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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연구에 지장이 된다면 약을 안쓰겠습니다”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1-06 19:18:12 ] 클릭: [ ]

편집자의 말

우리 나라에는 아직 유체기증 사업 관련법은 없다. 하지만 유체기증이라는 아름다운 소행이 싹트고 있다. ‘유체기증’은 기증인이 생전에 유체기증 념원을 표명하고 사망 후 위탁인 혹은 집행인이 유체를 전부 혹은 부분적(장기기증 경우)으로 의학 교수 및 연구 사업에 기증하는 문명행위를 말한다. 사회의 문명 발전 추동에 유조한 이런 행위는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날따라 늘어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하나의 기증문화로 떠오르고 있다.

오늘부터 본지는 계렬특집보도 <멀고도 가까운 문화― 유체기증>을 펴내 유체기증 화제를 다루고저 한다.

“기묘한 일이 있어야 이야기가 된다(无巧不成书)”는 말이 있다. 아래에 소개되는 두 유체기증자의 전형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유체기증 문화의 골수― 건강하고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갈망, 의학에 대한 공헌, 나라와 과학에 대한 믿음, 박애… 등을 터득할 수 있음과 동시에 연변지역 유체기증 사업의 규범화 발전이 아직 결여하다는 점도 보아낼 수 있다. 유체기증 사업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과 지지가 따라가고 효과적인 조치가 실질적으로 강구되였으면 하는 조언을 해본다.

  --편자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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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고도 가까운 문화- 유체 기증]-(1)

“의학 교수 연구에 지장이 된다면 약을 안쓰겠습니다”

 - 유체 기증인 전명수의 림종 전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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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가르침’

“몹쓸•병(주: 간암)에 걸린 내가 강한 약을 많이 쓰면 유체가 손상돼 나중에 유체를 의학 교수 연구에 사용하는 데 지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지장이 된다면 약을 안쓰겠습니다!”

이는 유체기증 신청인 전명수(74세)가 림종 2주전 연변대학 의학원 사체기증접수쎈터 김범학 주임과 가진 전화 대화의 한 대목이다. 김범학 주임에 따르면 로인은 생전에 유체기증 문화에 대해 기본 리해를 가진 분이고 4년전에 유체기증 등록을 해놓은 분이다.

통화가 있은 2주 후인 9월 2일, 김범학 주임은 로인의 가족으로부터 로인이 치료에 효험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부고와 함께 유체를 기증하겠다고 한 로인의 생전의 념원을 존중하기로 한다는 결정을 전달받았다. 하여 전명수로인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237번째 유체기증인으로 기록되였다.

전명수로인의 유체기증에 대한 확고한 의지에 대해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김범학 주임은 이렇게 말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 분을 포함한 유체기증 신청인과 유체기증인들의 생전의 유체기증 의지에는 생명과 건강한 삶에 대한 갈망과 의학인들에 대한 절절한 기탁이 담겨져있고 나라와 과학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안받침되여있다. 전명수로인은 자신의 유체를 꼭 의학 교수 연구에 유용하게 쓰이도록 기증하자는 마음에서, 유체에 손상이 갈가봐 심려해 가족을 통해 몸소 나와 통화를 가져 확인하고 유체기증 의지를 확고하게 표했던 것이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의학발전에 공헌하려는 유체기증인들의 이와 같은 고결한 정신은 의학인들이 영원히 아로새겨야 할 바이다.

‘구수하반의 기러기’

전명수는 어떤 분이였는가?

●모택동사상 학습 기준병 ●향촌우편배달원 기준병 ●연변조선족자치주 로력모범 ●길림성우정계통 선진생산자 ●구수하반의 기러기

1990년 12월 2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향촌우편배달원 대표로 당선된 전명수(앞줄 가운데 사람)가 연변조선족자치주 향촌우편배달원 대표회의에 가기전 환송받으면서 남긴 기념사진. 오른쪽 두번째 사람은 새중국 첫진의 전국로력모범 리호천(오른쪽 두번째사람)이다. 이외는 향촌우편배달원 기준병 선배, 동료들.

9월 3일, 연변대학 의학원 사체기증접수쎈터의 자그마한 추모 행사장에서 고 전명수로인의 추모행사가 소박하게 진행되였다. 행사는 고인의 생전 퇴직단위인 룡정시우정국의 주관으로 진행되였다.

룡정시우정국의 공회주석 류립민이 룡정시우정국을 대표해 고인의 생평을 소개했다. 그는 추모의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전명수동지는 필생의 공헌정신으로 본직사업에 충성했으며 뛰여난 업적으로 기업의 발전을 추동한 훌륭한 우정종업원이였다… 그의 성실, 근면, 소박, 겸손한 품덕과 일터를 사랑하고 맡은바 사업에 적극적으로 공헌한 직업정신은 우리가 영원히 따라배워야 할 바이다.”

전명수는 당년 연길현(현 룡정시)의 ‘모택동사상 학습 기준병’이였다. 태양향 횡도촌 농민으로부터 1967년(21살)에 태양향의 우정배달원 림시직에 채용되였다가 정직원으로 발탁돼 선후로 룡정시 원 태양향우정분국과 조양천진우정분국에서 향촌우편배달원(乡邮员)으로 28년간 사업하다가 병으로 인해 퇴직했다. 재직 기간 그는 련속 10여년간 룡정시우정국의 선진, 향촌배달원 기준병으로, 수차 연변 나아가 길림성 우정계통 선진, 향촌우편배달원 기준병으로 표창받았으며 룡정시로력모범 및 제7차 5개년 계획 기간 연변조선족자치주로력모범으로 표창받았다.

명리에 담담••• “그건 뭐라고”

 

태양향(24년 동안)에서 전명수가 매일 배달하는 당보 등 간행물 주머니는 점차 세주머니로 넘쳐났고 그의 배달점은 구수하 량안의 70여 곳으로 확장되였다. 전명수는 밤낮없이 군중들을 방문하면서 당보 등 간행물 구독을 선전하고 주문받고 차질없이 송달했다. 전명수는 한편 시골의 로약자 수취인들의 걸음을 덜어주자는 배려심에서 소포물(당시는 수취인이 우정국에 가야 했음)을 문전송달해준 기록을 수없이 남겼고 또 배달 도중 짐을 들고다니는 촌민들을 도와 한구간씩 실어다준 일, 촌민들의 농사일들을 맞띄우는 대로 도운 일들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여 태양향 사람들은 전명수를 늘 ‘뢰봉식 배달원’, ‘태양(향)의 훌륭한 아들’이라고 친절히 불렀다. 그의 개인 보관서류에는 그가 태양향으로부터 ‘구수하의 기러기’로 추대받은 대목이 력력히 기입돼 있다고 룡정시우정국의 주관 책임자는 소개한다.

당년 배달길에서의 전명수. 

유가족은 당년 전명수의 허다한 수상소식은 본인한테서가 아닌, 그의 소관 우정분국 책임자나 동료들한테서 전해들었을 정도로 전명수는 명리에 담담했다고 한다. 현유 부분적 영예증서도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 찾아낸 것인데 대부분 처음 본다고 한다. 수상 소식을 듣고 안해와 자식들이 상장을 보자고 할 때마다 “그건 뭐라고. 없앴다”며 외면했다고 한다.

유가족이 찾아낸 전명수의 부분적 영예증서 가운데서 기자는 1990년 그가 길림신문사로부터 수여받은 ‘신문 발행사업에서 뚜렷한 성적을 올린 데 대한 표창장’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역시 전명수의 당보 등 간행물 발행 사업에 대한 기여를 견증해주고 있었다.

결혼날에도 구멍 난 바지 입은 사람

 
당년 전명수, 전춘화의 약혼사진.

전명수는 도문시 철도중학을 졸업하고 태양향 광흥촌에 ‘집체호 청년’으로 있던 전춘화와 1971년에 태양향우정분국 국장의 소개로 부부 인연을 맺었다.

전춘화한테 남편은 이런 사람이였다. 그가 결혼날 구멍 난 바지를 입었을 정도로 시집의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였지만 부부로 함께 지낸 48년 동안 그는 줄곧 꾸밈없이 순박하고 고정한 사람이였다. 도문시에 사는 장모님의 회갑잔치에 갔다가도 장모님께 큰절을 먼저 올리고 새벽에 태양향으로 달려와 출근시간을 맞추어 배달길에 올랐고 급성 류행성출혈열(쥐병)에 걸려 구급치료를 받은 외로는 배달일을 미룬 적이 없었다.

“유체기증은 우리 부부의 약속”

 

 
유가족한테 발급된 고 전명수의 유체 기증 영예증서.
 

전명수, 전춘화 부부로 말하면 신문보기, 책보기는 세월과 더불어 생활의 한 부분으로 되였다. 집의 셈평이 좀 펴이자 전명수는 당연히 집을 신문, 간행물 주문호로 만들었고 주문을 못했을 때는 달을 거를세라 간행물들을 사들였다.

“우리가 처음 장기기증, 유체기증에 관한 보도를 신문에서 본 지는 10년 나마 된다. 그 때로부터 인체의 장기도 타인한테 주고받을 수 있는 세상이 왔구나 하는 것을 알았고 의학 교수와 연구에 기증한 유체가 많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였다. 우리 부부는 4년전에 ‘늙은 몸이라도 의학연구에 유용하다면 우리도 사후 유체를 기증하기요!’ 하면서 합의했고 ‘114’ 전화를 통해 연변대학 의학원 사체기증접수쎈터를 찾아가 유체 기증신청을 해놓았던 것이다. 그 선택에 대해 우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유체기증 선택과 신청은 우리 두 사람의 공동한 인식이였고 약속이였다.”전춘화의 말이다.

“유체기증, 나와는 먼일이라 생각했는데”

전명수, 전춘화부부 슬하에는 전선희(47세), 전홍매(42세) 두 딸이 있다. 이들 자매는 다 대학교 학력자로서 지금 전선희는 룡정시에서, 전홍매는 국외에 정착해 생활하고 있다.

기자는 유체기증 문화와 부모의 유체기증신청에 대한 이들 자매의 생각도 들어보았다.

전선희: 부모님의 선택, 신청을 보면서 사체기증이 자신의 사후에 대한 공민의 한가지 자각적인 선택으로 되고 있는 것을 실감한다. 부모님이 그 신청을 제출했을 때는 죽음을 우려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황도 아니였다. 건강한 사유를 가진 부모님이 마지막 길에 대한 선택을 차분하게 한 것만큼 나는 4년전 부모님으로부터 그 결정을 듣고 찬성을 표했고 부모님께 나중에 나도 그 선택을 해야겠다고도 말했다.

전홍매: 유체기증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내 가족과 나와는 먼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부모의 그 신청 사실을 들었을 때 크게 충격을 받았다. 왜 나의 부모님이 그런 ‘무서운’ 선택을 했을가? 나는 부모님의 유체가 상처 입는 상상을 하며 슬퍼하고 반대해나섰다. 와중에 시집켠 혈육이 요절해 그 장례식을 겪으면서 나는 사람의 사후에 대해서, 유체기증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색하게 되였다. 사후 한줌의 재가 돼서 허공에 사라지는 사실에서 허무함을 느꼈다. 후세를 위해 의학 발전에 유체를 공헌한다면 당연히 유체기증 선택이 의의 있고 가치 있는 위대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나는 유체기증 문화에 대해 공감하게 되였고 그 신청을 한 부모님이 자랑스러웠으며 부모님을 탄복하게 되였다. 나도 나중에 그렇게 할가 생각한다. 단 그렇다 할 법규를 보지 못해 일종의 우려심도 들어 부모님께 말한 적도 있다…

“애들 아버지는 랑만적으로 가셨다. 아버지는 행복하셨다.”

추모행사 후날 기자는 조양천진 승리가의 남산 기슭에 자리한 자그마한 고가에서 전춘화네 3모녀를 다시 만났다. 그 집은 전춘화네 량주가 근 30년 동안 생활해온 집이였다. 구식 옷장, 이불장이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널마루 온돌방은 주인들의 지나온 세월과 검소한 생활 흔적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움을 달래던 3모녀는 기자한테 새하얀 다른 한쪽 벽을 가리켜 전명수로인이 마지막으로 입원해 가기전 안해가 집을 비운 틈을 타 감쪽같이 회칠해놓은 거라고 알려주면서 고인이 남긴 미소를 떠올린다.

전춘화: 애들 아버지는 평생 우리를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는 등 말로 정감을 표달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랑만적으로 가셨다.

“사람은 나서 한번은 죽기 마련이고 우리는 유체를 기증하겠다고까지 신청해놓은 사람들이잖소?” 하며 림종 며칠전에는 애들 앞에서 나의 두손을 잡고 노래로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사랑아 참된 사랑아 어찌 늙으랴

백년해로 하면서 사랑 가꾸리’(노래 〈사랑아 어찌 늙으랴〉의 한소절)

그러자고 했는데 50년도 같이 못살고 당신 두고 먼저 가야 해서 미안하네•••

‘여기에 있어도 당신 뿐이고 저기에 있어도 당신 뿐이고

돈 없어도 당신 뿐이고 돈 많아도 당신 뿐이고

이 넓은 세상 어느 곳에 있어도 내 사랑은 당신 뿐이다’

(노래 〈뿐이고〉의 한구절 )”

전선희, 전홍매: 진통제 과다 사용이 유체를 손상시킬가봐 극심한 병 통증을 참고 견디며 아버지는 유체를 의학에 기증하려던 마지막 념원을 실현했다. 림종에 그 념원을 차질없이 실현할 수 있음을 확인한 후 아버지는 한결 더 담담하고 초연해진 듯했다. 평생 고지식, 무뚝뚝한 인상과 달리 신변에서 자신을 배동하고 간호하는 어머니와 우리 자매랑 함께 담소를 많이 나누었다. 처음 “행복하다”고도 표달했다. 우리 자매의 손을 쥐고 “고맙다. 니들이 효녀란 걸 알지만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 어디서든지 착하게 살라…”며 다독이여주셨다.

맺는 말

고결한 삶과 담담한 미소, 이는 전명수로인이 유가족을 포함한 산 사람에게 남기고 간 더없는 위안과 ‘유산’이다.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멀고도 가까운 문화- 유체 기증](2)가 다음날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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