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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의 융합-상해지식청년들이 본 연변

편집/기자: [ 최승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5-20 16:16:21 ] 클릭: [ ]

반세기의 융합-상해지식청년들이 본 연변

주배흥

1969년 상해지식청년들이 연변에 갓 발을 들여놓았을 때 연변의 여러민족 인민들은 그들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상해 청년', ‘상해애들'이라고 친절하게 불렀다. 1.8만명에 가까운 ‘상해청년', ‘상해애들'들은 산 설고 물 선 연변땅에서 연변인민들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깊은 감정을 쌓아갔다. 상해에서 온 이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신근한 로동과 구슬땀으로 장백산 아래의 광활한 대지에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그 특수한 년대에 정녕 잊을 수 없는 한편의 서사시를 써내려갔다.

연변의 지역문화는 “바다가 백갈래의 강물을 받아들이는” 그런 전통과 특점을 갖고 있다. 수백년 동안을 내려오면서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상호 련계는 날이 갈수록 밀접해졌는데 부단한 이동과 잡거, 통혼 등 형식으로 문화적으로는 서로 배우고 혈연적으로는 서로 융합되면서 점차적으로 연변특색의 지역문화와 심리적 특징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상해지식청년들은 연변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지역문화에 자신들이 가지고 온 신선한‘혈액'을 보충하면서 함께 연변의 지역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문화를 거론하면 사람들은 많이는 문학과 예술, 사상과 철학, 과학과 학술 등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은 문화의 근본은 물질인바 우선 의식주행과 필요한 생존수단이다. 일상생활의 구석구석들이야말로 문화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으로서 례를 들면 음식문화, 복식문화, 생활풍속 등이다. 상해지식청년들이 연변에 와서 처음으로 직면한 것이 바로 이곳의 의식주행과 일상생활 그리고 로동이였다. 모든 것을 막론하고 상해지식청년들로 놓고 말하면 현지 생활에 융합되는 것은 한차례의 험난한 고험이였고 눈앞에 놓인 필수적 과제였다.

1. 연변음식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음식문화는 한개 지방의 지역문화를 가장 잘 반영한다. 상해의 음식문화도 천태만상으로 상해지식청년들은 연변에 올 때 부동한 가정과 부동한 식습관에 따른 음식문화를 3천키로메터나 떨어진 변강에 갖고 왔다. 어려웠던 그 세월에 소위 먹는다는 것은 바로 배를 채운다는 뜻으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상해지식청년들이 집에서 상해특색의 음식들을 먹다가 가족과 학교를 떠나 연변에 와서 당지 음식을 접하고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뿐 바로 뒤에는 험준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해지식청년 곽유곤은 자신의 글 <집체호의 밥>에서 “입쌀은 매우 빨리 거덜나고 강냉이가루, 수수쌀과 강냉이쌀 등 청일색의 잡곡들만으로 우리는 힘들게 끼니를 에때웠다.”고 회억했다. 강량준은 <량수의 기억>에서 “하루하루가 힘들어졌다. 급식은 점점 못해갔고 향긋한 이밥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대신 입쌀에 강냉이쌀을 섞은 밥으로 바뀌였으며 그것도 며칠이 못가서 끼니마다 수수쌀밥으로 변해버려 목구멍에 걸려 도무지 넘어가질 않았다. 한사람 앞에 두냥씩 차려진 콩기름도 한주전에 이미 다 떨어지고 말았다.”라고 적었다.

범문발은 <생명을 경외하다>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많은 지식청년들은 “그 거무스레한 수수쌀밥을 보면서 입맛이 없어했으며 배고파서 참지 못할 정도가 돼야 겨우 몇숟가락씩 떠먹었다. 집안 형편이 좀 괜찮은 지식쳥년들은 공사 소재지 식당에 가서 가끔씩 생활개선을 하군 했다.”“개도 잡아 먹고 고양이도 잡아 먹고 마을에서 돼지가 병들어 죽어 그 고기를 나눠주자 우리는 마치 설을 쇠는 기분이였다. 그때는 밤이면 소를 기르는 우사간에서 회의를 열고 정치학습을 하군 했는데 우리 지식청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일찌기 갔다. 사양원이 없는 틈을 타서 소한테 먹이는 두병을 구해서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회의가 끝나고 집체호로 돌아와서 두병을 불에 구워먹으면서 ‘이게 어디 두병이야, 그야말로 상해의 바삭바삭하는 그 땅콩과자가 아니야!”라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

1970년 가을, 안도현 량강공사 서강1대 집체호 취사반이 집체호주방에서 식생활개선을 토론하고 있다.

힘든 체력로동에 먹을 것이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부분적 지식청년들은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진준민은 이렇게 회억했다. “허다한 집체호들에서 계획이 없다보니 하루는 배를 채우고 하루는 굶는 일이 경상적으로 생겼다. 지식청년들은 배가 고파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농민들이 사는 집에 가서 닭이며 개를 훔쳐다 잡아 먹는 일도 가끔 발생하기도 하였다.” 하영근은 <농촌에 남아서 만년을 보내는 왕려군>이라는 글에서 “일부 지식청년들은 배가 하도 고파서 당지 사람들이 기르는 닭이나 오리를 몰래 훔치기도 하였다.”고 회억했다. 서선정은 자신의 글에서 “지금 와서 집체호의 지식청년들과 함께 그 기억을 떠올려보니 적잖은 이들이 당년에 농민들의 물건에 손을 댄 데에 대해 미안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적었다.

상해지식청년들이 풋콩을 먹는 것을 두고 농민들은‘망할 놈'이라고 질책하였다. 당지의 농민들은 줄곧 채 여물지도 않은 풋콩을 먹는 것은 일종 랑비이며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오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상해지식청년들이 당년에 먹던 그 풋콩이 지금은 연변식당의 음식상에도 오르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상해지식청년들은 그래도 연변의 음식습관에 잘 적응해나갔다. 돌피밥으로부터 입쌀이 조금밖에 안 들어간 잡곡밥 그리고 수수밥, 강냉이 밥과 국수를 가리지 않고 먹었다. 상해지식청년 곽유곤은 이렇게 회억했다. “적잖은 지식청년들이 위에 탈이 생겼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습관되였다. 입쌀이 조금밖에 안 들어간 잡곡밥은 확실히 이밥보다 먹기 힘들었다. 그래도 수수밥이나 강냉이밥에 비하면 나은 편이였으며 맨 잡곡밥만 먹는 것보다는 훨씬 행복했다. 이는 입쌀이 없는 조건에서 배고픈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족들의 메밀랭면 특히는 그들의 된장과 김치는 상해지식청년들이 즐겨 먹는 음식으로 되였으며 먼 후날 잊지 못할 그리운 추억의 음식이 되였다.

랭수를 마시는 일도 상해지식청년들에게 있어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였다. 어릴 때부터 ‘랭수를 마셔서는 안된다'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기 연변농촌의 현실은 더운물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형편이였다. 그리고 농촌에서 랭수를 마실줄 모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한번은 농민집에 초대받은 상해지식청년이 밥을 다 먹자 집주인이 더운 물을 건넸는데 그 우에는 기름이 둥둥 떠있었다. 비록 더운 물을 아니여도 숭늉을 마시는 그 상해지식청년은 마음속으로 기쁘기 그지없었다. 날이 가고 해가 감에 따라 상해에서 온 지식청년들은 골안에서 흘러나오는 물,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 그리고 강물까지도 마시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연변사람들은 흰술을 즐겨 마신다. 그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부터 기뻐하는 정도다. 연변사람들은 이를 놓고 조금은 자랑으로도 여기며 그러나 또 겸손하게 “뭘 마실줄 안다고, 그저 아무렇게나 마시는거지머”라고 변명하기도 한다.

연변사람들의 시원시원하고 순박한 인품은 술상에서 더없이 잘 표현된다. 상해지식청년 설구지는 이렇게 회억했다. “동구라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든 북방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술을 즐겨 마셨는데 이는 당지의 기후와 련관이 있는 것 같다. 땅이 갈라 터지는 추운 겨울날 독한 술로 몸을 덥히는 것이다. 북방의 한겨울밤 사람들은 알콜의 힘을 빌어 단잠을 청했으며 고달픔을 털어버리기도 했다.

당시 조양천술공장에서 생산하는 65도짜리 술을 공소합작사에 와서 다시 53도로 희석해서 팔았다. 술을 마시는 방법도 우리가 보기에는 희한했는데 대접사발이 넘쳐날 정도로 부어서 상우에 올려놓고는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마셨다. 이렇게 한순배씩 돌다가 나중에 거의 없어질 무렵이 되면 제각각 사발에 받아서 마지막까지 마셨다.”

대접사발에 술을 부어서 마시고 고기를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먹는 것은 동북농촌의 풍속으로서 이는 상해에서 황주를 조금씩 마시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처음 연변에 와서 술을 마실줄 모르던 상해지식청년들은 후에는 술이면 내노라 하는 애주가가 되였으며 몇십년이 흐른 후 연변사람들과 술친구로 되여 세상만사를 론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그런 연고로 술 때문에 세상을 일찍 떠나는 사람도 가끔씩 있었다. 상해지식청년 오소구가 오래만에 두번째 고향인 연변을 찾아 마을사람들과 함께 회포를 풀다가 자기와 나이 비슷한 사람들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누군가가 “모두 돌아갔어요. 다 그 술 때문이지요.”라고 그에게 말해주었다.

연변의 음식은 종류가 다양하고 맛갈스럽다. 상해지식청년 림일평은 관찰에 흥취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찰떡 향기>라는 글에서 연변의 차좁쌀로 만든 찰떡과 상해에서 조식으로 먹는 떡에 대해 비교를 하였다.“연변 찰떡은 먼저 차좁쌀을 물에 불궜다가 가마에 넣고 찐다. 그리고 고물도 만든다. 이 과정에서 가장 볼만한 대목은 두 장년이 떡메로 떡판우에 올려놓은 차좁쌀을 번갈아 련속 쳐가면서 떡을 만드는 장면이다.”

상해지식청년들은 연변의 모두부에 대해서도 남다른 추억을 갖고 있다. 연변에서 재배한 콩을 물에 불궜다가 갈아서 만든 모두부는 상해 두부보다 훨씬 맛있다. 야들야들하고 고소한 모두부, 수십년이 지났으나 그 기억은 새롭기만 하다. 모든 것이 귀하고 생활이 어렵던 그 시대에 두부를 먹는다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였다.

1972년, 연길현 장안공사 하룡1대의 상해지식청년들이 집체호에서 물만두를 빚고 있다.

마배견은 <나의 연변 지식청년생활>이라는 글에서 “십년동안의 지식청년생활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던 나를 큼직큼직한 고기덩이와 대접사발에 술을 따라서 마시는 동북의 진짜 사나이로 변하게 하였다. 조선족청년들과 모두부 먹기 시합을 했는데 한번에 열네모나 먹은 기억이며 큰사발에 꿀을 넘쳐나게 담아서 먹던 기억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2. 복식과 꾸밈새

미를 추구하는 마음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복식과 꾸밈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물질생활의 한 부분이며 동시에 사회문명의 표지이기도 하다. 곤난하던 세월, 설사 가난한 농촌마을이라 해도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려고 하였다. 복식은 사람들의 생활요구를 만족시키는 외에도 한 시기 한개 지역의 문화를 대표하기도 하는 것이다.

가난했던 년대에 변강의 두메산골에서 멋을 부린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였다.

상해지식청년 설구지는 <집체호시절의 생활기록ㅡ복장> 이라는 글에서 당시 농민들의 차림새를 이렇게 묘사했다. “일년 사계절 제일 보편적으로 눈에 띄이는 것은 검정색이였다. 검정색의 옷은 쉽게 어지러워 지지도 않고 또 남들이 모두 검정색을 입으니 모두들 그렇게 따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회의 어느 계층들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이 색상을 좋아하고 있으니 말이다.”

멋을 좀 부린다는 남자들과 녀자들은 남들과 약간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남자들은 초록색의 옷에 초록색 나는 모자를 썼다. 특기할 것은 목깃의 안쪽에 코바늘로 뜬 하얀 목도리를 달았는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뜯어서 씻었다. 무명실을 가지고 곱게 무늬를 해가면서 코바늘로 뜬 목도리는 집에서 누나 혹은 녀동생 아니면 녀자친구가 떠주었다. 조건이 없는 우리 상해지식청년들은 이런 멋을 부릴 수가 없었다. 녀자들은 남자들보다 좀 더 신경을 써서 단장했는데 그녀들은 꽃천을 가지고 옷을 지어 입었으며 머리에는 정방형의 하늘색 혹은 초록색의 수건을 썼다.

같은 시기에 상해에서는 목도리만 달려 있는 ‘가짜 와이셔츠’가 류행되였다. 이것 역시 경제조건의 제약 때문이였다. 천이나 옷을 사도 ‘부표(직물 배급표)’가 필요했던 세월이였으며 ‘부표’ 또한 식구에 따라서 한정적으로 배급하던 시기였으니 목도리만 달린 ‘가짜 와이셔츠’는 상해사람들이 천을 절약하기 위해서 머리를 써가며 고안해낸 기발한 착상이였다. 상해지식청년들이 ‘가짜 와이셔츠’를 입은 것이 농민들에게 발각되여 단단히 놀림을 당하기도 하였다.

<집체호시절의 생활기록ㅡ복장>은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남자 지식청년들은 사람마다 카지(카키)천으로 된 중산복 한벌씩 있었다. 검정색 혹은 남색의 화학섬유로 된 천이였는데 처음에 ‘부표’를 받다가 후에는 받지 않았다. 이 옷은 우리의 행사복으로 되여 공사나 현에서 회의가 있을 때면 궤에서 꺼내 갈아 입고 가기도 했다. 집체호에서 식사를 책임진 조익민은 한때 날마다 중산복을 입어 사람들에게 남다른 인상을 남기기도 하였다.”

당시 이름난 영화배우 조단이 주연한 영화 <해혼>에서 조단이 입었다고 하여 일명 ‘해혼반팔’이라고 불린 반팔티도 류행이였다. 그 시절에 많은 지식청년들이 이 반팔티를 입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눈을 끌기도 하였다. 그리고 겨울철에 입는 동복으로 일명 ‘땅크복’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솜옷에 재봉침으로 한줄 한줄씩 내리줄로 박아 만든 겨울옷이였다. 그 때에는 이런 것들이 모두 패션이였다.

상해지식청년들은 ‘문화대혁명’이라는 특수한 년대의 특정된 복식을 상대적으로 락후한 변강의 농촌마을에 갖고 왔다. 그렇다보니 처음에 당지의 사람들은 당연히 신기하게 여겼다. 상해녀성지식쳥년들이 착용한 브래지어는 두메산골에 살고 있는 농촌녀성들로 놓고 말하면 처음 보는 것이여서 신기할 정도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자들이 입는 꽃문양의 와이셔츠, 나팔바지, 쫄바지 등 복장들이 당지의 사람들 속에서 점차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후에는 또 접이식 자동우산이며 접이식 컵 같은 것들이 대도시로부터 이곳 편벽한 농촌까지 들어왔다.

상해지식청년들도 당연히 연변사람들의 복식습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상해지식청년 서문화는 <오도구에 있던 나날들>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매번 생산대에서 회의를 할 때면 아주머니들은 한쪽 구석에 모여 앉아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 한쪽으로 대장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한쪽으로는 두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솜으로 가늘게 혹은 좀 실하게 면실을 뽑았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 지식청년들도 솜을 사다가 따라서 면실을 뽑았다. 나는 가느다란 면실을 뽑은 후 두 가닥을 한데 붙여서 기다란 스카프를 떴다. 그리고는 공소합작사에 가서 장미꽃색의 붉은 물감을 사다가 물감을 들였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장백산 아래의 겨울날, 나절로 손수 만든 그 목도리를 두른 나는 둥둥 뜨는 기분이였다.”

1969년, 훈춘현 경신공사 금당1대 상해지식청년들이 처음으로 조선족 복장을 입어 보고 환하게 웃고 있다.

상해지식청년들은 조선족들이 입는 전통복장에도 큰 흥취를 가졌다. 많은 이들이 조선족들한테서 민족특색이 짙은 치마저고리를 빌려서는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소중한 력사의 기억으로 남았다. 수십년이 지나서 색바랜 당년의 그 사진들을 펼쳐볼 때마다 상해녀성지식청년들의 심정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이 만감이 교차하군 한다.

3. 민풍과 민속

민풍과 민속은 특정된 사회문화지역내에서 력대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준수하고 있는 행위 방식이다. “고장마다 서로 다른 풍속이 있다”는 것은 바로 풍속의 지역적인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연변은 독특한 민풍과 민속을 갖고 있다. 상해지식청년들의 도래는 “지역풍속에 따르는” 일면도 있고 “타파하고 수립”한 일면도 있다.

첫번째는 례절이다. 조선족의 례절은 아주 엄격하다. 년장자와 후배의 사이, 남자와 녀자사이에 모두 천년을 거쳐온 엄격한 범절이 있다.

조선족 남편에게 시집간 상해 지식청년 수림제가 환갑연에서 시부모에게 절을 올리고 있다.

강준량은 “량수의 기억들”이라는 문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때 조선족들의 남존녀비 사상은 아주 심했다. 몇몇 조선족 할아버지들이 길가에 앉아 한담을 하고 있으면 조선족 할머니들과 녀자들은 모두 길을 에돌아 가야 했고 그 앞으로 지나가서는 안되였다. 하향해서 얼마 안지나 내가 골목을 걷고 있는데 조선족 할머니가 마주 걸어왔다. 나를 발견한 그 할머니는 바로 멈춰서서 벽을 마주했고 내가 지나간 뒤에야 몸을 돌려 계속 걸어갔다. 그때 나는 몹시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중에야 이것이 조선족의 풍속습관이라는 걸 알게 되였다. 우리 상해 지식청년들이 온 뒤로 이런 풍속습관은 적지 않게 없어졌다.” “남존녀비현상이 몹시 심했다. 남자들은 밭에서 돌아 오면 아무일도 하지 않고 구들에 누워 휴식하며 담배를 피운다. 제일 많이 해봐야 땔나무를 패고 물을 긷고 불을 지피는 일이다. 녀인들은 안팍으로 바삐 돌아치며 남새를 캐오고 돼지와 닭을 먹이고 빨래를 하고 식사를 마련하고 거기에 남자들의 시중까지 들어줘야 했다. 남자들은 종래로 강변에 가서 빨래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우리 지식청년 남자들이 강변에 가서 빨래를 하면 촌의 남자 사원들이 우리를 놀려줄 뿐만아니라 녀성 사원들마저도 왜 남자들을 강변에 가서 빨래하게 하냐고 집체호 녀성 지식청년들을 보고 꾸중한다. 마치 대역무도한 일을 저지른 것처럼 말이다.” “조선족 녀성들은 밥상에 마주하지 못한다. 남자들이 거의 다 먹어서야 옆에서 나머지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또한 무시로 남자들에게 물을 떠주거나 담배를 가져다주거나 해야 하며 밥상도 치워야 했다. 집체호의 녀성 지식청년들은 참가자격마저 없었다. 집체호 녀성 지식청년들이 집단 항의를 해서야 이런 형편은 점차 개선되였다.

서문화는 <오도구에서의 나날들>이란 글에서 이렇게 썼다. “조선족은 남존녀비가 심하다. 집체호에서는 순번을 나누어 밥을 지었는데 남자들이 밥을 지을 때면 조선족 어머니들은 ‘남자들이 어떻게 밥을 짓나?’며 남자들의 편을 든다. 우리가 어머니들과 따질라 치면 집체호 남자들이 옆에서 동을 달아 화가 난 우리 녀자애들은 말도 못 이었다.”

농촌의 조선족 가옥은 온 방안이 모두 구들이고 가마목과 구들이 이어졌다. 음식을 만들고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등 모든 실내 활동들이 구들에서 진행된다. 남쪽 문을 열고 신을 벗고 방안에 들어와 구들에 앉는다.

그러나 이런것들은 무척 신경을 써야 했다. 매번 생산대 회의때면 남자 지식청년들은 “어르신”들과 함께 구들 가운데 앉고 녀성 지식청년들은 젊은 여자들과 함께 뒤방에 앉아야 한다. 앉는 자세도 구별이 있다. 남자들은 올방자를 틀고 앉고 녀자들은 몸을 비틀어 다리를 한켠으로 모으고 앉는다. 그리고 녀성 지식청년들은 남자들과 한자리에서 밥을 먹지 못했다. 이에 녀성 지식청년들은 불만이 많았다. 하향해서 받는 재교육이 “남존녀비”과목일줄 누가 생각해보았으랴?”

상해지식청년들은 연변에 와 자신의 언행으로 농촌의 “남존녀비”전통관념에 일정한 충격을 주었다. 상해의 현대문명과 도시의 평등 관념과 농촌의 뿌리 깊은 “남존녀비”관념은 일상 생활에서 서로 충격을 주었고 서로 영향을 주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도시와 농촌의 “남존녀비”관념은 모두 일정하게 희박해졌다. 장소문은 <옛 사진속에 기억되는 두 지역의 정분> 이라는 문장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아주머니를 끌어당겨 밥상에 앉게 했다. 날이 가면서 나는 그들 가정의 습관을 개변시켰고 모두들 한 밥상에서 밥을 먹게 되였다.”

농촌의 조선족과 도시의 조선족들은 례의범절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말하면 도시의 “남존녀비”현상은 많이 희박해 졌는데 특히 남녀가 같은 상에서 식사하는 것은 관례로 되였다. 사회의 발전과 사회기풍의 변화로 농촌의 “남존녀비”전통관념은 부동한 정도로 와해되였고 녀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날로 향상되였다.

왕보발은 <민속촌의 새로운 기풍 – 조선족 홍기촌 견문> 에서 이렇게 썼다. “그녀에게는 두 자식이 있는데 그녀의 사상관념, 생활방식, 교육방법은 모두 조용히 탈바꿈되였다.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 조선족과 한족의 좋은 민족 습관이 한데 융합되였다. 그녀의 몸에서 우리는 한세대 녀성들의 참신한 모습을 보았다. 조씨네 가정의 변화는 바로 홍기촌 발전변화의 축소판이였다.”

연변 사람들은 례의범절과 가정교양을 아주 중시한다. 이는 상해지식청년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림일평은 이렇게 말했다. “로인을 존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이런 전통은 연변 왕청현 오참툰에서 자신의 특유한 특색으로 연출되고 있다. 50세 문턱을 넘어서며 로인들을 공경하고 자녀들을 교양할 때 나는 청년시절 나의 도덕관념에 영향을 준 그 작은 산간마을이 생각난다. 특히는 어르신을 공경하는 그 마을의 습속과 전통, 그것은 연변에서의 생활이 나에게 준 진귀한 재부였다.”

소준봉은 <조선족의 례절과 가풍을 느껴 본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45년의 인생길에서 많은 조선족 친구들, 동사자들과 줄곧 밀접한 련계와 왕래를 하고 있다. 조선족들의 가정교양은 선량, 존중, 충직, 관심, 례절, 신용, 현숙, 동고동락 등 인간의 진정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사회문명이 향상되면서 량호한 례절과 가풍은 사람들 마음속에 더욱 깊게 배여들어갔다. 조선족의 례절, 가풍과 가정교양은 중화민족 대가정의 민속풍경속의 한떨기 진귀한 꽃이다. 조선족의 이 한떨기 꽃이 더욱 눈부시고 화려하게 피여나리라 믿는다.”

두번째는 위생습관이다. 생활가운데서 위생습관의 개변은 상해 지식청년들로 말하면 한차례 거대한 시련이기도 했다. ‘상해 애들’은 어려서부터 매일 아침이면 칫솔질을 하고 저녁이면 세수하고 발을 씻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늘 부뚜막에서 목욕을 했거나 혹은 대중목욕탕에 다녔다. 농촌에는 절대 이런 조건이 있을 수 없었다. 목욕은 줄곧 ‘상해 애들’을 괴롭히는 문제였다. 그나마 여름이면 하천에 가서 씻을 수 있어 다행이였다.

위생조건이 지극히 차하였기에 ‘상해 애들’은 연변에 와서 처음으로 이와 서캐를 보게 되었다. 양영흠은 이렇게 추억한다. "1969년 3월초에 연변 농촌에 왔을 때 농민들이 처마밑에 앉아 해볓 쪼임을 하면서 옷을 벗고 옷깃에 손톱을 대고 자꾸 뭔가를 누르는 것을 봤다. 나는 신기해서 자세히 보니 그들은 옷에 있는 이와 서캐를 잡고 있었다. 농민들이 한가롭게 이를 잡는 것을 본 나는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한 상해지식청년은 가족방문으로 집에 돌아갈 때 성냥갑에 이 몇 마리 잡아서 상해 친척 친구들에게 대체 뭐가 “이”인가를 보여줘야겠다고 장난으로 말했다.

지식청년들이 아침마다 치솔질 하는 것은 편벽한 산골의 하나의 기괴한 풍경선으로 되기도 했다. 밖에 나가 본 적 없는 로인들은 호기심에 찬 눈길로 이 치솔풍경을 지켜보았다. 치솔질 하는 것은 필경은 좋은 위생습관이였다. 마을의 청년들은 재빨리 모방해나섰다. 상해 지식청년들은 자신들의 위생습관으로 농촌사림들의 개인위생습관에 영향주고 향상시켰다.

믿기 어려울 수 도 있겠지만 도시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내려가 직면한 첫 시련은 힘든 밭농사도 아니고 질풍폭우식의 계급투쟁도 아니였으며 변경선의 총탄도 아닌 변소였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상해지식청년들은 그때를 추억할라치면 아직도 감명이 깊다. "농촌에 있을 때 밤에 변소를 가는 것이 무섭지 않았나? 얼마나 거북했나?"

농촌의 화장실은 바로 변소다. "흙구덩이 옆에 벽돌 두장, 거기에 석자 토담으로 주위를 절반 막았다" 이는 당시 농촌의 전통 변소다. 진회민은 이렇게 추억했다. "그런 변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상하, 앞뒤, 좌우가 모두 트였고 나무가지나 싸리대로 막은 네 벽 틈으로 사방이 다 내다 보였다. 하여 나는 변소의 별명을 '투명변소'라고 지었다."

‘상해 애들’은 변소에 쭈크리고 앉아본적이 없었고 어떻게 앉아야 할지는 더욱 모른다. 이는 처음 변소를 사용하는 지식청년들을 정말로 힘들게 했다. 네면으로 휑하니 바람이 들어오는 변소에 처음 들어간 느낌은 그야 말로 얼마나 놀라웠는지 형용키 어려웠다. 마을에서는 그나마 변소가 있어 쭈그리고 앉을 수 있었으나 야외나 밭에서 일하다가 용변이 마려우면 그야 말로 죽을 맛이다. 특히 논밭에서는 사방이 허허벌판이여서 녀성 지식청년들을 더욱 어렵게 했다. 습관되지 않아도 습관되여야 하며 적응되지 않아도 적응해야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광활한 천지에서 길을 찾아야 했고 길은 광활한 천지에 있었다.

경제사회의 발전에 따라 상해 지식청년들의 위생습관은 농촌사람들의 인정을 받았고 전반 연변의 위생정황, 개인위생습관 그리고 위생수준도 경제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셋째는 소비습관이다. 어려운 시절에 "근검절약"의 소비관념은 상해사람들의 부호이며 꼬리표였다. 의식주행 여러 방면에서 모두 "근검절약"해야 했다. 상해에서 자란 지식청년들은 소비에서 신중한 정신이 이미 몸속에 배여있었다.

처음 연변 온 지식청년들은 소비관념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때 농촌의 소비는 이미 제일 마지막 한계의 변두리에까지 와 있었다. 하지만 상해지식청년들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농촌의 “남정네”들이 집에 래일 먹을 쌀이 없어도 온 집안의 마지막 남은 몇십전으로 대대 공소합작사에 가서 근들이 흰 술을 사서는 몇 모금에 다 들이키고는 휘청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였다.

서선정은 이렇게 추억한다. “그가 공소합작사의 소금통옆에 서서 술 한사발 마시고는 손가락으로 소금통을 문질러 입에 넣는 모습을 나는 늘 보아 왔다. 매대우에는 이미 빈사발이 몇 개 있었다. 얼큰하게 취해 있는 그의 모습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몇 년전 안해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난 뒤로 그는 술에 붙어 사는데 날마다 리태백이라고 대장이 나에게 말했다.”

농촌에서는 많은 조선족 “남정네”들은 이렇게 호매롭게 말한다. “마실 때면 푹 마셔야 해”.

도시에서도 많은 조선족들은 이렇게 말한다. "풀어야 할 때면 풀어야 하느니라".

석인구의 상해지식청년들은 함께 그때를 추억한다. 륙효천에게는 명월이와 정숙이라는 두 조선족 절친이 있었다. 이들 둘은 효천에게 “주머니에 일전이 남아도 다 써야 해. 머리삔 사러 가자” 고 말했단다.

신효민은 “조선족은 한푼이라도 생기면 바로 공소합작사에 가서 다 쓰고 온다”고 한 로인이 말했다고 추억한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시내에서 일하는 상해지식청년들은 연변의 소비관념이 너무 앞장에 섰다고 말한다. “동북은 밤이 길어 오래 오래 즐길 수 있다. 연변에서 모임을 하면 1차에서 끝날 때가 없다. 1차를 중식으로 하고 노래방에 가고 다시 양꼬치나 맥주를 마시고 그뒤로 또 커피점에 가거나 혹은 사우나 안마방에 간다. 이렇게 온 밤 쉴새 없이 즐긴다.”

한 연변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대여섯명이서 1차에 맥주집에 가면 잘 마시는 사람들은 4,5백원 쓴다. 늘 먹는 한국 불고기라도 두명이서 3,4백원은 족히 들어야 한다.”

사람들을 감탄게 하는 것은 “연변사람들이 값을 깍는 것을 종래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돈이 좀 남으면 바로 써버린다. 먹고 마시고 놀고 ... 래일은 어떻던 지간에 오늘 돈이 있으면 신나게 써버린다. 돈을 다 쓰면 팔 만 한 것은 팔아버리고는 또 돈 벌이를 나간다.”

요즘 소비시대에서 상해사람들의 과거의 지나친 "근검절약"은 소비를 촉진시키고 내수를 이끄는 데 불리하지만 부분적 상해지식청년들은 아직도 “장래에 대한 생각없이 오늘의 향락만 추구하는” 소비습관에 적응되지 못하고 있다.

넷째는 처세와 처사다. 연변사람들은 친구를 사귀는데서 남방사람들과 아주 큰 차이를 갖고 있다. 여기에는 석고문(상해 전통 주택)의 옛 골목에서 온 상해지식청년들도 포함된다. 가능하게 이는 연변의 광활한 평원, 삼림과 백산흑수의 거치른 대자연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연변 여러 민족 대중들이 상해 지식청년들에게 준 첫 인상은 그들 몸속에 배여있는 시원시원함과 불같은 열정이였다.

연변 여러 민족 친구들의 이런 성격은 상해지식청년들의 성격과 삼관(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성격과 습관이 형성되던 상해지식청년들에게 호방한 특징을 더해주었고 더우기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 홀로 타향에 온 ‘상해애들’에게 따뜻한 인정과 진정한 우정을 더해 주었다.

만강은 <초심을 잊지 않고 바다를 건너고, 거센 단련으로 조국에 보답하리>라는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을 사람들의 소박함과 진실을 느끼게 되었고 나도 진심으로 마을사람들과 친구로 되고 싶었다. 그곳에서 나의 성격이 만들어졌고 인생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태도가 형성되였다. 그 사랑스러운 동구촌 마을사람들에게 나는 평생껏 깊은 감사를 보낸다.”

1969년 화룡현 룡문공사 룡문 5대 집체호 상해지식청년들이 빈하중농 정해룡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진회민은 이렇게 추억했다. “6년이란 석인구의 생활은 나의 후반생에 토대를 닦아주었다. 나는 나의 짝을 만났을 뿐만아니라 인생관, 세계관과 가치관도 대부분 석인구에서 형성되였다.”

주봉은 이렇게 말했다. “화룡의 산과 물은 나를 키웠다. 화룡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커다란 흉금으로 나를 품어주었고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의 세계관이 형성되던 시기, 화룡의 여러 민족 인민들의 선량함과 호방함은 나의 피속에 녹아들었고 나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었다.”

전단은 이렇게 추억했다. “나의 20세 생일날에는 하늘에서 눈꽃이 날렸다. 향숙이네 집에서 책을 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천리밖에 있는 부모님들이 생각나 기분이 울적해났다. 내가 미미와 하소연하는 것을 들은 향숙이는 곧바로 자기 엄마를 보고 “풍성한” 생일상을 차려놓게 했다. 축복의 소리 소리마다에서 조선족 동네 사람들의 순박함과 호방함과 진정을 느끼며 나는 감동을 금치 못했다.”

연변의 여러 민족 친구들은 장백산 림구와 대초원을 누비던 사람들이다. 하여 그들 성격에는 들끓는 격정과 드넓은 호방함이 있으며 진정으로 친구를 대하는 따스한 정이 있다. 이는 상해지식청년들에게 독특한 매력을 주면서 ‘상해 애들’에게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많은 상해 지식청년들은 회억록에서 연변의 동네 어르신들과 마을사람들 그리고 연변의 친구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

훈춘현 마적달공사 오도구 상해지식청년 송애민은 조선족 할머니와 깊은 정을 갖고 있다.

훈춘국가세무국 부국장으로 있던 장근발은 상해에 돌아온 후 14년사이 해마다 훈춘에 친지방문을 갔다. 어떤 해는 한해에 두 번씩 갔다. “30년전에는 상해에 친지방문을 왔는데 30년뒤에는 훈춘에로 친지방문을 가고 있다.” 매번 음력설이면 그는 손글씨로 쓴 년하장을 동네 사람들과 령도와 동사자들에게 보내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하영근은 이렇게 말한다. "연변 사람들과 연변친구들을 향한 상해지식청년들의 감정은 수십년간 줄곧 그들 마음속에서 지워버릴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1972년, 안도현 서강1대 상해지식청년 석미정은 현지 아주머니들과 로동가운데서 서로 배우고 교류하고 있다.

4. 가무예술

연변은 민속 풍정이 짙은 소수민족 지역으로서 무형문화유산이 잘 보존되고 전승되여 있으며 사람마다 노래와 춤에 능하다. 이미 이름난 문화관광 브랜드로 된 조선족 예술은 군중문화 특색과 광장문화 특색이 선명한데 상해지식청년들은 이에 감수가 깊으며 수확이 크다. 당시 그처럼 빈곤한 년대일지라도 변경 산촌에서마저 그 풍채는 여전했으며 더욱 쉽게 상해지식청년들과 하나로 융합될 수 있었다.

진회민은 이렇게 추억했다. “그 년대에 당지 분들은 배도 불리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모두가 달관적인 인생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족은 선천적으로 체육을 즐겼고 노래와 춤에 너무 능했다. 밭머리에서든 온돌에서든 쩍하면 퉁소를 불고 북을 치며 노래와 춤을 즐겼다. 해마다 여름 끝자락에 기음이 끝나고 나면 대대에서는 학교 운동장에서 운동회를 벌이군 했다. 남자들은 축구경기와 씨름경기를 펼쳤고 녀성들은 그네뛰기, 널뛰기를 했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운동들로 운동회는 흥성거리기 그지없었다. 가난 속에서도 이러한 락관적인 정서는 우리를 감화시켰다. 우리들도 틈만 나면 악기를 다루고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즐겼다.”

1972년 여름, 연길현 상해지식청년 향미령은 마을사람들에게 문예종목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세기 70년대 초에 전국 각지에서는 ‘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를 조직했다. “1972년 여름, 석인대대에서도 일부 예술세포가 있는 상해 및 당지 지식청년들로 선전대를 무었다. 우리의 공연 종목이라고 해봤자 지금 보면 소 웃다 꾸레미 터질 정도로 촌스럽고 보잘 것 없었지만 당시 ‘청교도’식의 년대에는 우리의 공연 자체가 당지 분들에게 대단한 볼거리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시골에서 환영받았을 뿐만 아니라 부근 평정산 주둔 해방군 레이다 부대에 초청되여가서 공연까지 했다. 공연하러 산으로 오르면서 흥분으로 들떠있던 그 정경은 지금도 생생하다.”

훈춘시 경신진 금당촌의 왕건화는 〈금당 소분대〉란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대대에서는 모택동사상 문예선전대 소분대를 조직했다. 첫패에 상해지식청년 9명이 들었는데 남자 다섯, 녀자 넷이였다. 후에 상해지식청년 15명이 더 참가했다. 소분대의 설립은 농촌문화생활에서 하나의 큰 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농촌 사원과 지식청년들의 과외 문화생활을 풍부히 한데서 사원들과 지식청년들의 환영을 받았다. 공연은 봉페된 금당대대에 노래소리, 웃음소리와 갈채소리를 몰아왔고 사원들과 지식청년들 생활에도 즐거움과 함께 자아도취를 보태주기도 했다. ”

상해지식청년과 조선족청년들로 구성된 훈춘현 경신공사 금당대대의 문예선전소분대 

“소분대의 공연은 대원들의 정신면모를 탈바꿈시켰다. 상해지식청년들과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생활과 로동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에서도 하나로 융합되였다. 소분대가 점차 이름나면서 그 영향면도 나날이 넓어졌고 따라서 많은 사원과 상해지식청년 문예애호자들이 소분대에 가담해 자신의 장기를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찾았다.”

당시 소분대는 농촌과 농민 그리고 지식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근근히 초보적인 문화의 융합과 류입으로서 상해지식청년들의 문예재능이 충분히 보여지고 발전되였다. 잇달아 일부 상해지식청년들이 여러 현, 시 전문 문예단체에 모집되여가 무대골간 혹은 간판배우로 되였으며 어떤 이는 연변예술학교에 추천받아 가기도 했다.

1975년, 연변예술학교에서는 화룡, 연길, 훈춘, 안도현에서 상해지식청년 8명을 모집해갔는데 이들은 모두가 음악 혹은 무용 소양이 뛰여났었다. 이중에는 성악 고수도 있었는데 훈춘에서 온 장계방, 하묘귀가 그러했다. 이들은 농촌에 있을 때 늘 각급 문예공연에 참가해 관중들의 갈채를 받았고 졸업후에는 연변에 남아 연변의 문화 발전에 적극 기여했다.

1971년 가을, 비명염(费名琰)은 훈춘현문공단에 초빙되여 악대 연주원이 되였는데 악기 연주 련마에 고심한 나머지 동료들과 이야기할 때에마저 손가락이 늘 춤을 추군 하였다.

문예창작 골간으로 된 이들도 있다. 고범은〈안도 ‘홍등기’〉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통지를 받고 명월진에 도착해서야 내가 현의 양반극 보급 학습반 학생이 되였음을 알았다. 이 학습반은 30~40명 학생을 모집했는데 이중에 상해지식청년이 근 절반을 차지했고 다수가 골간이였다.

상해지식청년 수림제가 사원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내가 소재한 〈홍등기〉단편조는 세 주인공이 다 상해지식청년으로서 쇼왕, 쇼탕이 각기 리철매, 리할머니 역을 맡고 내가 ‘범 없는 골에 삵이 왕질’ 하는 격으로 리옥강 역을 맡았다. 회의에서 돌아온 후 나는 현문화국 창작조에 배치받고 정식 국가편제를 가지게 되였다. 이후 나는 문자창작 신분으로 늘 음악창작 한분과 무용창작 한분(일남일녀, 모두 조선족)과 함께 공사, 대대에 내려가 군중성 과외 문예활동을 위해 여러가지 종목들을 창작했는데 그런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였다.

상해지식청년들은 조선족 문화예술을 한층 발전 확대시켜 해란강반에서 황포강반에로 전해갔다. 상해에서 활약하는 훈춘지식청년진달래무용대, 연변상해지식청년홍형(虹馨)무용대는 연변 변강 문화를 황포강반에 날라다 상해 무대에서 이채를 돋구면서 변강 소수민족 문화 홍보와 선양에 큰 공헌을 했다.

장설진은 조선족 장고춤을 상해에로 전해갔다. 과거 길림성을 대표해 북경 전국문예 합동공연에 참가, 무용 〈장고와 상모〉로 금상을 안았던 그녀는 〈나의 장고, 나의 꿈〉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연변에서 나에게 장고춤을 가르친 이는 명망 높은 조선족 장고춤 전승자인 박선생님이였다. 이외에도 백선생님과 류선생님도 있다. 장고춤은 나를 도취시켰으며 나에게 꿈같은 아름다운 인생을 선물했다. 그래서 나는 늘 만족한 마음으로 감탄한다. ‘나의 장고, 나의 꿈’이라고.”

상해지식청년 장설진이 장고춤을 추고 있다.

주대방은 〈마음〉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감명깊게 쓰고 있다. “연변의 광활하고 비옥한 땅은 우리를 키웠고 연변의 문화는 우리 지식청년들 마음을 적셔주었다. 우리 나젊은 마음들에 연변 조선족 문화의 심리특징과 문화인상이 싹트고 자라나도록 했다. 상해에 돌아와서도 우리는 회억과 감회 속에서 조선족 동포들이 우리들을 대했던 깊은 정을 되새기며 그리워했고 조선족문화가 우리에게 남겨준 청춘의 기억을 음미하군 한다.

2018년 7월 6일, 동북아(중국연변)국제문화관광 보급주가 연변에서 개막되면서 상해지식청년홍형지원자예술단 일행 43명이 세 종목을 무대에 올렸는데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종목들은 ‘최우수공연상’을 받았으며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TV 및 여러 매체들의 주목을 받았다.

2018년 상해지식청년홍형지원자예술단의 수상장면

몇십년이 지나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상해지식청년과 연변 여러 민족 대중들의 문화오락 생활은 더욱 깊이있고 정채롭게 융합되여가고 있다. 리결사(李洁思)가 작사한 〈장고야 울려라〉는 가사가 부드럽고 자연스러워 조선족 언어의 자연미에 부합된다. 이중에 가사 ‘장’, ‘고’ 등 강조단어 및 ‘둥둥’ 등 의성의태어는 조선족 처녀들이 북소리에 맞추어 치마자락 날리며 훨훨 춤을 추는 모습을 생동하게 그려냄으로써 선률부분의 흥성한 장면을 한층 풍부히 하며 안받침해준다. 하여 지금껏 연변 여러 민족 군중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이는 이 노래가 예술감상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의 심각한 사회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벽하, 팽려원, 료창영의 열창을 통해 이 노래는 장백산 기슭에, 해란강반에 울려퍼졌다.

5. 체육경기

연변은 재래로 체육의 고향이다.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 혈액 속에는 한갈래의 격정이 끝없이 사품치며 살아 숨쉬고 있는 듯 싶다. 이는 이들이 락관적으로 향상하고 자강불식하는 동력이다. 빈곤한 년대일지라도 여러가지 체육 경기들이 끊일 새 없었다. 운동에 타고 난 재질이 있는 일부 상해지식청년들은 어려서부터 좁다란 골목이나 주민구역에서 축구를 차고 탁구를 치고 달리기를 해왔고 지어 소년체육학교에서 계통적인 양성을 받은 이도 있었다. 체육의 고향에 온 이들은 마치 물을 만난 고기와도 같았다.

1971년 전 주 군중체육운동이 왕성하게 발전했다. 상해지식청년들은 신속히 연변 각 현 과외팀에 가입해 경기에서 두각을 내밀며 본때를 보이기 시작했다. ‘9.3’운동회 탁구시합에서 상해지식청년 악국량,욱유운,호맹초가 남자 단식 경기의 1, 2, 3등을 차지해 당년 연변에서 소문난 스타 인물로 되었다.

상해지식청년 왕라선, 서륜, 고패군, 왕보발,진호, 류건국 등은 경신공사를 대표해 훈춘현‘9.3’운동회 축구경기에 참가했고 상해지식청년 왕결백, 반중억, 명매홍, 라혜연, 요화춘, 손란은 녀자롱구 주력으로 경신공사를 대표해 훈춘현‘9.3’운동회에 참가했다.

하다문공사에 하향한 최정(68기 고중)은 상해 포동구 소년체육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었다. 1969년에 하향해 1971년에 대대 녀자롱구팀에 들어 공사운동회에 참가했고 1974년에는 농림수팀에 들어 훈춘현운동회 륙상종목 경기에 참가했다. 1975년 현팀에 들어 전 주 운동회 륙상경기에 참가했으며 후에는 주팀에 들어 전 길림성 운동회 륙상종목 녀자 3항 전능 경기에 참가해 6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하다문공사 승리 1대에 하향한 리대문(68기 고중)은 상해 포동구 소년체육학교에서 훈련받았었다. 1969년에 하향해 1971년 대대 남자롱구팀에 들어 공사운동회에 참가했고 1974년에는 2경공업국팀에 가입해 훈춘현운동회 륙상항목 경기에 참가했으며 그후에는 훈춘현팀에 들어 전 주 운동회 륙상종목 경기에 참가해 표창 던지기 주 기록을 돌파하고 주팀에 가입해 전 길림성 제7회 운동회 륙상종목 경기에 참가했다. 1975년에는 여러 팀에 들어 현, 주, 성의 여러 종목 시합에 참가했다.

삼가자공사 서위자 7대에 하향한 호맹초는 상해시 홍교구 소년체육학교에서 훈련받은 적 있다. 1969년에 하향해 1971년 2월 중학교 체육교사로 되였고 당해 5월에 팀을 인솔해 훈춘현팀을 대표해 주 청소년 탁구 경기에 참가해 단체 1등과 남자 단식 1등을 안아왔다. 같은 해 6월, 팀을 이끌어 연변을 대표해 전 성 청소년 탁구 경기에 참가해 소년조 남자 단식 1등을 따내고 녀자 단체 4등, 남자 단식 2등, 녀자 단식 4등을 따냈으며 청년조는 녀자 복식 1등을 따냈다.

1972년 9월 주팀 코치를 맡고 팀을 인솔해 전 길림성 중학생 탁구 경기 소년조 시합에 참가해 남자 단체 1등, 녀자 단체 4등, 남자 단식 1등, 녀자 단식 4등을 안았으며 청년조 녀자 복식 1등을 안았다. 1974년-1975년에는 길림성팀에 뽑혀 남자탁구팀 코치와 지도원을 맡고 전국운동회 참전 준비를 했다. 1974년-1991년 제3중학교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기간 팀을 인솔해 여러 시합들에 참가해 통산 17차 수상했다. 1991년에는 국가체육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국가급 탁구 심판원으로 되였다.

1971년 5월 6일, 훈춘현 삼가자공사 서위자 7대 상해지식청년 호맹초(뒤줄 우6)가 현 체육학교 감독을 맡은 탁구팀의 수상 단체사진

연길현(지금의 룡정시)에 하향한 상해지식청년들을 주력으로 한 녀자롱구팀도 각 현 경기들에서 재능을 과시했다. 1971년 여름에 주팀을 설립하고 길림성 경기에 여러차 참가해 번마다 3등 안에 들었다. 이중에는 상해지식청년 5명이 있었는데 류기생(원 사범대학 제2부중 대장), 량덕영(홍구), 마재민(홍구), 왕재청(황포), 왕조해였고 이중 넷은 또 주력대원이였다. 전 성 시합을 거치면서 상해지식청년 대원 몇을 성팀과 성군구팀에서 눈독을 들인 데서 량덕영은 성롱구팀에 남고 기타 몇은 주에 남아 사업했다.

연변 남자배구 주력 몇명도 상해지식청년인데 후에 이중의 강신생이 국가팀에 수송되고 황의와 유요중은 성팀에 수송되였다.

연길현 세린하공사 문화 8대에 하향한 사평방은 1972년 연변한어사범(현재의 연변사범전과학교)에 추천받아 공부하고 졸업후 훈춘시제2실험소학교에서 체육교원으로 있었다. 그가 인솔한 륙상운동팀은 수차 훈춘시를 대표해 전 주 중학교 륙상종목 운동회에 참가해 전 주 소학조 단체 1등 4차를 따냈고 연인수로 12명이 소학교 100메터, 200메터, 1500메터, 3000메터 및 높이뛰기, 멀리뛰기, 표창 뿌리기, 포환 던지기, 원반 날리기, 4×400메터, 4×400메터 릴레이 등 종목에서 전 주 소학조 기록을 돌파했다.

화룡에 하향한 사국경, 장홍분은 1974년 화룡팀을 대표해 연변 배구, 탁구 시합에 참가한 후 연변대학 체육학부 ‘문화혁명’ 후의 첫 학생 모집에 합격되였다.

훈춘현 삼가자공사 서위자 6대에 하향한 리광요는 1968년 상해 홍교 체육학교 륙상팀을 졸업했다. 1971년 초에 훈춘현강철공장에 전근되여 훈춘현 롱구 련합팀에 가입, 훈춘현 련합 롱구팀을 대표해 돈화현에서 거행된 연변 청소년 롱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고 후에는 해마다 현롱구팀을 대표해 연변에서 롱구시합에 참가했다.

현에서는 훈춘현공업국, 현강철공장, 현술공장을 대표해 롱구시합에 참가했는데 전세기 80년대까지 이어졌다. 1974년에는 훈춘현공업국을 대표해 현운동회에 참가, 륙상종목중의 포환 던지기, 원반 날리기 경기에서 모두 1등을 따냈다. 같은 해 훈춘현을 대표해 연길시에서 있은 길림성 제7회 전국운동회 선발경기에 참가해 전 주 포환 던지기, 원반 날리기 경기에서 각기 2등을 따냈다.

훈춘현 삼가자에 하향한 하영근은 훈춘시제1소학교 체육교원을 맡고 학교 륙상운동을 전문 틀어쥐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학교는 련속 17년간 전 시 륙상경기 단체 1등을 독차지했고 2차 전 주 소학생 륙상 종목 단체 1등을 따냈으며 학생선수들은 전 주 기록 17차 돌파했다. 학교는 1981년 길림성교육위원회로부터 전 주적으로 유일한 ‘성체육전통학교(륙상)’로 평의되였다. 1990년에는 길림성 체육 전통 학교 ‘우수사업자’로 평의되고 체육교원으로서 체육 관련 론문 3편이 길림성 1등상을 받았으며 1984년에는 길림성체육위원회로부터 륙상운동 2급 심판원으로 평의되였다.

연길현 룡정진 조양공사 길성 4대에 하향한 악국량은 연변 탁구 경기 남자 단식 최우승과 연변 탁구 경기 남자 단체 최우승을 안았었다. 악국량은 코치로서 연변 탁구팀 꼬마대원들을 이끌고 여러가지 길림성 업여체육학교 탁구경기에 참가함으로써 연변 체육계에 대량의 후비력량을 양성했다.

상해지식청년들은 연변의 체육계에서 당지 인사들과 함께 ‘힘을 한곬으로 쓰고 땀을 한곳으로 흘리고 마음을 한방향으로 쓰면서’ 깊은 정을 맺었다. 더욱 보귀한 것은 체육정신과 문화의 융합으로서 연변 체육계에 탁월한 공훈을 세움과 동시에 연변 체육계에 하편 한편의 정채로운 이야기들을 남겼다.

1972년 5월 탁구팀 감독을 맡은 호맹초가 조선족농민의 아들에게 탁구를 가르치고 있다.

6. 언어문자

언어는 인류가 서로 교류하는데 쓰이는 도구로서 서로 다른 민족의 언어와 문자는 장기적인 생활과 로동가운데서 쉽게 교류되고 융합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해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있어서 언어문자는 쉽게 뛰여 넘을 수 있는 장벽이 아니였을 뿐만 아니라 더 큰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동북의 한어는 극히 친화력을 가진 언어로서 마치 일망무제한 대초원처럼 소박하고 순수하다. 동북사람들의 정취와 격정이 흘러 넘치는 그 말투에서는 대뜸 그 속에 담긴 친절과 진정을 느낄 수 있다.

“제가 연변에 처음 갔을 때 첫 반년은 그렇게 함께 일을 하고 생활하는 속에서 듣고도 모를 말 때문에 갈등도 많이 빚고 읏음거리도 많이 만들며 지냈다.” 한 지식청년이 당년을 회억하며 하는 말이다.

1970년, 상해지식청년 림민혜(가운데)가 다른 한 상해지식청년과 함께 조선족 교원인 마해선(좌1)에게서 조선어를 배우고 있다.

상해는 필경 이주민들로 구성된 도시로서 여러 지방의 언어들로 종류가 많다. ‘상해 애들’은 언어를 접수하는 면에서 어쩌면 타고난 천부적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해애들’은 동북말을 아주 류창하고 원만하게 그리고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익혀 나갔다. 그런데 조선족언어를 배우는 면에서 ‘상해애들’은 이상야릇함을 느꼈을 뿐만아니라 더 깊은 미련에 빠졌다.

상해지식청년들은 조선족사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어를 배워 나갔다. 조선어는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주어, 보어, 술어 순서로 구성되여 있고 한어의 어순과는 반대로 되여 있는 바람에 많은 웃음거리를 만들어 냈다.

서문화는 《오도구골에서의 나날들》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우리가 연변에서 한 연변식 대화들은 모두 거꾸로 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일본사람들이 중국어를 배우는 식이였다.”

림일평은 조선어를 배울 때 조선어의 경어에 대해 특별히 연구를 하였다. “로인들에 대한 존경은 조선어 어법에 침투되여 있는 바 례하면 로인이나 부모들에게 말을 건넬 때는 반드시 경어를 써야 하는데 경어의 주요표현형식은 동사의 어미에 변화를 두어야 한다. 한어에서는 로인에 대한 경어를 쓸 때 ‘어르신’이나 ‘당신’과 같은 칭호로 명사나 대명사를 바꾸어 존경의 뜻을 나타낸다. 내가 마을의 또래들을 따라 조선어를 배울 때 자아 감각이 매우 좋았다. 특히 그런 경어들을 배워고 익힐 때 신경을 도사려 참답게 모방하면서 배웠더니 후에는 아주 스스럼 없이 표현할 수 있었다. ”

필경은 서로 다른 언어이기에 서로 접촉하고 융합하는 과정에 적지 않은 웃음거리를 만들어 냈다. 옥보발은 《조선족친구 집에 손님으로 갔을 때》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남주인공 김인수는 조선족과 상해지식청년들이 문화적인 교류를 하고 서로 왕래하던 일에 대해 아주 생동하게 들려 주었다. 상해지식청년들은 훈춘에 하향하여 정착한 뒤 조선족들과 매일같이 조석으로 마주하며 접촉하는 과정에 서로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름으로 하여 쉽게 오해를 가지게 되였고 또 많은 웃음거리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는 실례를 하나 들었다. “상해말에서 ’你憨大’를 우리 조선족들은 ‘니 감동이다’로, 상해말에서 ‘你还来’를 조선어로는 ‘진달래’로 착각한다는 것이였다. 그는 상해말도, 표준말도 하고 거기에 손짓까지 해가며 얼마나 생동하게 말하는지 그 자리에 있던 상해지식청년들은 모두 배를 그러안고 웃었다. “

조선어는 또 많은 외래어도 흡수하고 있는데 특히 상당한 부분은 한어음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많았다. 조선어의 자모에는 권설음과 얼화음이 없는 면에서 상해말의 발음과 비슷한 점이 있다. 마치 각자 혀의 구조가 비슷한데서 오는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것 같다. 주대방은 조선어를 배우는 과정에 “아주 기이한 정황을 발견하였다.”고 하였다. 조선어와 상해말의 어떤 발음은 너무 비슷하거나 같다는 것이였다. 례하면 ‘가도’ ‘장강’ ‘두만강’ ‘의사’ 등과 같은 단어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어의 ‘빨리’ ‘빨리’를 달리 표현하는 방언으로 ‘어서’ ‘어서’는 상해말의 향토적 표현과 아주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어에는 한어자모의 ‘f’자에 대한 발음이 없기에 많은 ‘f’자 발음을 한어의 ‘b’와 비슷하게 발음한다고 한다. 범문발(范文发)은《백산흑수》라는 글에서 “당지의 많은 로인들은 나의 이름자 ‘범문발’을 발음이 잘 안되여 팔모팔(八毛八)이라고 부르군 하여 많이들 웃었다”고 했다.

이로부터 조선어는 상해지식청년들의 깊은 흥취를 자아냈고 탐구해 볼 욕망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전단은 《나의 조선어선생님》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추억을 적고 있다. “길림성 연변의 하룡촌에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당지의 주민들은 대부분 조선족들이여서 조선어를 배우는 것은 우리 지식청년들의 필수과로 되였다. 일반 대화는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몇달간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언어장애를 없애고 교류가 스스럼 없이 되였다. 아마 가정에서 받은 교양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크나큰 신념과 동경을 안고 하나의 결정을 내렸는데 바로 꼭 조선족문자까지 배워내리라 작심하였던 것이다.”

방배인은 또 이렇게 회억해서 쓰고 있다. “나는 연변에 있을 때 조선어에 깊은 흥취를 가지게 되였다. 일정한 언어기초를 닦은후 상해에 와서도 자습을 견지하였고 조선족언어를 장악한 덕분에 퇴직할 때까지 언어와 관련된 사업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언어기초는 마을의 조선족처녀들과 함께 로동하면서 배운 것이다. 그때는 언어장애가 있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발음절주에 따라 갈 수만 있으면 쓸말 몹쓸 말 가리지 않고 다 배워냈다. 이렇게 일정한 조선어기초를 닦고 보니 그것이 나의 사업에서 든든한 보장이 되였던 것이다.”

진설홍은 연길현 용신공사 용천대대 집체호에 내려와 농사를 짓게 되면서 언어장애로 많은 곤경도 겪었지만 또 조선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였다. 그는 이 유리한 조건을 충분히 리용하여 조선어를 배우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에서 공부를 하면서 그는 조선어수준을 제고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족문학예술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데 질적인 비약을 가져왔다. 1977년 그는 연변연극단에 전문 번역창작일군으로 전근하였다. 이때로부터 그는 조선족문학예술을 번역하는 기나긴 생애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조선족문학예술을 번역하는 실천 속에서 진설홍은 자신이 종사하는 사업에 대해 심각한 인식을 가져왔다. 생활관념과 가치관념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온 지금에도 진설홍은 여전히 조선족문학예술사업에 열정을 쏟아붓고 있으며 고행승처럼 번역사업에 열중하면서 지칠줄 모르고 있다. 그는 늘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조선민족과 조선족문학예술의 정수는 언녕 나의 마음과 골수에 깊이 슴배여 있다. 우리가 민족과 민족사이의 단결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너무 거리가 멀다. 민족융합을 강조하는 것이야 말로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관건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종사하고 있는 번역사업이야 말로 곧바로 민족융합을 강조하는 문화점착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많은 지식청년들은 연변에서 쌓은 경력과 정분을 소재로 책들을 출판하며 자신들의 정감을 표달하였다.

1976년 연길현 용신공사 용천대대에 하향했던 진설홍은 첫 번역 작품으로 조선족민간이야기 “해란강”을 전국성문예잡지에 발표하였다.

상해지식청년 진설홍

안도현에 하향했던 고범은 복단대학관리학부를 졸업한 후 첫 작품으로 생산대에 하향했던 생활과 관련된 옛 정을 그리는 문장을 써냈다. 고범은 글에서 당년의 그 세월에 대한 깊은 사고를 피력하였다. 그의 산문은 시각이 신선하고 착안점이 교묘하며 합리적으로 분류하고 사실적으로 말하면서 변증분석과 론리성, 반사유적인 총화로 색채를 구사하였다. 이로써 한 세대인들의 성장이 시대적 환경적 영향을 크게 받게 됨을 총괄하고 있다.

훈춘현 경신공사 조양3대에 하향했던 지식청년 작가 범문발은 1977년 길림대학 중문학부에 입학하였고 일찍 대학교 교사로 강단에 섰다. 그는 섬세한 감정세계와 풍부한 련상으로 창작에 몰두하였으며 문학기초가 튼튼하고 시문에 능란하였으며 여러 종류의 문학체재의 작품들을 써냈다. 생산대에 하향했을 때부터 그는 많은 시가를 발표하였다. 그는 “두만강의 노래”에서 강한 서정과 풍부한 련상으로 조국변강 두만강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고 “나는 그대들을 그리노라---” , ”계수방” 등과 같은 시들은 세절이 생동하고 진정이 넘치며 서정이 무르익고 있다. 그가 쓴 시 “와룡촌”, ”대채를 따라 배우는 장려한 화폭” 등은 일찍 연변일보에 발표되였다. 1973년 그는 연변일보 실습기자 시절 연변의 각지를 취재하러 다니며 “서가산 사람들”이라는 문장을 발표하였다. 이 문장은 후에 길림일보에 전문이 전재되였고 보도1등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연변의 지식청년들 속에서 가장 일찍 기전체형식으로 지식청년들의 생활을 반영한 작가이다. 그는 일찍 1995년부터 30만자에 달하는 실화문학 “광명행”을 책으로 출판하였고 1998년에는 실화문학 “백산흑수-한 상해지식청년의 진봉일기”를 주해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2006년에는 20만자에 달하는 교육총서 “자성자신자존”이라는 책자를 남방출판사에서 출판하였고 2014년에는 또 30만자에 달하는 실화문학집 “다시 상해사람으로 되다”는 책자를 중국문련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연길현 연집공사 남계3대에 하향하였던 오소구는 소몰이, 돼지몰이, 과수원 지키기, 밭농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세번이나 저승문전까지 갔다가 살아 나온 행운아다. 그는 어릴적부터 문학에 깊은 애착을 느끼고 있었는데 후에 연변대학 중문학부 한어언어문학전업을 졸업하였다. 그는 연변대학 학보문학편집을 맡아하고 연변대학출판사 부총편, 연변대학 중문학부 고대문학 부교수를 담임하였다. 1984년 6월 “’열하일기’와 만족민속”이라는 론문을 발표한 후 선후로 40여편의 학술론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선재하고 주필을 맡은 10여부의 저서로는 “중국꿈 이야기””기몽대관””애국시사100수 흠상과 분석””중국력대명사””대만백문”등이 있다. 그외에도 산문집으로 “나와 남계””남계어림”등이 있으며 산문 “고촌상영”과 ”고향의 변화”는 각기 중국산문학회, 중국산문창작중심에서 주최한 2011년, 2012년 전국산문작가심포지엄 응모에서 2등상을 수상하였다. 작품 “장백산에 처음 올라”는 중국문련출판사에서 펴낸 “2010중국산문경전”등에 편입되였다.

안도현신합공사 서한 2대에 하향했던 윤흥암은 1978년에 상해로 돌아갔다. 2008년 10월 그는 중국국제문화출판사를 통해 “농당등화”를 출판하였고 “지붕아래문학”넷에 실화 “도리겁”을 이미 30여편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연변에 하향했던 잊을 수 없는 지식청년시절을 진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2012년 7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60돐을 기념하여 상해지식청년 기수견, 범문발, 조평생, 전립방 등 4명은 자비로 훈춘에 취재하러 왔다. 연변조선족자치주와 훈춘시의 부분 지도자들과 친구들이 열정적으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훈춘에 있는 상해지식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자금을 모아 그해 12월 범문발과 전립방이 주필을 맡고 “변강도시에 활짝 핀 진달래”라는 책자를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2012년 12월에 범문발, 김립방이 주필을 맡은 도서 <변강도시에 활짝 핀 진달래>

2013년 1월 30일, 훈춘시 당위와 정부에서는 상해지식청년들에게 보내는 감사편지에서 “변강도시에 활짝 핀 진달래”는 훈춘을 선전하고 훈춘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며 훈춘의 영향력을 과시하는데 적극적인 추진역할을 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때 그 세월을 생동하게 반영한 상해지식청년들의 작품들은 중국문학의 비옥한 터전에 떨기떨기 피여난 꽃들로서 모두 독특한 향기를 풍기고 있다. 이런 작품들에서 묘사된 연변지식청년들의 하향생활은 모두 신문학에서의 지식청년문학에 풍부한 순수자료를 제공하였다. 이런 문학작품들은 비록 보통지식청년들의 하향생활을 반영하였지만 그 작품들은 어디까지나 진실하고 선량하며 아름다움으로 지식청년들의 성장을 엮어 나아가면서 상해지식청년들과 연변문화의 융합을 펼쳐낸 것이다.

만족은 연변 원주민의 하나이기도 하다. 만족문화는 연변대지에서 빛뿌리는 하나의 명주이다. 상해지식청년 왕홍강은 일심으로 만족문화에 투신하여 샤머니즘과 동북민족문학,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그는 만족문화와 문학에 집중하여 풍부한 정분을 쌓았으며 연변의 만족문화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다.

훈춘현 영안공사에 하향했던 기수견은 연변의 만족문화를 참답게 고찰하고 만족문화가 장백산문화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장백산문화 또한 길림문화의 생명원천임을 체험하였다. 그는 딸 하녕과 함께 훈춘에서 만족문화산업의 보물고를 열어가는 탐색을 하였으며 만강의 열정으로 연변의 다민족문화의 융합을 촉진하기에 힘썼다.

7. 로동실천

생산대에 분배받으면 우선 로동을 잘 하는가에 관심을 돌리는데 어려서부터 동북농촌을 보지 못했던 상해지식청년들에게 있어서 이는 하나의 준엄한 시련으로 된다.

눈속에서 수확하고 땡볕에서 삽질하며 얼음같이 찬 물에서 모내기를 하고 거름을 파내 비료를 만들며 동굴을 파고 화약을 묻어 남포를 터치우며 굴속에 들어가 석탄을 파내는 등 하늘땅과 싸우는 대회전을 이어가야 했다.

1969년, 화룡현 상해지식청년들이 상해에서 증정한 뜨락또르에 타고 넓은 벌을 달리고 있다.

진회민은 이렇게 말했다. “석인구에서 ‘하늘땅과 싸울’ 때 그 고생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으나 그것은 오히려 ‘고생으로 의지를 단련하고 로동으로 뼈를 굳히며 배고픔으로 몸을 단련하고 허전함으로 신체를 달래는’ 역할을 놀았다. 도시들에서 온 지식청년들은 중국의 농업, 농촌과 농민을 료해하고 시야를 넓히고 의지를 단련하였으며 심신이 건전하게 되였으며 우의를 돈독히 하게 되였다. 이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말하면 모든 지식청년들의 귀중한 재부이다. 이런 경력이 있기에 후날 어떤 어려움에 부딪쳐도 우리는 태연하게 대처할수 있었다.” 상해의 지식청년들은 농촌에서 고생을 무릅쓰고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였는데 과학적으로 농사를 짓고 과감히 혁신하여 매우 큰 효과를 거두었다.

훈춘 소반령대대의 상해 지식청년들은 대담하게 생각하고 대담하게 일하는 정신을 발양하여 고한산구에서 1무 반의 벼를 시험적으로 재배하여 성공하였다. ≪연변일보≫는 “소반령 건설” 이라는 제목으로 장편통신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10월 11일 ≪길림일보≫는 “대담하게 실천하여 큰 성과를 거두다- 소반령대대 상해지식청년이 벼를 시험재배한 사적”이라는 제목으로 이 보도를 게재하였다.

1970년,훈춘 소반령대대의 상해 지식청년들은 고한산구에서 1무 반의 벼를 시험적으로 재배하여 성공하였다.

연길현 지신인민공사에 내려간 석토영은 영양단지로 말이빨 옥수수를 재배하는 방법을 혁신하였는데 옥수수를 심은후 비닐박막으로 덮었다가 작은 싹이 나온후 새로 개간한 제전으로 옮겨 파종하여 생산량을 크게 제고시켰다. 공사당위에서는 이를 위해 현장대회를 열고 적극 추천하였다.

1972년, 룡정현 지신공사 상해지식청년 석토영(우)는 말이빨 옥수수를 재배하는 방법을 혁신했다.

조양천 길성10대의 상해지식청년들은 하향 첫날부터 기획하기 시작하여 2년이란 시간을 들여 상해로 몇차례 오가면서 학습하고 조작하여 외진 산골에 소형수력발전소를 세워 전기를 사원들에게 선물하였다. ≪해방일보≫, ≪문회보≫, ≪해방군보≫, ≪길림일보≫, ≪연변일보≫의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관련 신문에 전면 혹은 큰 편폭의 보도를 발표하였고 일부 매체들에서 그것을 전재하였는데 길림라지오방송국 지식청년프로도 그들을 초청하여 록음하고 며칠동안 방송하였다. 집체호는 연변주와 연길현의 지식청년 선진집체호로 선정되였고 지식청년 선진전형으로 되여 길림성 지식청년 상해회보단에 참가하였으며 상해에서 여러차례 강의하였다. 각지의 지식청년들은 분분히 편지를 보내 왔는데 고무격려하는 내용도 있었고 찬탄하는 내용도 있었으며 소형발전소건설을 호상 학습하는 내용도 있었다.

혜홍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형수력발전소는 우리를 지식청년 생애의 최고의 경지에로 이끌어 갔다. 이렇게 급작스레 찾아온 영예는 우리로 하여금 지불한 대가만큼 보답이 온다는 도리를 알게 하였다. 귀중한 것은 지난 2 년간의 노력과 분투는 우리의 의지를 단련시켰고 허다한 사원들의 정신과 의식을 따라배웠을 뿐만 아니라 일정한 공농업기술과 지식 및 하늘땅과 싸우는 견인한 품성을 따라배우게 하였다. 이런 물질과 정신적인 성과는 우리들의 금후 생활과 사업을 위한 아주 좋은 밑거름으로 되였다.”

8. 인재양성

상해지식청년들은 대도시의 문명과 문화를 가져왔고 페쇄된 농촌에 결핍한 교원 자원을 가져왔으며 변강건설을 위해 지식을 바쳤다. 비록 1970년대 “문화대혁명”시기에 “독서무용”이라는 론조가 란무하였지만 연변의 사람들은 여전히 지식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1971년후 대량의 상해지식청년들이 농촌의 대리교원으로 되였거나 직접 정식교원으로 초빙되였다. 지식청년 교원들은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줄이고 낡은 풍속습관을 바꾸도록 인도하였으며 각지 변강농촌의 사회환경 변화에 거대한 작용과 역할을 발휘하였는바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하는데 대체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으며 그들의 학생들도 사회주의 새 농촌에서 가장 생기가 넘치는 력량으로 되였다.

서선정은 “넓은 밭에도 우리의 발자취가 남아 있고 아이들에게 문화를 주고 지식을 주는 시골의 산길에도 우리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그곳에는 우리가 흘린 눈물도 있고 우리가 흘린 땀도 있으며 힘들었지만 감미로운 추억도 있다.” 고 회억했다.

1973년, 연길현 장안공사 상해지식청년 서선정이 하룡학교에서 민영교원으로 있었다.

로이군은 안도현 소사하공사 동남대대 소학교에서 교사로 있었다. “아이들이 책을 외우는 랑랑한 소리와 애티가 가시지 않은 노래소리는 마당에서 일하는 사원들을 놀라게 했다. 집에서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아이가 학교에 온지 며칠 되지 않아 큰 변화가 생기자 칭찬하는 소리가 자자했다.”

양영흠은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 “마침 ‘문화대혁명’시기라 교원이 상당히 부족했다. 대도시에서 온 고중생들은 인민공사 령도와 학교 책임자의 중시를 불러 일으켰다. 나는 롱구운동을 잘했고 게다가 평소에 선생님들과 교류가 많아 중학교선생님의 눈에 들었다. 그리하여 1971년 음력설후 나는 당지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첫 상해 지식청년으로 되였다.”

광범한 농촌학생들은 줄곧 자신의 지식청년선생님을 잊지 않고 지식청년선생님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 이라고 불렀다. 서선정이 2009년 소하 룡을 방문할 때 그의 학생들은 “서선정 선생님의 고향방문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프랑카드를 길게 내걸었다. 차가 멈추어 서자 학생들은 서선생님과 부인에게 각각 꽃다발을 드렸으며 주위에서 열렬한 박수소리가 터졌다. 학생들과 포옹하는 서선정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였다. 지금도 서선정의 머리속에서 가장 인상이 심각하고 잊기 어려운 것은 시골 민영교사 그 시절이다.

훈춘현 경신향 구사평초등학교에서 수년간 교사를 지낸 적이 있는 계운하는 《만추의 풍채》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상해지청년교원들은 도시문명과 문화를 농촌에 가져갔다. 현재 수많은 당지 간부는 당년 지식청년교원들이 가르친 학생들로서 그들의 공적은 이미 사책에 기록되였다.” 이미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상해지식청년교사가 가르친 학생들은 당시 지식청년 교사가 전파한 지식과 문명의 불씨로 눈을 떴으며 그들은 대공업과 세계와 래일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그들중의 많은 사람들은 이미 사회 각 분야의 우수한 인재로 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의 지식청년 선생님을 잊지 않는다. 그들은 현대문명의 전파자이다!

통계에 따르면 연변대학에 입학한후 학교에 남아 교사로 된 상해지식청년이 근 100명에 달하고 연변의학원을 졸업한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은 상해지식청년은 60명에 달하며 연변재정무역학교를 졸업한후 교편을 잡은 상해지식청년은 20 여명이다.

상해지식청년 설구지는 1974년에 연변재정무역학교에 추천되여 공부하며 학문을 닦았다. 2 년후 졸업할 때 학업이 뛰여나고 품행과 성적이 우수하여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게 되였다. 그는 재정무역학교 교사로 근무하여 1년 만에 연구실 부주임으로 발탁되였고 그후 연변의 전문교육을 위해 기여했다.

훈춘에 줄곧 남아있던 상해지식청년 정운지는 39년간 아무런 원망도 없이 농촌중학교의 일터를 지키면서 자신의 꾸준한 노력으로 국가 부교수급 직함인 중학교 고급교원으로 되였다. 정운지는 이렇게 말했다. “수요만 된다면 어데가나 모두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정운지는 학생들을 특별히 사랑하였는데 낮에는 학생들에게 수업을 해주었고 저녁에는 많은 학생들을 자기의 숙사에 불러 보충수업을 해주었다. 동시에 학생들한테서 조선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과 특별히 사이가 좋았는데 지금까지도 많은 학생들이 그를 찾아온다. 학부모들도 그의 사업을 인정하였는바 특별히 그를 존경하고 서로간에 허물없는 사이로 되였다.

하영근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손거공은 얻기 어려운 인재로서 인품이 특별히 좋고 인맥도 특별히 좋았는데 업무도 매우 뛰여나 연변에서 소문 높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손거공은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대학의 객원교원으로 회계학원리와 상업회계를 강의하였다.

공교롭게도 편찬위원회는 대부분 연변에서 글을 가르치고 인재를 양성한 경력이 있다. 서선정은 1971년초 소하룡학교에서 민영교원으로 되였는데 《길림일보》는 그를 촬영보도도 했다. 그는 1985년 텔레비죤대학을 졸업하고 텔레비죤대학의 교사가 되였다. 하영근은 1971년 4월에 소학교 체육교원으로 임명되였고 그후 교육계에서 38년간 사업하면서 고급교사가 되였다. 소준봉은 1974 년에 안도현 송강중학교에서 대리교사로 있었는데 자신이 아직 배우지 못한 물리학과를 자습하면서 초중 2학년 물리학과를 3년 가르쳤다. 그는 “지금까지 나의 일생에서 제일 수확이 큰 시기라고 생각한다.”고 그때를 회억하였다. 오소요는 연변대학을 졸업한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았으며 교수로 되였다. 장리경은 연변재정무역학교를 졸업한후 품행과 학문이 모두 우수하여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게 되였다. 1981년부터 1982년까지 그는 80년급 통계전문반 학생들을 이끌고 두번이나 전 성 통계학과 통일시험에서 1등을 따내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재정학교에서 “우수교원”으로 선정되였다. 주배흥은 80 년대초, 대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강단에 올라 다음기 학생들에게 겸임수업을 하였다. 상해의 지식청년들은 재교육을 받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고 글을 가르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전환점으로 연변의 인재양성과 장원한 발전을 촉진하는 것을 종점으로 간주하였다. 상해지식청년 교사들은 자신의 심혈과 땀으로 연변대지에 부지런히 물을 주고 새싹을 배육하였다. 상해지식청년들과 연변의 문화 융합은 대대로 전해져 내려가야 할것이다. 

9.혼인가정

혼인가정문화는 민족문화의 기초이다. 연변특색이 있는 혼인가정 문화는 세계 각국, 여러 민족의 공동한 특점과 법칙이 있을뿐만 아니라 선명한 민족적 특징도 있고 뚜렷한 연변특색도 있다. 우리 나라는 통일된 다민족국가로서 력사적인 연고와 원인으로 말미암아 각 지역마다 각이한 민족간의 풍속습관과 혼인풍속도 완전히 다르다. 연변은 문명 정도가 상당히 높은 지역이며 부동한 민족간의 결혼은 정상적인 혼인방식이며 또한 민족융합의 시대문명표징일뿐만아니라 인류사회의 공동한 발전법칙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상해의 지식청년들은 당지의 한족은 물론 조선족, 만족, 회족 등 여러 민족들과 사랑의 열매를 맺었으며 행복한 가정을 더불어 꾸려 나가는 일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였다. 상해지식청년들은 연변의 각자 특색을 가진 가정생활들에서 상해지식청년과 연변 지역문화의 전면적인 융합을 촉진하면서 상해지식청년과 연변 여러 민족 군중들사이 두터운 감정과 서로 융합된 가정문화를 보여 주었다.

상해지식청년들이 조선족과 짝을 무은 사례는 헤아릴수 없이 많다. 지금 이미 몇십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결합은 연변에서 아름다운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림제와 조선족 남편의 혼인은 서로 융합되여 더욱 행복했다. “나와 정윤의 사랑은 순결하고 진실하다. 사랑에는 경계선이 없다. 진실한 사랑은 기적을 만든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장점은 긍정하고 허물은 덮어 감추면서 쉽게 이뤄지지 않은 가정을 열심히 경영해왔다. 모순이 있을때는 되도록이면 참았고 론쟁이 있을때면 가급적 순종했다. 나는 자신의 실제행동으로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훌륭한 조선족며느리로 될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나는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조선족의 모든 료리를 만들수 있는 재간을 배웠고 타인을 사랑하고 또 내가 사랑받는 생활속에서 진정으로 녀강자, 민족단결모범, 선진사업일군으로 되였다. 나는 세 명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키워 사회에 기여하였다. 나는 조선족 남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간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상해지식청년 수림제와 조선족남편에게는 자식 3명이 있다. 이는 아들이 6살때 가족사진이다

진설홍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족에 대해 말할 때 나는 그들을 알게 되여서부터 열애하고 떨어지기 어렵게 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은 나를 상해에서 온 한족 지식청년으로부터 조선족의 사위로 모습을 바꾸게 하였다. 나의 안해는 동북사범대학 중문학부의 조선족 졸업생으로서 류창한 한어를 구사할수 있다. 나의 외동딸은 조선족 유치원과 소학교에서 공부하고 초중부터 한족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한어도 마찬가지로 아주 우수하다. 한어로 교류하는것은 우리 집에서 어떠한 불편과 장애가 없다. 하지만 우리 집 일상용어는 조선어로 가득 차있으며 특히 집안은 짙은 조선족생활분위기로 흘러 넘치고 있다”

하영근도 깊은 체험이 있었다. “일종 부부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손잡는 그 순간부터 결혼하고 함께 가정을 꾸려나가기까지 그들은 상대방을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살았다. 그들은 비록 혼인에 대한 맹세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만 기나긴 인생길에서 평탄함과 간난신고를 모두 함께 겪어오면서 서로 손잡고 맞추면서 살아왔다. “

상해지식청년의 안해인 동숙금은 이렇게 회억했다. “나는 남편이 매우 자랑스럽다. 인생길에서 남편 같은 훌륭한 사람을 만난 것이 나로서는 행운이다. 남편은 상해지식청년으로 20 살때 안도에 왔고 수십년간 부지런히 일하면서 사업에 적극적으로 기여했으며 고생속에서 근면하게 살림을 꾸려 왔다. 자식에겐 인자하면서도 엄했고 부모에겐 효도하고 안해에게 따뜻한 사랑을 주었다. 사람됨이 충성스러웠고 남을 너그럽게 대했으며 자신에게는 엄하게 요구했으며 성실하게 일하고 청렴하게 처사했다. 그는 건강한 가정문화를 창조해 화목하고 청렴한 가풍을 형성하였다. 이는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값진 정신적 재부이다”

혼인은 부부 쌍방의 서로간 영향과 융합일뿐만아니라 대가정 문화의 상호 영향과 융합이기도 하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것은 대가정속의 한 연변장인이 상해 지식청년 사위에게 준 영향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는데 간절한 기대가 있었 뿐만 아니라 경종도 있어 상해 사위에게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서선정은 장인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인어른의 몸에서 나는 정직하고 사명을 다하는 중국공산당 기층간부의 빛나는 형상을 보았다. 장인에게서 청렴하고 티끌만치도 오염되지 않은 진정한 공산당원의 형상을 느껴보았다. 장인의 형상은 무형중 나에게 영향을 주었고 금후의 나의 사업생활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장리경의 마음속 장인은 마치 큰 나무와 같았다. 봄에는 큰 나무처럼 환상에 기대여보고 여름에는 무성함에 기대여 보고 가을에는 성숙에 기대고 겨울에는 깊은 사색에 기대여보게 하는 바로 그런 느낌이였다.

“장인은 나에게 요구가 아주 엄격하였다. 80 년대, 나는 재정무역학교에서 세무국에 전근하여 일했다. 5.1 절 방학에 갔는데 장인은 나에게 특별히 ‘업정어근 (业精於勤)’이라는 글을 써주면서 내가 업무를 깊이 연구하고 청렴결백하게 사업할것을 격려하였다”

가정문화는 일종의 무형적이고 잠재적인 힘이며 다음 세대에 대해 은연중 감화하는 과정이다. 량호한 가정문화 분위기는 다음 세대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등 3관교육에 관계되기도 한다. 방천은 상해지식청년 2 세로 어려서부터 아버지세대가 땀흘리면서 가꾸어 온 삶의 터전에서 살아왔다.

그는 열성적으로 애심자원봉사를 펼쳐왔다. “나는 사람들을 도와주길 즐기며 애심사업의 새싹을 창도하고 있는데 이는 어릴 때 받은 영향때문이다.” “10 년래, 비록 상해로 돌아가 사업할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이곳을 떠나기 싫었다. 부모가 본보기가 되여 사랑의 기여와 애심의 계승을 영향주었기때이다.” “우리의 가정문화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다. 우리 가족은 사랑은 계승되고 영향준다는 것을 확신하며 주변 사람들을 이끌고 긍정적 에너지를 전달하며 더욱 큰 사랑을 만들어 나갈것이다”“

상해지식청년들의 연변에서의 혼인 다원화 모식은 현대문명 기풍의 시대적인 변혁으로서 객관적으로 문화융합의 플랫폼을 형성하였는바 가정문화는 더욱 다양한 형식과 전방위적으로 융합되였다.

10. 회귀의 길

반세기나마 ‘상해지식청년’과 연변 여러 민족 친구들과의 오고가는 정은 날로 깊어졌고 래왕은 더 한층 빈번해졌다. 소준봉은 연변에 있을 때나 상해에 있을 때나 해마다 연변의 ‘친선사절’을 정성껏 맞아 들이고 바래는 일을 얼마 하는지 모른다. 종래로 페스럽다 생각하지 않고 지금은 지어 집 한채를 전문 연변에서 오는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사용하도록 내놓았다. 또한 그는 휴일을 연변손님을 접대하는 데에 썼다. “매번 이런 일을 봉착할 때면 나는 있는 힘껏 도와 나서는데 그 먼데서 상해에 와 병 보인다는 게 쉬운 일 아니란 걸 난 알고도 남음이 있다. 엄청난 경제적 지출을 감당해야 하는 환자와 가족의 정신적 압력이 클 것이다. 돈을 내놓아 도울 수 있는 건 나한테 한계가 있지만 나는 애써 그들이 지출을 줄이게 할 수는 있다. 이를테면 그들을 우리 집에 머물게 하면서 숙박비, 식사비를 절약하게 하고 그들이 공공교통을 리용하게 함으로써 교통비도 아끼게 하고 환자한테 입에 맞는 영양식도 해줄 수 있으니까. ”

연변을 떠난 후 상해지식청년들은 분분히 그들이 원래 농촌에 내려갔던 곳에 가서 문안 및 위문을 진행하고 동네 어르신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은혜와 감사를 표하군 했다. 2005 년 5 월, 원 연길삼도공사 동구촌에 하향했던 상해지식청년들은 6 년간의 준비를 거쳐 일행 12 명이 함께 당년에 내려왔던 생산대를 방문하였다. 그들은 노트북 2 대를 자비로 구매하여 마을사람들에게 증정하였다. 2009 년 손월방은 예전에 일했던 훈춘1소에 컴퓨터 2 대를 증정하였다. 2011 년 7 월 15 일, 만강은 연길국가고신기술개발구가 간판을 제막한 후 재차 연변을 시찰하고 연길시 삼도만진 중심위생원에 의료설비를 증정하였으며 그해 그가 편입됐던 삼도만 동구촌의 마음사람들과 친절하게 좌담을 나누었다. 2012년, 예전에 왕청 백초구 평안 3 대에 하향했던 상해지식청년 성조환, 장헌화, 장패화, 가문의는 함께 하향했던 농촌에 돌아 온 적 있는데 마을에 활동실이 없는 것을 보고는 자발적으로 4 만원을 모아 마을에 80 여평방메터 되는 주택을 구매해줌으로써 촌의 오락장소를 해결해주었다.

2009년 8월 상해지식청년 손월방, 주배흥이 훈춘상해지식청년들을 대표하여 훈춘시 관계부문에 성금을 전달했다.

일찍 1995 년에 화룡현 동성공사 광동 2 대에 하향했던 상해지식청년 백문례 (원 상해시통전부 처장)는 와룡향 와룡중심소학교 학생 허철복을 옹근 10 년 동안이나 후원해줌으로써 그가 소학교 3 학년부터 고중 졸업까지의 학업을 마칠수 있도록 했다.

1997 년, 장리경과 그의 가족 장지경은 《연변일보》의 보도를 통해 룡정시에 미영이라고 하는 렬사 고아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미영의 집을 찾아 즉석에서 미영 할머니께 5,000 원을 건네주었다. 그후 10 년간 매 학기 개학 전마다 그들은 미영에게 4,000 원을 부쳐 주었으며 종래로 중단한 적이 없었다.

원 왕청현 동광진 5 인반촌에 하향했던 상해지식청년 우학매(절강성 녕파시 북륜구 인대 부주임을 지냄)는 2008년부터 2014년까지 6 년간 왕청 대명사회구역의 3 명 빈곤학생을 도와주었는데 해마다 2,000 원을 후원해 주었다.

훈춘현 마적달공사 오도구 4 대에 하향했던 정리총은 “훈춘의 지식청년으로서 나는 훈춘을 도와 도시전망설계에 일조할수 있기를 바랐다. 하여 연줄을 놓아 2004 년에 나와 동제대학의 도시전망설계팀은 훈춘 도시구역 기획사업에 참가하게 되였다.”고 말했다.

당시 훈춘시당위,시정부의 한 책임자는 기뻐서 “이번엔 진정한 도시전망설계 전문가들을 만났네!”했다.정리총은 그 때를 회상하면서 “이는 내가 연줄을 놓은 데 대한 긍정이라고 생각한다.동제대학의 도시전망설계 전문가들을 나의 제2의 고향 훈춘에 모셔와 훈춘의 도시설계를 도울수 있게 하고싶었던 것은 나의 오랜 념원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화룡현 숭선에 하향했고 삼림경찰을 지냈던 상해지식청년 김철염(원 상해심계국 국 유자산 검증심계처 처장, 상해국제집단 성룡투자관리유한회사 총경리)과 그의 안해 장려화(역시 화룡에 하향했던 지식청년이다. 원 동제병원 분원 부원장, 부주임의사)는 자원적으로 빈곤학생 한명을 후원하기로 했다. 화룡시정협에서 조선족 학생 2 명을 추천해 그들더러 선택하라고 했는데 김철염은 한명만 선택하는 것을 아쉬워하여 결국 두명으로 결정했다. 더욱 귀중한 것은 그들이 정년퇴직한 후에도 그들의 딸과 사위가 그들을 대신해 이 두 명을 후원해 주도록 한것이였다. 화룡에서 수재를 입었을 때에도 그들은 또 화룡시적십자회를 통해 숭선진정부에 인민페 1,000 원을 기부했다.

원 안도현 송강공사에 하향했던 상해지식청년 허행화(상해지원회계사무소 주임)와 원래 안도현 신합공사에 하향했던 상해지식청년 당서창(강소성 오강현 방직회사 총경리) 은 모두 30 여년의 당령을 갖고 있는 공산당원이다. 평소 그들은 매우 소박하게 살아왔다. 대대 간부였던 당서창은 산간지대 학교를 꾸리는 것이 어렵고 농촌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안도현정협 지도자들에게 조속히 교육부문과 소통하여 후원 대상을 확정함과 아울러 이를 즉시 실시할 것을 요청했다. 안도현정협 지도자들은 모두 상해의 지식청년이 안도를 떠난지 이렇게 여러해가 지났는데도 빈곤지역 마을사람들과 어린이들을 념려하고 있다면서 입을 모아 칭찬했다.

2018년 6월, 당서창 등 몇몇 지식청년들이 두번째 고향인 안도에서 빈곤학생들을 조학하여 현지 정부 관계자의 찬사를 받았다.

상해지식청년들은 연변에서 여러 민족 친구들과 장기적으로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등 삼관을 형성하였다. 또한 상해지식청년으로 하여금 연변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제2의 고향에 대한 ‘회귀’를 촉진하였다. 석명성은 ‘상해지식청년의 연변에서의 력사기억’이라는 글에서 “두번째 고향의 경제발전은 줄곧 일부 상해지식청년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연변의 투자유치 사업을 위해 다리를 놓고 계책을 내놓고 힘을 냈다. 례를 들면 진명각, 구심강, 정덕원, 장리경, 홍국영, 륙극팽, 호평, 소학건, 원건강, 예화희, 관옥란, 주문룡 등은 2009 년후부터 어떤 사람은 해마다 몇차례씩 찾아와 경제무역 왕래를 확장하고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 다리를 놓아 주거나 팀이나 대만 상인을 인입하여 연변지대를 고찰, 관광하게 하였다.

훈춘에 하향했던 상해 로지식청년 왕원성(원 연변조선족자치주 총공회 연변종업원 기술협회 판공실 주임)은 왕청현에 상해의 라면 대상을 성공적으로 인입하기 위해 상해종업원기술협회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하면서 각 현, 시의 외자유치 프로젝트의 접목을 위해 대량의 사전 준비사업을 했다. 2017 년 8 월 말, 구심강, 장리경은 연변주 당위, 주 정부의 초청을 받고 장강 삼각주 기업가 대표로 연변주에서 개최한 회귀 공사대회에 참가 했다.

상해세계박람회에 참석한 연변지도자들과 상해지식청년들

훈춘시 부시장을 지낸 림혜영은 상해지식청년에게 보낸 축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력사의 견증인으로서 우리는 행운스럽게도 ‘상산하향(上山下乡)’이라는 이 중국 현대사의 중요한 력사적 사건을 견증했다. 당년에 여러 지식청년들은 웅대한 포부를 품고 가족과 번화한 도시와 작별한 채 변방으로 가서 당지 인민들과 함께 연변의 가난하고 락후한 면모를 개변하기 위해 자신의 청춘과 땀을 바쳤다. 뜨거운 로동생활 속에서 여러 지식청년들이 우리와 응결된 두터운 우정은 시공을 넘나드는 뉴대처럼 상해와 연변을 긴밀히 련결시켰다. 고향에서 소장하고 있는 오래된 술처럼 맑고 깨끗하며 순후하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더욱 향기롭다. 그대들은 가장 아름다운 청춘과 열혈을 이 흑토에 뿌렸는바 이러한 청춘은 마음속 깊이 잊을 수가 없으며 꿈에서도 그리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로하여 우리는 마음이 맞는 형제자매가 생기게 되였는데, 이는 아마도 우리의 가장 큰 인생수확이 아닐가 싶다.

상술한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상해지식청년과 연변 여러 민족사이 문화의 교류, 융합, 접촉, 충돌과 리해는 부동한 문화사이의 평등한 대화로써 “어느 곳에 가면 그 곳 풍속을 따라야 한다.”는 속박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인은 최대한 손님이 편하게 지내도록 하는 주행객편”도 없었다. 량방향 접촉과정에서 부동한 문화는 상호 해석을 통해 끊임없이 융합된 동시에 상대방을 변화시켰다. 상해지식청년들은 문화의 융합이 상해지식청년과 연변 여러 민족 대중들의 공동생활, 사업의 발전에 더욱 유리하며 특히는 생활환경의 적응에 유리하다는 것을 점점 느끼게 되였다. 리결사가 말한 바와 같이 “북국의 장백은 연변인민의 자랑이며 또한 나의 자랑이다. 나는 이 땅을 열애하고 이곳의 인민들을 열애한다. 이 지역의 물과 흙, 이곳의 인민들이 나에게 영양을 주었고, 공간을 주었으며 나라는 이 남방의 작은 나무를 뿌리와 잎이 무성한 큰 나무로 키워 주었다.”

2019년 6월말, 연변주정부, 주정협은 상해지식청년 연변하향 50주년 기념좌담회를 열었다.

상해지식청년과 연변의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코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력사를 넘나들며 인류 발전의 높은 정상에 서서 연변의 금수강산을 굽어볼 때 우리는 연변 지역의 여러 문화가 서로 융합되여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면서 더욱 완벽한, 연변의 여러 민족 군중들이 공동으로 접수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산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 게 될 것이다. 이런 문화는 아주 강한 력사문화 계승 가치를 갖고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연변지역의 문화 연실력을 증강하게 될 것이다. 문화가 융합되고 미래지향적 발전이야말로 연변 여러 민족 군중들의 생존과 발전의 유일한 바른 길이며 연변 민족단결모범의 근본적인 기반이며 더우기는 상해의 지식청년들과 연변 여러 민족 군중들이 융합하는 길이다!

주배흥 소개:

1952년생, 석사학력, 고급회계사, 등기재무관리사.

1969년 ‘교육해낼수 있는 자녀’로 훈춘현 경신공사 금당1대에 하향.

1975년 연변재정무역학교에 입학,졸업후 연변상업계통과 수리계통에서 재무관리사업에 종사.

1998년 ‘상해의 특수수요 고급인재’로 상해에 전근하여 국영기업그룹 고급관리인원으로 사업

2015년-현재 상해 중심구위원회 순시조에서 사업.

/편역 길림신문 최승호 안상근 김태국 김청수 김영자 김가혜 리철수 김정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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