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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최도식, 중국 수석 총탄자국감정 전문가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인민일보 ] 발표시간: [ 2019-08-09 14:18:11 ] 클릭: [ ]

◆백보산 사건

1996년 3월부터 1997년 8월 까지 출소한 지 얼마 안되는 백보산은 북경, 하북, 신강 등지에서 군인과 경찰을 습격하여 선후로 3자루의 총을 강탈하고 15명의 군인과 경찰, 무고한 군중을 살해했으며 140여만원 되는 인민페를 강탈하였다.

◆정주은행 강도사건

2000년 12월 9일 4명의 복면 괴한이 하남성 정주시의 모 은행에 뛰여들었다. 일당은 폭약으로 영업창구의 방탄유리창을 폭파하고 현금 200여만원을 탈취했다.

반매(半枚)의 혈지문 사건

2002년 1월 8일 흑룡강성에서 모자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현장에는 불완전한 혈지문과 피묻은 옷 한벌이 있을 뿐이다. 증거가 부족한 원인으로 이 사건은 5년 뒤에야 해명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든 이러한 사건들을 해명하게 된 것은 최도식이라는 이름과 갈라놓을 수 없다.

최도식은 누구인가?

최도식이라면 대부분 사람들은 잘 모를 수 있다. 그러나 공안수사 분야에서 그는 최후의 왕패로 불리우고 있다. 그는 중국 수석 총탄자국감정 전문가이며 전국에서 유명한 흔적검증 전문가이다.

1955년 경찰사업에 참여한 이후 최도식은 7,000건이 넘는 흔적, 물증을 감정했는데 평균 사흘에 한건의 범죄 흔적을 감정한 셈이다. 게다가 오심 사건이 한건도 없다.

그가 발명한 특제 알루미늄박 필름을 사용한 탄두강선(弹头膛线) 흔적추출 기술은 가치가 수백만딸라에 달하는 구미 발달한 나라의 의기보다 정확률이 훨씬 높다.

최도식이 주관, 연구한 흔적 영상, 사진 처리 시스템, 총탄흔적 자동식별 시스템은 국내의 여러 개 되는 기술 공백을 메웠다.

‘백보산 사건’중 북경, 신강에서 총기 강도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는데 현장에는 겨우 수개의 탄두와 탄피 밖에 없었다.

바로 이 몇개 되는 탄두와 탄피로 최도식은 두 지역의 탄피 모두가 동일한 ‘61식’보총에서 발사됨을 판단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쳐버린 탄피의 미세한 흔적에 최도식은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였으며 이는 3, 000키로메터 떨어진 두곳에서 벌어진 사건이 관련된 사건임을 판단하는 주요한 의거로 되였다. 뿐만 아니라 범인 백보산을 검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중국의 렵총 관련 탄도(弹道)리론 연구는 바로 최도식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정주은행 강도사건에서 강도들은 범행을 저지를 때 렵총을 사용했다. 중국에서 렵총의 탄도(弹道)리론연구는 최도식부터 시작됐다. 현장에 대한 고찰을 거쳐 최도식은 범행 렵총이 호남 모 무기연구소에서 생산한 것임을 밝혀내고 이는 또 주범 장서해를 나포하는 중요한 선색으로 되였다.

반매(半枚) 혈지문 사건에서 신문지에 남긴 반매의 혈지문이 남긴 특정이 매우 적어 한때는 인정조건에 구비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최도식은 련속 이틀 동안 주야로 연구한 끝에 불완전한 지문에서 선색을 찾아냈으며 42명 범죄 협의자중 5년 동안 숨겨진 진범을 찾아냈다.

“모든 기회는 당과 국가에서 주었습니다”

‘가문혁 살인사건’, ‘감숙 백은사건’, ‘장군 특대 계렬 강탈살인사건’...최도식의 이름은 1,000건이 넘는 사건수사에 나타났으며 사건 해명에 중요한 선색과 증거를 제공해주었다.

그는 일생동안 형사수사인원의 책임과 고수를 실행해왔다.

1934년에 태여난 최도식은 불운한 동년을 보냈다. 가난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4살 때 부모를 잃고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자랐다. 그의 팔뚝에는 지금도 지주의 칼에 찍힌 자국이 남아있다. 해방후 정부의 도움으로 최도식은 비로소 중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풍상고초를 겪은 그였기에 따뜻함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은혜에 보답할 줄 알게 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평생의 모든 기회는 당과 국가에서 주었습니다. 어찌 감사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 고 말한다.

17세에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한 최도식은 21세에 부대에서 전업하여 흑룡강성공안청에 배치받고 우리 나라 제1대 형사기술 경찰이 되였다. 이때로부터 형사수사 생애를 시작했다.

최도식은 어쩌면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닐지 모르지만 가장 노력하는 사람임은 틀림없다.

흔적검사에는 손자국, 발자국 도구자국, 총탄자국 등이 포괄된다. 흔적은 미소하다. 탄두 하나를 검사하는 데 현미경 아래에서 몇시간씩 봐야 한다.

“저에게는 퇴직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총 한자루의 강선(膛线)이 닳아서 파손될 수 있다. 탄피탄두에 남긴 흔적도 각이하다. 두개 사이의 관계를 알기 위해 당시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년대에 최도식의 방법은 그냥 실험하는 것이다.

“정말 무식하게 일했지요.”, “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렵총의 탄도리론을 연구하기 위해 최도식은 우리 나라에서 생산한 모든 렵총 탄피의 흔적을 사진에 담았다. 그는 천여장의 사진을 찍었으며 심지어 탄피흔적을 보기만 해도 관련 렵총의 생산지를 알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세상에는 천재란 없다. 다만 천만번의 피타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1994년에 정년퇴직할 나이가 되였지만 최도식은 수사 1선을 떠나지 않았으며 오늘까지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 전화벨소리가 울리기만 하면 당장 현장으로 달려가고 매일 밤 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마주앉아 사건들을 PPT로 정리해 놓는다. 자기의 경험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이다.

만년에 백내장 수술을 해서 얼마 안되여 공안부 형사경찰이 지문샘플을 들고 와 그의 감정을 기다렸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주저없이 가장 빠른 시간내에 감정을 마쳤다.

“저에게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저에게는 퇴직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최도식은 생명이 마감하는 순간까지 힘 자라는 대로 빛을 발산하려 한다. 비록 힘들지만 보람찬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사1선에서 평생을 싸워온 최도식은 그 어떤 곤난 앞에서도 쓰러진 적이 없다. 그러나 안해에 대한 말이 나오면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는 그다.

최도식의 뒤바라지를 해온 안해는 혼자서 수명 자식들을 키웠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안해는 자식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의 이름마저 잊고 있다. 하지만 종종 “나는 흔적감정을 하러 성공안청으로 가야 겠소...”라는 말을 한다. 이는 남편이 늘 입에 올렸던 말이다.

지금 최도식은 안해와 함께 양로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안해를 더 잘 돌보려는 마음에서였다.

늘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안해의 손을 잡고 산책하고 이야기도 나누는 최도식, 매일 밤 안해가 잠든 후에야 최도식은 PPT를 만드는 작업을 계속한다.

85세의 그는 청렴하고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일생을 국가와 형사 사업에 바친 그는 부끄럼없는 인생을 살아왔다.

당신이 최도식이란 이 사람을 알고 있다면 이런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고로부터 열심히 일하고 목숨을 내걸고 일하며 백성을 위해 단연히 나서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 ”

최도식과 같은 이들이야말로 중국의 기둥이다.

출처: 인민일보 /편역: 길림신문 홍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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