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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84]아동문학협회와 함께 하던 나날에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5-18 14:54:55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12)

▩박영옥(안도)

연변내에는 물론 동북3성까지 20년 동안 이름을 떨쳐온 한 민간단체가 있으니 그 이름이 바로 ‘안도현아동문학협회’이다.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1997년 1월의 어느 날, 리룡득선생이 날 보고 지금 연변에 아동문학협회가 공백인데 안도에 이 협회를 설립할 계획이니 김동철씨가 회장, 내더러 부회장을 맡아달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다리가 장애인 내가 해낼 수 있을가고 고민하다가 믿어주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마와서 쾌히 동의하였다.

그 해 2월 1일, 그 날은 겨울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날씨가 봄처럼 따스했다.

오전 열시에 문학협회 설립을 위해 다섯 회원이 장은숙씨 집에 모였다. 붓글씨를 잘 쓰는 김동철씨가 하얀 종이에다 빨간색으로‘안도현아동문학협회 설립 모임’이라고 쓴 글을 객실 벽에다 붙였다. 그런 후 녀자 셋은 한복을 입고 남자 둘은 양복에다 넥타이까지 매고 그 앞에서 “찰칵-” 사진을 찍었다(아래 사진). 이렇게 리룡득선생님의 발기로 안도현 토월산 아동문학협회가 너무나 비좁고 너무나 조용하고 너무나 소박한 방안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그 때로부터 우리의 힘든 걸음이 시작되였다. 회원들의 열정을 식히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앉아 작품을 평의하였고 또 자주 만나는 것으로 서로간의 정을 돈독히 하였다.

협회가 활동하려면 돈이 있어야 했고 그 돈을 벌기 위해 회원들은 신문 팔기에 나섰다. 그 때 《연변건강생활보》에서 편집을 맡으신 리룡득선생이 주일마다 연길에 가서 이 신문을 300부씩 가져오면 우리 회원들은 한사람이 60부씩 나누어가지고는 힘 자라는 대로 팔았다. 한부를 팔면 30전씩 벌 수 있는데 그 신문들을 가지고 기차역, 시장, 거리에 다니면서 판다는 게 참 체면 잃을 일이기도 했다.

“아니,글 쓴다는 사람이 왜서 신문장사를 해요?”

이렇게 빈정대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 신문을 안 사겠다고 우리 회원들을 보기만 하면 피하느라고 길을 에돌기도 했다. 또 어떤 회원은 신문을 채 팔지 못하면 자기가 몽땅 사기도 했다. 이렇게 협회의 활동경비를 얼마라도 해결할 수 있긴 했지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회원들은 누구도 원망 없이 잘해나갔다. 얼마나 고마운 회원들이였던가!

많은 사람들은 여름이면 그늘진 곳에서, 겨울이면 따스한 온돌에서 한가히 보냈지만 우리는 글을 써가지고 여름이면 산으로 찾아다니고 겨울이면 옷을 두텁게 꽁꽁 입고는 이집저집 찾아다니며 활동하였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났고 또한 우리글을 굳건히 지켜가려는 그들만이 진정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존경스런 사람이 아니겠는가를 다시 한번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반년 동안 모지름 쓰며 견지하다가 김동철씨가 사직하는 바람에 이 협회는 활동을 잠시 중지하였다.

1997년 9월의 어느 날, 리룡득선생님이 날 찾아왔다.

“이 협회를 해체시킬가요? 너무 힘들어서요.”

“아니, 그냥 견지해보면 좋겠습니다.”

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불쑥 튀여나갔다.

나는 왜서인지 협회가 해체되는 게 가슴아팠다. 어떻게 세운 협회인데. 또 이만큼이라도 걸어오기 위해 얼마나 모지름 써왔던가. 그리고 우리 어린이들의 건실한 성장과 꿈을 살찌우기 위해 꾸린 협회인데 계속 꾸려나가는 게 우리들의 사명이 아닌가?

“장부에 지금 돈이 얼마 있는가요?”

리룡득선생님이 계속 물었다.

“60원이 있습니다.”

그 때 협회의 장부가 내 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 래일 글쓰기 열성자들을 조직하여 들놀이를 하던지. 그리고 영옥씨가 잠시 회장을 맡아서 하세요.”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계속 운영하는 게 고달프지만 그러나 잠시라지 않는가?

그러나 그 잠시가 꼬박 10년일 줄을 그 때는 생각지도 못했다.

안도현 토월산 아동문학협회를 설립하고 다섯 회원이 함께 남긴 기념사진

이튿날, 나는 원래의 회원에다 글쓰기 열성자 두분을 더 불러서 함께 저수지로 유원활동을 떠났다. 가을의 하늘은 푸르다 못해 유리알처럼 알른거렸다. 우리는 그날 가을하늘을 향해 또다시 새로운 꿈, 더 큰꿈을 펼쳤다.

그날 저녁 나는 자리에 누웠지만 잠들지 못했다.

“난 인제부터 아동문학협회의 코기러기다. 어깨가 무겁더라도 중도에서 절대 주저앉지 말아야지!”

나의 속다짐이였다.

그 들놀이를 계기로 해서 몇달간 수면상태에 처했던 문학회가 새봄을 맞이한 풀처럼 파아랗게 살아났다.

자주 활동하고 또 새로운 회원들을 발굴하니 원래는 회원 다섯명뿐이던 것이 후에는 스무명도 넘었다. 나는 할수록 힘이 생겼고 희망은 수림처럼 자꾸 커갔다.

회원들에게 신심을 주기 위해 해마다 회원들의 특집을 조직하였는데 그 때는 컴퓨터 시대가 아니여서 우편으로 보내지 않으면 나는 늘 자기 돈을 팔며 두툼한 원고들을 가지고 직접 잡지사로 찾아가기도 했다. 불편한 다리로 잡지사의 아래웃층을 오르내리기가 힘겹기도 했다.‘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무릇 내가 가지고 간 회원들의 글들은 모두 신문 잡지에 실렸다.

협회의 활동자금을 위해 여러 관계부문에 다니면서 돈 구걸도 했는데 많은 부문에서 지지를 주었지만 일부 부문에서는 비난도 했다.

“돈도 없으면서 왜서 협회를 꾸리오? 우리도 살기 어려운데 언제 당신들에게 줄 돈이 있겠소?”

퇴짜를 맡고 구름이 꽉 찬 얼굴로 돌아서서 나올 때면 눈물이 나기도 했다. 정말 울고만 싶었다. 그러면서 자문도 해본 적이 있었다.

“내가 왜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협회를 위해 이렇게 뛰여다니고 이렇게 비난도 당하고… 아니 아니, 모든 일이란 순풍에 돛 단듯 순조로운 게 아니잖은가. 그리고 난 또순이야!”

이전에 어느 작가분이 나에게‘또순’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물었더니 그 작가분이 “이악스럽고 끈질긴 녀자를 통털어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했다. 그래! 난 이악스럽고 끈질긴 녀자다. 그런데 내가 어느새 이악스런 녀자로 변했단 말인가? 난 나의 변화를 두고 정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원래 나는 양띠를 타고 태여나서인지 양처럼 온순하기로 소문이 났었다. 그 누가 욕해도 대꾸도 바로 못하는데… 해야 할 말조차 하기 싫어하는데… 그러던 내가 글쎄 협회를 위해 돈을 잘 얻어들이는 재간둥이로 되다니, 그리고 원칙 앞에서는 사정을 두지 않는 녀자로 되다니. 협회를 이끌면서 나는 바로 이렇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렇게 변해야 했다.

그러다가 많은 지성인들의 칭찬을 들을 때면 나의 작은 가슴은 바다처럼 마구 설레였고 꿈은 어느새 저 멀리로 날아가서 영글고 있었다.

“네. 참 좋은 사업을 하십니다.”

“우리 민족의 영웅들입니다.”

협회에 경비가 부족할 때에는 많은 회원들이 자기 주머니 돈을 터는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벌어온 돈을 서슴없이 내놓은 회원, 식당업을 하면서 수고스럽게 번 돈을 내놓은 회원… 참 감동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활동장소를 마련해준 안도현도서관의 리성철 관장님, 문학을 사랑한다면서 호주머니 돈을 선뜻 내놓던 량성복, 김창식 등 이런 고마운 분들로 해서 나에게는 샘물처럼 힘이 자꾸 생겼으리라.

나는 신체가 허약해서 늘 전신이 무너질듯하면서도 정신만은 똑바로 추슬렸다. 한달에 적어서 한번, 많으면 두세번씩 활동했는데 이렇게 해해년년 견지하고 또 견지했다.

나는 회장인 만큼 돈을 얻어야 했고 일부 회원들의 서투른 글을 보아주고 수정하고…간행물에 실을 글들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였다.

힘겨웠지만 재미 있는 에피소드도 많았다. 2003년 4월의 어느 날 나는 감기 때문에 개인진료소에 가서 점적주사를 맞게 되였다. 그때 의사선생과 동창생 김은철이 놀러 왔는데 내가 글을 쓴다는 걸 알고는 제꺽 내 곁에 다가왔다.

“이것 참 너무 좋은 분 만났군요. 저도 그 협회에 가입할 수 있는지요? 만약 동의하신다면 오늘 저녁 한턱 낼게요.” 하고 롱담반 진담반 하는 것이였다.

또 한번은 뻐스를 타고 연길로 가는데 옆에 앉은 잘 아는 사람이 날 보고 지금도 글 쓰는가고 물어왔다. 이에 앞에 앉은 삼십대 중반의 웬 남자가 제꺽 돌아앉더니 나의 손을 덥석 잡으며 이렇게 반기였다

“아, 오늘 끝내 찾았군요. 며칠전에 이 협회가 안도현텔레비죤에 소개되는 걸 보고 저도 의향이 있어서 찾던 중입니다. 정말 하늘이 내 마음 알아준 셈입니다.”

문학의 매력은 바로 이같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밤잠 이루지 못하게 했고 또한 가슴 설레이게도 했다. 문학은 숭고하다.

한 사람은 자기와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있는데 나이가 많아서 친구도 없고 놀러 다닐 곳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니 협회에 가입시켜달라고 사정해왔다. 내가 거절하자 그는 성을 버럭 내면서 마구 욕까지 하는 것이였다. 인정이 없다느니, 회장이라고 권리를 내세운다느니… 어떻게 욕해도 나는 좋았다.

이 협회는 엄숙한 우리글 쓰기 애호자들의 삶의 터전인 만큼 놀러 갈 곳이 없어서 심심풀이로 찾아오는 협회가 절대 아니다. 협회란 협회의 원칙이 있고 규정이 있는 만큼 나는 에누리 없이 그대로 하고만 싶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에누리 없는 성격이였고 옹고집이기도 했다.

문학협회라 해서 엄숙하기만 한 장소가 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나는 일년에 두번씩 문체활동도 조직하였다. 재미 있는 오락프로로 온 하루 즐거움 속에서 보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고 어느 회원이 병에 걸리면 곧 위문했고 또한 명절이거나 생일이면 함께 모여서 식사도 하다 보니 회원들은 협회를 늘 자기 집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만나기만 하면 서로 반가와서 어쩔 줄 몰랐다.

때론 너무도 힘들어서 몇번이나 회장 직을 내놓겠다고 했더니 회원 전체가 반대해나섰다.

“만약 박회장이 아니라면 우리 협회가 해산된 지 오래지요. 그러니 조금만 더 수고해주세요”

“글쎄 오늘까지 이 협회를 이끄느라 고생도 많았지요. 더구나 성한 몸도 아니니까. 그런데 우리는 박회장을 장애인으로 생각한 적 없었어요.”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만점이란 점수를 주는 회원들이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장애인 나를 언제나 성한 사람처럼 인정해주어서 고마웠고 믿어주고 밀어주고 격려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래서 다시금 다져보기도 했다. 더 힘내자. 더 높이 날자!

2007년 3월 21일, 안도현아동문학회는 설립 10주년을 맞는 모임을 가졌다. 그 날의 하늘은 여느 때보다도 더 푸르렀다.

연변의 각 현, 시에서 모여온 수십명의 귀빈들을 모시고 강단에 올라서 10년 동안의 희로애락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나는 왜서인지 눈시울이 자꾸만 젖어들었다. 사진기의 섬광등과 박수갈채 속에서 나는 울렁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면서 10년 동안 걸어온 발자국을 총화하였다. 장장 10년, 이 10년은 때론 눈물, 때론 웃음, 또 때론 한숨, 또 때론 즐거움으로 보냈던 나날들이였다. 그날 연변주아동문학학회에서는 나의 십년 동안의 수고를 기리여 공로패를 증정하였다.

내가 회장 직으로 있던 1997년부터 2007년까지 회원들의 작품이 《중국조선족소년보》,《연변아동문학》,《흑룡강신문》,《종합신문》,《아동문학샘터》등 잡지에 실렸는데 발표수는 360여편이 되였다. 안도현아동문학회는 2004년과 2005년에 연변조선족아동문학학회로부터‘우수협회’로 선정되였고 나는 또 2007년 연변아동문학회 대표단 일원으로 한국에까지 갈 수 있는 행운을 지니게 되였다.

2008년에 나는 회장 직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제날의 열정을 식히지 않고 오늘까지도 그냥 새 회원들을 발굴해내고 글도 수정해주고 추천해주기도 한다. 왜냐 하면 내가 하는 일이 보람있고 내가 걷는 길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며 우리 민족의 사명을 위해 더 열심히 뛰여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인생이란 이 도화지에 열심히 래일의 인생 설계도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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