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술문화]반잔술의 여향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1-07-01 10:26:03 ] 클릭: [ ]

술이라는 물건이 직관적으로 나의 머리속에 자리잡은건 아버지와 개산툰시가지 재봉사 홍연엄마가 술을 나누는걸 지켜보면서부터였다.

썩 오래동안은 그때 두분이 나누는 술자리가 어릴적의 나의 가슴속에 버겁게 자리잡은듯한 기억이다. 홍연엄마는 아래마을 장거리에서 살던 재봉사였는데 토개때 살구평의 촌장이던 아버지의 주선으로 남편이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 로동자로 들어가면서 우리 집과 인연을 맺었다는게 큰누나가 들려준 말이다. 형제 많은 우리 집안의 모든 마선질을 도맡아해주는 은인이지만 한주일에 한번씩은 거의 10리되는 우리 집으로 찾아와 어머니가 술안주를 볶아놓느라고 바삐 돌아치든말든 여유작작하게 아버지와 술을 마시며 담소하는 홍연엄마가 반갑지만은 않았다. 아버지와는 5살 년상이든말든 말이다.

홍연엄마는 생김새도 어데나 남자처럼 굵직굵직하고 아버지 담배쌈지를 제것처럼 스스럼없이 열고 엽초를 말아 피우리만치 성격도 소탈했다. 배갈 대여섯잔쯤은 거뜬히 넘길만큼 주량도 대단해보였다. 그에 비해 죄꼬만 배갈잔을 반나절 들었다놨다하면서도 상을 물릴 때면 노상 반나마 잔에 남아있는 술을 안되겠다면서 도루 술병에 되부어넣는 아버지의 붉게 상기된 얼굴이 오히려 작아보이는 때가 많았다.

아무튼 어릴적 남자와 녀자는 이렇게도 술을 마실수 있는걸 보아 술이 풍류나 일상에는 약국의 감초나 다름없구나 하는 어렴풋한 감성에 어섯눈을 뜨게 된건 그무렵이였다. 또한 그 술좌석은 나, 아니 우리 형제 6남매가 보아온 아버지의 유일한, 그러면서도 촌티 다분한 《로맨스》였다.

가뜩이나 썩 반갑지 않은 술놈에 가슴이 섬뜩해난건 그때 소꿉친구이던 수호네 아버지가 꿈틀꿈틀하는 술회충을 달래다 못해 공업용알콜을 물에 타서 동네분들과 마신게 덜컥 중독되여 3명이 급사한 사건이 터질 때였다. 그때 주성분이 알콜이던 배갈의 살인적마력을 일별하면서 놀란 가슴을 어루쓸던 때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온 동네방네가 알콜사망사건으로 들썩거리든말든 아버지의 술잔은 여전히 찬장과 밥상 사이를 오고갔다. 물론 여전히 홍연엄마가 올 때거나 큰사위, 둘째사위가 명절이나 생일에 술을 사들고 오면 마주앉아 그 작은 잔에 반쯤가량 마시는게 전부였다. 언제인가 하도 궁금해서 상을 물리는 아버지한테 《술 대면 뭐가 좋습둥!》 하고 슬쩍 물은적이 있다. 그러자 아버지는 《속 편해지고 가슴이 더워나지.》 하고 짤막하게 끊었다. 그러자 내가 장난삼아 《그러자면 반잔씩 홀짝거리지 말고 종지채로 굽내면 훨씬 통쾌하지 않겠어요!》 하고 한수 거들자 아버지는 노여운듯 눈을 흘기면서 《뭐나 체질에 맞아야 해. 과식이 불식이라잖아. 술이나 세상사 다 그래…》 하고 일러주시고는 그대로 베개에 기대여 잠드시는것이였다.

소학교 3학년때인가 술이란 대체 어떤 놈일가 하는 호기심에 끌려 집이 빈틈에 술병의 술을 숟가락에 조금 부어 마셔본적 있다. 순간 컥 하고 숨이 막히는듯하더니 창자가 타들어가는듯이 온 가슴이 옥죄여들고 눈물이 찔끔 쏟아져나왔다. 독약처럼 무서운 놈이였다.

그러나 그 지독한 배갈도 너털웃음을 치며 꿀꺽꿀꺽 들이키는 대장부들이 있었다. 70년대 중반에는 세상 모든게 어수선했다. 그속에서 어머니가 장본 돈에서 겨우 5전, 10전을 홀려내여 개눈깔사탕을 사먹는게 방과후 귀가길에 가장 신나는 걸음이였다. 상점이 있는 장거리마을가운데로 개산툰섬유팔프공장과 룡정시가지를 잇는 모래도로가 가로지르고있었다. 늦은가을부터 이듬해 양력설이 지날 때까지 그 길옆에 있는 상점에 들어가면 안에는 개산툰진량식창고에 징구량을 바치고 귀가길에 들린 덕신골 농민들이 북적일 때가 많았다. 일년 뼈빠지게 피땀뿌려 거둔 량곡을 바치고도 빈손으로 돌아가는게 허탈한지 그네들은 벌겋게 달아오른 난로에 고드름이 질펀히 녹아든 개털모자며 얼어 딱딱해진 헝겊솜신을 말리우면서 미역부스레기나 열콩알만한 소금알에 독한 배갈을 칵칵하면서 마셔대는게 참으로 가관이였다. 이윽고 집에 돌아와 뙤창문틈사이로 모래도로를 내다보면 문안골을 휩쓸며 몰아쳐오는 칼바람속을 헤집고 느적느적 힘겹게 움직이는 소수레행렬이 지나가고있었다. 이상하게도 수레우에 그대로 누워 착하고 얌전한 소들이 끄는대로 따라가는 그 흐름이 저물어가는 석양그늘밑에 깔려 그처럼 처량할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시름없이 잠든듯했으나 한해 농사뒤의 실의, 한치앞도 막막한 래일, 매서운 한기를 막으려는 공복배갈추렴에 기실은 꽁꽁 취해있었다. 이제는 그 어데서도 볼수 없이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어제날의 가슴시린 진풍경이였다.

그렇게 미웠다 고왔다 헛갈리는 술과 고중졸업때까지는 그런대로 담을 쌓고있었으나 대학에 와서는 몸이 따라주지 않아 살짝 고민도 있었다. 년령이나 경력이 한참 앞선 선배들이 술을 즐기는 운치가 부러워나는게 이상했다. 가끔 학교식당에서 《앙증맞》은 료리들을 제각기 숙사에 받아와 가지고 배갈뚜껑을 떼는 어른동창들이 아무리 권해도 손사래를 치다가 나중에 《남자란게 술도 못 먹고 뭘해.》 하고 조롱하듯이 건드리자 오기가 발동되여 야금야금 댔다뗐다하는 시늉을 하던게 어느새 스르르 맛에 빠져들고말았다. 주량도 푹푹 늘어나 아무리 마셔도 취할것 같지 않을만큼 대학교졸업무렵에는 배짱까지 두둑해졌다. 덕분에 졸업해서 신문사에 배치받은 뒤 출장때마다 술자리가 많아도 무난히 지나갈수 있었다.

1984년 류하현에 삼원포조선족향이 설립되면서 초청을 받고 취재갔을 때 주인측의 극진한 환대에 3박4일 때마다 술을 반근남아 리레식으로 마셨는데도 스스로는 정신이 말짱한것 같아 술이 나한테는 맹물이 아닌가 착각하기도 했다.

술의 고마운 구석은 또 있었다. 신문사에 온 두번째해에 사옥신축사정으로 원 기숙사가 헐리면서 당시 청년늪 근처에 있는 어느 단위 구락부에서 림시 겨울을 나게 되였다. 이름이 구락부라지만 전에 일본놈들의 마구간이였다는 이 숙소는 섬유판으로 대충 칸을 막아 칼바람이 동서남북에서 거침없이 들이치는가 하면 난방시설까지 엉망이여서 바닥에 뿌린 물이 이튿날 깨여나면 얼음장으로 바삭바삭 굳어지는게 랭장고속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한숙소를 잡은 나와 동료는 저녁이면 사무실에 나가 원고를 끄적이다가 9시 반쯤이면 근처 맥주점을 찾는게 일상이였다. 그래서 한근들이 록색비닐맥주컵에 배갈을 반쯤 받아놓고 명태나 땅콩따위 안주로 벌컥벌컥 들이켜면서 몸을 달구는데 길들어지고말았다. 이윽고 속이 따끈해날가 할 때 흐리터분한 기분 그대로 숙소에 들어오면 그런대로 차디찬 이불속으로 기신기신 기여들어갈수 있었다. 과동에 어쩔수 없는 고육지책이였으나 젊음이 넘쳐 겁난게 없던 그 엄동에 역한 배갈이 동무해주고있어서 가슴이나마 따뜻이 덥힐수 있는게 어쩌면 자그마한 행운이기도 했다.

여지껏 거의 잔소리없이 철부지자식들을 키워오던 아버지께서 술에서만은 까다로왔다. 형제들중 맏형의 주량이 아버지와 근사하고는 둘째형, 셋째형, 나까지 술에 너무 자신있어하니 걱정이 안 생길리 없었다. 마셔도 맞춤히 들고 술집을 똑바로 잡으라고 자주 일러주었고 특히 나한테는 이른바 국가간부라는게 과음으로 말실수, 헛발질을 할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앉혀놓고 따끔하게 충고한적도 있었다. 물론 아버지의 예상은 그뒤 빗나가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의 《맞춤형음주》, 《맞춤형처신》은 나름의 삶의 철학이였고 그 깊이를 제대로 받아들인 자식은 대학을 나온 내가 아니라 맏형이였다. 맏형은 문화대혁명전 연변1중에서도 잘 나가던 우등생이였다. 불운하게도 대학입시에서 삐걱하는 바람에 맏형은 울분을 씹어삼키며 중등전문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것도 석탄학교였다. 졸업뒤 맏형은 산설고 낯선 통화지역탄광에 배치받았다. 맏형은 분발하여 일개 초보기술원으로부터 기술과 과장을 거쳐 3000여명 광부를 가진 국유기업의 총공정사직까지 맡게 되였다. 물질이 궁핍하던 70년대에 맏형한테로 가면 《모태주》, 《분주》며 《죽엽청》 같은 우리 연변에서 보기 힘든 명주에 포장이 화려한 각가지 통화산 포도주를 볼수 있어 참으로 희한했다. 덕분에 동네어른들도 우리 집에 와서 명주의 향연을 가끔씩 즐길수 있었다.

1997년말의 어느 날, 형님이 기별없이 문득 아버지를 찾아왔다. 퇴근해서 룡정에 이르니 형님, 누님네가 아버지를 모시고 밥상에 둘러앉아있었다. 아버지가 철저한 배갈반잔맨이라면 맏형은 한잔맨이라 할수 있었다. 역시 아버지처럼 드네마네하다가 술좌석이 끝날무렵 한모금에 쭉 들이켜고 잔을 탁 상우에 놓으면 OK였다. 그만큼 전문가답게 매사에 신중했고 직장생활에서 술실수를 빚은적이 없다고 스스로 자부하고있었다. 물론 오늘의 화제는 술이 아니였다.

《아버지 곧 퇴임하게 되는 광장장(砿長) 이 저한테 자리를 넘기겠다고 하는데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해서 아버지 말씀을 들어보려고…》

평소에 술만 대면 말씀이 술술 나오시던 아버지가 이번에는 한동안 잠자코 맏형만 응시하였다. 이윽고 무겁게 입을 떼는 아버지의 얼굴은 근엄했다.

《판단은 네가 할 일이지만 총공정사쯤 했으면 가문에도 최고의 영광 아니겠냐.》

어쩌면 완곡한 의미가 깔려있는 말씀이였다.

《알겠습니다. 실은 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자고 온겁니다. 50년대초에 아버지가 자기는 글이 무뎌 안된다면서 촌장직을 내놓을 때 참으로 우러러보였습니다. 나 역시 아버지 아들입니다.》

맏형은 이번에는 여느때와 달리 거의 넘쳐있는 흰술 한잔을 단꺼번에 쭉 굽냈다. 광장장이면 현(퇀)급행정급별이였다. 어려운 용단을 내린 맏형은 대신 조선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총공정사였다는 위당(葦塘)광산의 영원한 전설을 남기게 되였다.

진작 퇴직한 맏형은 형수님하고 두세해에 한번씩 통화로부터 룡정으로 부모님 성묘하러 올 때마다 우리 하고 우리 가문이 파란없이 오늘까지 오게 된 힘이 뭔지를 즐겨 담론한다. 그속에는 애잔한 향수가 묻어있었다. 맏형은 과격을 부릴 대신 주어진 삶에 충실하고 분촌있게 살아가자는 아버지의 인생가치관이 그 반잔술에 담겨있다고 흥분할 때가 많았다. 하긴 나의 기억속에 아버지는 혼인에서마저도 자식들의 뜻에 맡겼고 이상한 조건같은걸 내놓지 않았다. 썩 오래전부터 온 세상이 코리안드림으로 시끌벅적해오고있지만 우리 형제 6남매는 물론 그 아래로 나온 친조카, 외조카들속에 리혼은 물론 가짜리혼 하나 나지지 않았다. 지금 지난세기 90년대초부터 서울쪽으로 친인들이 반나마 들락거리고 있지만 여지껏 불법체류자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동네에서도 혀를 끌끌 차며 놀라고있다. 남들처럼 희끔하게 살지는 못해도 오손도손 재미나게 살아가는 자손들을 보면서 생전에 아버지께서 그토록 뿌듯해하시던 가문의 기틀은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근 15년 세월을 갈면서도 그 반잔술이 더 내려가지 않았듯이 오늘까지 흔들리지 않고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세번째 청명을 맞을 때 아버지는 발목을 접질러 운신이 힘들었다. 그래도 기어이 어머니묘소를 찾겠다고 고집하기에 셋째형이 동네에서 편한 소수레를 끌고왔다. 덜컥거리는 소수레에 앉아 애들은 신나서 야단인 속에 아버지는 묵묵히 먼발치만 바라보고계셨다. 그날따라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한테 들고간 수입제 와인을 어머니묘소에 부어올렸다.

《술이란걸 평생 못했는데 막내가 서울서 가져온 포도주나 맛보오.》

그해 추석을 며칠 앞두고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있는 둘째형수한테서 아버지가 주무시다가 그만 운명했다는 전화를 받게 되였다. 내가 뛰여가보니 집뜨락 남새전에는 아버지가 방금전에 기음을 매던 호미가 그대로 놓여있었다. 아버지의 림종을 동무해준건 평생 보고 또 보아 보풀이 두텁게 진 《삼국연의》와 허술한 돋보기였다. 향년 83세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골회를 합장하고나서 둘째형수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평소에도 술을 별반 안 드셨는데 평소 두분이 같이 나누게 술을 묻어두면 어떨가요?》

우리는 묘소에서 한메터 반가량 떨어진 토층을 반메터가량 파고 그속에 백주 한병과 포도주 한병을 고이 묻어놓았다. 부모님의 묘소는 말발굽산, 비암산, 해란강은 물론 온 룡정시가지를 한눈에 굽어볼수 있는 과수농장뒤 양지바른 산언덕에 자리잡고있다. 지금도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홍연엄마와 마주앉아 우리 남긴 술을 나누면서 자식들 얘기를 재미나게 나누는것 같아 마음이 포근해진다.

/가문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