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전설의 무희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연변일보 ] 발표시간: [ 2011-12-05 09:12:01 ] 클릭: [ ]
1

감흥이 추억과 엉키는 극장가에서, 조명등빛이 은은하게 주위를 감싸는데 어디선가 미풍처럼 다가오는 음악 소리 그리고 긴 옷자락을 휘날리며 다가올듯 멀어지고, 멀어질듯 다가오는 춤사위의 너울거림...

무대와 극장가를 비울듯 채울듯 여백과 충만의 향연을 펼치는 한판 춤에 빠지는 순간, 인생의 질긴 굴곡이 파도처럼 관객들을 휩싸며 흥건한 감동의 기운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여기 한분의 무용대가가 있다. 바로 민족 신무용의 개척자- 최승희이다.

최승희는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서울에서 4남매 가운데 막내로 출생한다. 그녀가 자신의 한생을 무용의 외길로 가려 마음먹은것은 1926년 오빠의 권유로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무용가인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난 뒤였다.

그날 공연된 작품은 한결같이 전위적인 양식의 신무용들이였다. 오빠 손을 잡고 이 공연을 보러왔던 열여섯 소녀 눈에서는 광채가 번뜩였다. 그녀는 곧 이시이를 따라 일본으로 갔고 3년이 못되여 이시이 무용연구소 간판스타가 되였을뿐 아니라 전 일본렬도를 흔들어놓게 된다.

1929년 귀국하여 서울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리고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처음으로 신작발표회를 가진다. 이 공연은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였다. 두차례 일본 류학이후에 국내에서 독자적인 근대 무용 공연을 가지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게 되였고 영화에 출연하고 자서전을 출간할 정도로 유명해진다.

1930년대 후반부터 유럽과 전미를 감동의 물결로 휩쓸며 《동양의 진주》 《금강산의 화신》이란 갈채를 받는다. 피카소, 장 콕토, 로맹 롤랑,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당대 최고의 명사들을 반했다고 한다.

1947년 조선으로 건너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세워 소장에 취임하고 조선춤을 체계화하며 무용극 창작에 힘쓰다가1969년 타계한다.

조선 최초의 월드스타였던 최승희,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라는 시대의 진공속으로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간 최승희, 최승희의 삶은 그야말로 《격동의 20세기》를 관통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가 오히려 비좁았던 그에게는 그러나 정작 고향이 없었다. 남에서는 친일파요, 북에서는 자본주의 성향의 반혁명 예술가라고 버림받았던 그, 하지만 땅의 나뉨도 분단의 이데올로기도 그의 예술혼은 묶어둘수는 없었다.

그는 춤에 대한 천부적 자질을 안고 쉼없는 춤사위를 통해 아시아인으로는 중국의 매란방, 인도의 우디샹카와 더불어 세계적인 무용가로 인정받으며 춤으로 세상에 군림한 신화적 존재로 남았다.

2

놀랍게도 최승희와 중국과의 인연은 일찍부터 이어졌고 많은 중국 문학예술계의 쟁쟁한 거장들이 그와 만남과 교류의 일화를 남기고있었다.

중국 현대문학의 최고의 녀류작가 장애령(张爱玲. 동방의 제인 오스틴이라고 불리는 유명 녀류소설가. 최근 쟁명을 빚고있는 영화 《색계》의 원작자)도 일찍 최승희와 만남을 가졌었다.

1945년4월,《신중국보》 편집부는 상해에서 무용가 최승희를 위한 간담회를 열었는데 무용계 인사들외에도 장애령 등 상해의 유명 녀류작가들이 간담회에 동참했다.

사실 장애령은 언녕 최승희의 무용에 심취되여있었다. 《서방의 무용, 그리고 중국명사파들의 표현은 최승희에 짝지는것이 많다. 》며 최승희의 예술체계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쓴《태양은 쌍간하를 비춘다》의 작가 정령(丁玲), 그녀도 최승희와 묘한 인연의 끈을 가지고있었다.1948년 정령은 쏘련에서 돌아와 로신예술학원에서 창작에 전념하고있었다. 쏘련에 체류하던 기간 보았던 무극은 그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하여 그녀는 연안 《보육원》에서 자란 딸 장조혜(蒋祖慧)더러 춤을 배우기를 권장했다.

리공과에 흥취가 있는 딸애를 설복하여 조선으로 보내여 다름아닌 최승희의 문하에서 춤을 배우게 했다. 최승희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은 장조혜는 유명 무용수로 성장, 그후 유명한 현대경극 《홍색랑자군》의 제작을 맡아 그 유명세를 떨쳤다.

최승희는 세계 공연을 마치고 중국으로 와서 1941년부터 1946년까지 차원높은 예술무용을 공연하여 중국예술계에서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44년 북경의 북해부근에 《동방무용연구소》를 차리고 중국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중국 예술전통을 익혀나갔다.

바로 이 시기 최승희는 경극대가 매란방과도 력사적인 조우를 가진다. 최승희의 높은 무용예술표현, 견해는 매란방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중국의 《화경일보》는 《노래를 위주로 하는 옛 경극은 최승희 무용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종국에 가서 변혁을 일으킬것 같다》는 소식까지 실으며 최승희의 실력과 역할을 강조했다.

경극대가 매란방과 교류하면서 최승희는 경극을 토대로 한 무용 창작론과 기본 동작을 모형화하고 교수체계를 정립해 중국 무용을 현대화하는데 기여했다. 그러한 정론을 최승희는 인민일보에 《중국무용예술의 무용예술의 미래》라는 서명문장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자신의 무용세계를 살찌우는데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승희는 실제 중국무용의 실험적 창작에도 참여해 여러 류형의 창작물을 탄생시켰다. 그중 중국의 고전문학과 경극의 검무를 소재로 만든 《패왕별희》와 당나라 양귀비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양귀비 연무지도》가 대표적이다. 어제날 양귀비를 소재로 한 매란방의 대표작 《귀비취주》와 역시 양귀비의 춤사위를 재해석한 최승희의 《양귀비 연무지도》가 농도와 줄기가 다른 현란한 모습을 뽐내며 한무대에서 어우러졌다.

3

최승희 탄신 백주년 기념행사가 지난 11월 북경에서 열렸다.

《최승희 무묭예술과 정신을 계승발양하자》라는 주제하에 중국소수민족무용학회에서 주최하고 북경고무려용회사에서 주관한 이번 행사는 포럼, 공연 등 다양한 형식으로 나뉘여 3일간 펼쳐졌다.

연변, 남경, 광동 등 전국 각지에서 온 50여명의 전문가와 무용수들이 참가해 신무용의 선구자로서 국계를 뛰여넘어 인류의 예술보고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 춤의 대가를 기리였다.

살얼음과도 같은 시대에 오로지 타오르는 예술혼을 고이 껴안고 험난한 근현대사를 가로질러 세계로 발돋움하면서 민족적인것을 세상에 알리는데 혼신을 던진 최승희, 새로운 시대의 변화와 운명의 질곡에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를 대가들의 앞선 행보는 보여주고있다.

최승희의 춤을 보고 극렬한 감수를 받은 한국 유명시인 조지훈은 특별히 《승무(僧舞)》라는 시를 창작해 읊조렸다.

춤군의 동적인 이미지와 정적인 이미지를 교차시켜 인간의 세속적인 번뇌의 극복과 승화를 보여준 명시, 그 한구절을 읊어본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

/ 김혁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