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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칼럼] 속담을 미신하지 말자

편집/기자: [ 리영애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6-23 16:13:38 ] 클릭: [ ]

 
한영남(시인)  

우리말 속담은 다채로운 생활 속의 풍부한 철리를 담고 있어 때로는 경종으로 때로는 위안으로 때로는 채찍으로 때로는 도로표식으로 되면서 우리들의 일상을 윤택시켜주었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열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기실 대다수이다. 우리가 흔히 나무라고 하는 것은 그 밑둥의 직경이 일반적으로 사발 만큼 되는 것들을 가리킨다. 10센치 좌우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것을 열번 찍어 넘어가는가? 무른 나무면 또 모를가 고로쇠나무나 물푸레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를 만날 경우 스무번 서른번 찍어도 넘어가지 않는 나무들이 대다수이다. 그런데 열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어버린다. 그냥 나무 찍기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살아가면서 닥치는 모든 일들에 이 속담을 대입해보는 것이 문제이다. 만일 이 속담이 천고의 진리라고 한다면 전구의 월프람선을 발견하기 위해 수천번의 실험을 해봤던 에디슨의 발명은 결코 없었을 것이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를 몰랐던 진경윤의 골드바흐문제도 해결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실패 앞에서 주저앉아버린다면 쵸몰랑마봉에로의 등반도 불가능한 일이였을 것이고 우주탐색은 소설가들의 환상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여야 했을 터이다.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 매서 쓰겠냐”는 속담도 있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일에는 순서가 있으니 그 순서를 밟아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속담이다. 기실 지난 세기 80년대 이후에 태여난 세대들은 바늘을 알아도 실생활에서 사용해본 적은 극히 드물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껏해야 단추를 다는 정도라고나 할가. 그만큼 우리의 생활이 윤택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이고 요즘의 천들이 웬간해서는 해여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속도시대도 아닌, 고속시대도 아닌, 초고속시대를 살고 있다. 하루만 자고 나도 세상이 뒤바뀔 만큼 시대의 발전이 빠르다. 휴대폰만 해도 새 천년에 접어들면서 이제 반년 또는 석달이면 새로운 제품이 출시될 만큼 경신 속도가 빨라졌다. 그런데도 늑장을 부리면서 여드레 팔십리 걸음을 해서야 될 말인가. 물론 예전에는 교통이 변변치 않아서 오로지 걸어서 다녔기에 여드레 팔십리 걸음이라는 속담도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팔십리 정도는 자가용으로 한시간도 못되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다. 여드레(8일)이면 수십번을 오갈 수 있다는 계산이다. 천편일률이 아니라 급하게 추진할 일이 있고 꼼꼼이 자로 재면서 천천히 추진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다.

“개발에 편자”라는 속담도 재미 있다. 본래 뜻은 대개 옷차림이나 지닌 물건이 제격에 맞지 않아 도리여 흉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강아지병원, 강아지미용실, 강아지헤어숍, 개사료, 개통졸임, 개치솔, 개치약 따위가 란무하는 요즘 편자가 오히려 개발에는 너무 격에 떨어지는 물건이 되여버린지 옛날이다. 옷을 입히고 목도리를 둘러주고 신을 신기고 다니는 강아지들을 보면 참말로 복도 많은 개라는 생각이 든다. 이 지구촌 절반 이상의 사람들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개들인 셈이다.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른다”는 속담을 둘러싼 일화가 있다. 늘 조선말을 배워달라고 닥달하는 꽤 열정적인 한족친구가 있었다. 처음에는 나도 한어에 약하니 내 공부도 되겠다 싶어서 쉽게 허락을 하고 위챗으로 서로 배워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쯤 지난 다음 나는 내가 크게 오산했음을 깨달았다. 아직 우리말의 그 오묘함을 한어로 풀어서 해석할 능력이 나한테는 없었던 것이다. 그 친구가 한글 책을 보다가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른다”는 말을 발견하고 ‘선생’인 나한테 질문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일껏 설명을 하느라 했는데 참말로 석연치 못한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일단 이 친구는 낫을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낫에 대한 일체 정보에 제로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옛날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농사를 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력사지식에 농업지식에 없는 지식들을 들춰내서 들려주었는데 그래도 그냥 갸우뚱투성이였다. 결국 이미지를 검색해서 낫을 보여주고 그것으로 가을을 한다고 해놓고 우리말 기윽자(ㄱ)의 모습을 형상적으로 말하면 낫 같지 않냐고 했더니 기윽자는 그게 건너금 내리금으로 이루어진 헝쑤(横竖)이지 어떻게 낫인가고 따진다. 낫의 건너금과 내리금의 길이가 같지 않다는 데서 비롯된 의문이였다. 그 쯤에 이르러 우리의 학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언젠가 북경의 서영빈수필가가 강의를 하면서 한족애들한테 “사촌이 기와집 사면 배가 아프다”를 한시간 내내 강의해도 알아듣지 못하더라는 말이 실감되는 대목이였다.

속담은 우리에게 필요하고 경우에 따라 매우 설득력이 강하며 그리하여 우리 생활과 불가분리의 관계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아무 생각없이 기존에 존재하는 속담을 요즘의 현시점과 따져보지도 않고 그냥 교조주의식으로 인용만 한다면 웃음거리를 빚어낼 것은 명약관화―불보듯 뻔한 일이다.

특히 농경사회의 산물인 속담은 요즘의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서 각별한 주의가 요청되는 것이다.

길림신문/한영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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