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기자: [
심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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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7-10-20 09:5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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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유명한 소설가 김용성교수를 만나본다
《사실 장춘을 포함한 옛 위만주국 지역은 한국현대문학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한 현장입니다. 한국문학사에서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간도문학이라고 하는데 그 창작주체에 여기 조선족들도 잘 알고계시는 최서해, 안수길, 강경애 등 작가들이 포함됩니다.》
일전 기자는 길림대학의 전문가초청 프로그람에 응하여 2주간 장춘행, 여가를 타 본사를 찾은 한국의 유명한 소설가 김용성교수를 만나보았다.
김용성교수는 1940년 일본 고베에서 태여나 1945년 6세나던 해에야 비로소 기술을 배우러 떠났던 부모님을 따라 귀국한다. 귀국후 소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한글과 한국말에 서투러서 동네 아이들로부터 《쪽바리》라는 놀림을 받았다는 김교수. 이러한 언어장애가 어느 정도 해소된것은 소학교 2학년때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만큼 같은 또래에는 뒤졌을 글과 말 공부로 어떻게 언어예술의 금자탑에 오를수 있었을가?
김교수는 1961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잃은 자와 찾은 자》가 당선되면서 2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다. 당시 상금으로 600만원(한화), 지금의 시세로 약 2억에 달한다고 하니 현재 한국문단의 최고상금 5억원에 견주어볼 때 40년전이니 실로 거액이 아닐수 없다.
《열심히 하는수밖에 없었지요. 학비를 내고 편하게 공부할수 있는 여건이 아니였지만 소설을 읽고 쓰는데는 큰 흥미를 갖고있었어요. 부지런히 읽고 열심히 쓴것이 그후의 창작생활에 상당한 도움이 되였지요. 당시 구두닦이도 하고 야간대학을 다니기도 했지만 취직이 여간 어렵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국일보의 현상공모를 보고 대학 도서관에 붙박혀 소설쓰기에 몰두한것이 그런 결과를 낳은것 같아요. 행운이였다고 해야지요.》
21살 젊은 나이의 화려한 문단데뷔와 거액의 상금을 《행운》에 귀결시키며 담담한 표정을 짓는 김용성교수, 겸손이 비치는 김교수의 말에서 이는 결코 행운에만 기대여 얻어질수 있는 영예가 아니라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후 김교수는 경희대학교로 학적을 옮겨 본격적인 문학공부를 시작한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를 거쳐 1969년에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한 그는 줄곧 왕성한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창작에 남다른 끈기와 성실성을 지녔던 그는 1971년 창작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한국일보사에서 자퇴하였고 드디여 본인의 창작생애에서 새로운 기념비가 된 평판작품 《리빠똥 장군》을 선보여 당시 한국사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김교수의 작품은 다각적인 현실체험뿐만 아니라 강렬한 사회적관심과 사회의식을 보였던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리빠똥 장군》에 이어 강한 풍자정신을 보인 《리빠똥 사장》이 수록된 첫 작품집은 비판의식과 풍자성으로 잘 알려져있다. 1983년부터 1994년까지 1, 2, 3부로 나누어 《현대문학》지에 련재되였던 《도둑일기》는 또 전쟁고아로 태여난 삼형제의 성장과 성인화과정을 통하여 전후 한국이 혼란한 사회에서 산업자본주의시대로 이행하고있는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조명함으로써 한국문학사에서 성장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는 호평을 얻고있다. 그 시절 한국일보에 련재됐던 르포 《문학사 탐방》은 또한 후에 단행본 《한국현대문학사탐방》으로 출간되여 한국문학사연구에 좋은 자료로 되고있다.
문학창작과 학문탐구에 대한 일념으로 늦깎이로 경희대 대학원에 입학, 석,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85년 인하대학교 국문과 소설담당교수에 부임한 김용성교수다. 거의 반세기에 육박하는 문단생활에서 김교수는 선후로 제29회현대문학상, 제1회동서문학상, 1991년도 대한민국문학상 그리고 김동리문학상, 요산문학상 등을 수상함으로써 한국문단에서의 원로작가의 자리를 굳혔다.
문학창작은 자기 생애의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김용성교수는 여생을 문학창작으로 알차게 보내는 한편 힘 닿는대로 중한 문화교류의 활성화에도 한몫 할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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