였다.

이에 김형섭은 선뜻 자신의 살림집인 2층짜리 건물을 내놓으며 협회에서 10년간 무료사용을 하도록 약속했다.

그후 부득불 집을 팔아야 하는 사정이 생기게 되자 김형석은 다른 곳에서 활동실을 따로 구해 끝내 활동실 무료제공 10년의 약속을 지켰다.

2006년 공직에서 모든걸 내려놓고 자연인으로 돌아온 김형석, 하지만 조선족로인협회를 향한 그의 관심과 지원은 계속되였다.

2010 5월, 조선족로인협회에서 새 활동실을 장만할 때  3만원을 내놓았고 2012년에는 협회에 마작기계 여섯대를 마련해주었다.

또 해마다 3.8절이나 중양절이면 협회 로인들에게 명절을 쇠여주었고  길림시조선족단오축제 때마다 협회에 회식비를 드리군 했다.

그 외에도 협회의 활동날이 돌아오면 점심식사를 념두에 두고 국 끓이는 큰 가마며 한국산 큰 전기밥솥까지 제공한 김형석이다.

2017 7월, 영길현 대홍수로 로인협회 활동실이 피해를 입게 되자 복구구제금 만원을 내놓았다.

또 회원수가 불어나 기존의 활동실이 비좁아지자 김형섭은 내 살아 생전에 협회에 근사한 활동실을 곡 해결하주어야겠다.”고 말하면서 선뜻이 해결사로 나섰다.

 
협회 활동실.

 
협회 무용조 올해 단오민속축제에 내놓을 문예종목을 연습중이다.

초심을 잊지 않고 더욱 아름답게 장식해가는 황혼

김형섭 회장이 평생에 걸쳐 사회에 기부한 돈을 손꼽아보면 100만원을 훨씬 넘는다.

영길현 구전진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김형섭이라 하면 모두가 엄지를 내밀며 그의 인품과 덕성에 감복한다.

사실 한번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평생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평생동안 이웃들과 우리 민족사업, 공익사업에 큰돈을 아낌없이 내놓을 수 있었는가 하는 기자의 물음에 김형섭은 이렇게 대답한다.

가난한 조선족농민의 자식으로서 내가 돈을 좀 번 것은 결코 나의 재간이 특수했거나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개혁개방이 실시되고 당의 부민정책의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였습니다.  그저 나를 이끌어준 당과 정부의 은덕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좀 베풀었을 뿐이지요.”

김형섭이 사회에 돈을 기부했다는 소문을 듣고 동생들이 첮아온 적이 있었다.

 형님, 정신이 잘못된 것 아니요?  일가친척들은 안주고 협회나 학교에 힘들게 번 돈을 쏟아부을건 뭐요? 돈이 많으면 우리나 주오.”

이에 김형섭은 너희들이 곤난할 때  내가 돈을 주지 않았나? 지금이라도 곤난이 있으면 말해라. 하지만 그 이상의 공돈은 더는 바라지 말라.”고 말했다.

2018 12월의 어느 날,  김형섭은 심장병으로 길림시병원에 입원했다. 입원했다는 소식을 극비에 부친다는 것이 그만 탈로되는 바람에 부분적 회원들이 병문안을 오게 되였다. 그들이 다녀간 후  김형석은 병상 이불밑에서 뭉치돈을 발견했다. 6천원이 넘는 액수였다.

퇴원 후 김형섭이  그 돈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누구나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차라리 협회에 그 돈 전부를 바쳤다.

80고령의 나이에도 매일 아침 일찍 협회로 나와 마당을 쓰는 김형섭 회장, 협회의 각항 규칙을 준수하면서 회원들과 함께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인젠 그의 굳어진 일과로 되였.

/김문석 길림신문 차영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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