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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113]우리 부부의 꿈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11-28 12:14:29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41)

▩원죽순(화룡)

필자 원죽순 부부

1976년도에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우리 부부의 꿈은 먹고 입을 걱정 없이 아담한 집에서 아기자기 잘살아보는 것이였다.

70년대의 생활수준은 집집마다 거의 가난에 쪼들렸다. 병약한 시부모를 모셔야 하는 우리 가정도 례외가 아니였다. 째지게 가난한 살림살이를 남편은 백지에 비유하면서 우리 둘이 손을 맞잡고 부지런히 일하여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자고 하였다.

당시 20대 중반의 새파란 청춘의 우리 부부인지라 그 꿈을 실현하고저 부지런히 생산대의 일에 나가 공수를 벌었지만 큰가마밥을 먹던 그 세월에는 근심없이 살아보려는 소박한 꿈도 이루기 어려웠다.

집체일이라 모두들 남의 일처럼 하루하루를 얼렁뚱땅 넘겨 공수나 벌고 보자는 심리였고 살손을 대여 잘 가꾸지 않은 집체 콩밭, 조밭, 옥수수밭에는 풀이 무성하여 범이 새끼 칠 지경이였다.

밭에 초황이 들자 생산조 조장은 밭을 인구당씩 떼여주어 김을 매게 하였다. 그렇게 하여 겨우 초황은 면했지만 가을에 가서 수확이 낮아 인구당 분배되는 식량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마침 정부에서 새 정책이 시달되였다. 1982년도에 호도거리가 시작되여 밭을 호마다 나누어 부치게 했고 집체의 소도 호마다 나누어 사양하게 했다. 우리 집도 인구에 따라 밭과 여윈 소 한마리가 차례졌다.

정말 당의 정책은 정확하였다. 밭을 호마다 도급주니 집체일이라면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매고 앓음자랑 하던 사람, 이 핑게 저 핑게를 대면서 집체일에 나오지 않던 사람들도 모두 자기가 도급맡은 밭에서 구슬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였다.

우리 부부도 책임포전을 알심들여 가꾸었다. ‘땅은 받은 만큼 돌려준다’고 우리 집 뿐만 아닌 집집마다 풍작의 희열을 맛보았고 앞마당에 높이 가린 곡식 낟가리를 보는 사람마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였다.

풍작은 거두었지만 그 때는 량식값이 눅었기에 식량을 남기고 그 나머지를 팔아 국가에 농업세를 바치고 농업비용까지 제하고 나면 가정에서 소비해야 할 용돈이 모자랐다. 동네와 친척의 ‘군일’ 행사와 집에서 일년 동안 쓸 각종 비용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돼지와 닭, 개도 치면서 겨울이면 남편은 개인 석탄갱에서 석탄 캐는 일도 하고 나도 겨울 한철 명태 씻기를 하고 봄이면 식수일을 하고 여름이면 집의 밭일을 끝내고 남의 집 삯일도 하고 8월이면 산에 올라 약재 캐기도 하여 가정생활에 보탬하였다.

그렇게 사시절 부지런히 일한 결과 가정생활은 많이 좋아졌다. 남편이 그렇게 부러워하던 질 좋은 자전거와 14인치 흑백텔레비죤을 갖추어놓을 수 있었다. 텔레비죤을 사던 날 온 동네에서는 구경을 왔었고 여덟살 아들애는 너무 좋아서 텔레비죤 앞에 앉아 구경하면서 온밤 잘 념을 안했다.

‘말을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고 사람의 추구란 끝이 없는 상 싶었다. 가난에 모대길 때에는 먹고 입는 걱정 없이만 살아도 만족일 것 같더니 텔레비죤과 자전거를 사니 세탁기와 랭장고가 부러웠다. 그래서 우리 부부에게는 또 새로운 꿈이 생겨났다.

그 때까지 우리는 초가집에서 살았는데 비오는 여름철이면 비가 새고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철이면 벽이 얇고 종이로 도배한 천정으로 찬바람이 새여들어와 집안에서도 솜옷을 입어야 했다, 이런 초가집을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근심걱정이 없는 덩실한 벽돌기와집으로 바꾸고 싶었다.

우리 부부는 5년을 목표로 부지런히 돈을 벌어 덩실한 벽돌집을 장만하자고 약속한 다음 이른봄부터 농사차비를 차근차근 하였다. 봄부터 제때에 농가비료를 내고 알심들여 과학적으로 농사를 지었더니 가을에 가서 조이삭은 황둥개 꼬리 만큼 컸고 옥수수 이삭은 빨래방치 같았고 콩은 가지마다 다래가 주렁주렁 열렸다.

타작을 끝내고 보니 산량은 계획보다 높아서 각종 비용을 제하고도 남는 수입이 짭짤하였다. 이렇게 5년만 농사를 잘 지어 수입을 올리면 벽돌집을 장만할 자신이 있었다.

농사일을 끝낸 그 해 겨울 남편은 꿈을 안고 청산리 목재판으로 돈 벌러 갔다. 그런데 사람의 일은 한치 앞을 모르고 하늘의 풍운조화는 예측키 어렵다고 시종 건강하던 남편이 뇌출혈에 걸릴 줄이야…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그 기간 아글타글 돈을 모아 산 텔레비죤도 팔고 남편이 아끼던 자전거와 알뜰살뜰 사양하여 살이 쪄 영각소리 동네를 들썽하던 부림소도 팔고 집에 남겨둔 식량을 팔아 화룡시병원에서 석달간 치료를 받았다. 이렇게 끝내 남편의 생명은 구했지만 남편은 말도 못하고 대소변도 못 가리는, 자립이 전혀 안되는 식물인이 되여버렸다.

온 하루 침대에 누워 까딱 움직이지도 못하고 초점 없는 눈길로 천정만 쳐다보는 환자를 보고 의사는 더 치료할 가망이 없으니 퇴원하라는 것이였다. 그 때 35세 밖에 안된 남편은 집으로 가면 죽음을 기다리는 길 밖에 없었다.

결혼 생활 8년간 우리 부부는 구전한 가전제품에 아담한 벽돌집에서 근심없이 잘살아보려는 꿈을 안고 열심히 노력해왔는데 그 꿈을 이루기 전에 남편을 하늘나라에 보내면 절대 안되는 용납 못할 일이였다.

나는 꼭 남편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연변에서 제일 큰 병원으로 가기로 작심하였다. 돈도 없고 연변병원으로 가도 살 가망도 없는데 포기하라는 옆사람들 권고도 마다하고 담가를 들고 연변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식물인 환자를 보던 의사는 머리를 저으면서 상해병원으로 가라는 것이였다. 시병원에서 가산을 팔아 몽땅 치료비에 들어갔는데 상해병원이란 우리 집 형편에는 아예 말도 안되는 일이였다. 나는 의사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 환자를 병원 실험용으로라도 받아달라고 애걸했다. 만약 치료에 성공하면 앞으로 이런 환자를 더 살릴 수 있지 않겠냐고 하면서.

그 후 여러 경로의 인맥을 통해 입원치료를 받았는데 큰 병원은 정말 의술이 높았다. 의사들의 40여일간의 정성어린 치료를 거쳐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씩 걸을 수 있었고 사람도 알아보았다. 의사는 뇌출혈 사망률은 99%인데 이 환자는 보기 드문 기적이라면서 하지만 남편의 지능은 다섯살 어린애 만큼 하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늘 아이처럼 행동하였고 한병실의 남의 집 서랍도 함부로 열어보고 한호실의 중풍환자의 지팽이를 삽자루로 쓰겠다고도 하는 것이였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들을 하루에도 얼마를 저지르는지 몰랐다. 그러는 남편을 한병실의 환자와 가족들은 너그럽게 받아주고 배려해주면서 끼니마다 맛나는 음식을 갈라주군 했다. 그 분들의 정다운 모습은 32년이 지난 오늘에도 어제 일인듯 눈앞에 삼삼히 떠오른다.

퇴원하여 집으로 온 다음에도 늘 헛소리를 하고 땅이 떵떵 어는 오동지 섣달에도 삽을 메고 논물 보러 갔다 온다는 환자를 보던 의사는 정상인으로 회복되자면 3, 4년 정도의 치료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밭을 남에게 양도하고 벽돌공장에 출근하면서 퇴근 후면 터밭도 가꾸고 열심히 일하여 남편의 병치료와 허약한 남편의 영양보충에 있는 힘을 다하였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남편의 병은 차츰 호전을 보였고 날에 날마다 건강이 회복되여갔다.

그 기간 친척들과 량가 형제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더우기 그 때 시부모와 본가집 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되였지만 생전이였던 우리 엄마가 많은 속을 태우시며 우리를 도우려고 고생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동네 분들도 영양보충하라고 그 없던 세월에 맛있는 식품을 사들고 문안 오셨고 내가 힘들어할 때 촌지도부와 진정부에서도 구제금을 보내왔다. 그 때 눈물 나게 고마왔던 사연은 지금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진한 감동을 준다.

3년이 지나 남편이 건강이 회복되자 양도주었던 밭도 찾아부치고 집짐승도 키우면서 병치료에서 진 빚을 갚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한가한 겨울이면 보따리 옷장사도 하고 여름이면 풋옥수수 장사를 하며 생활에 보탬하였다.

빚을 갚기 위해 아글타글하다 보니 남들이 다 구경 가는 연길공원 유람을 가자고 어린 아들과 약속해놓고도 돈 때문에 가지 못했고 언제 한번 맛나는 간식도 사주지 못했다.

그렇게 절약하고 부지런히 일한 덕에 외국에 가지 않고도 빚도 갚고 가족도 지킬 수 있었고 아들이 좋아하던 텔레비죤도 다시 살 수 있었다.

지금은 나라 정책이 좋아 농촌에 돌아오는 혜택도 많다. 이전에는 국가에 농업세를 바쳤지만 지금은 국가에서 그 농업세의 몇배나 되는 농업 보조금을 농민들에게 내여주고 어느 해인가는 농민들이 치부하라고 집집마다 암소 한마리씩 보내주었다. 붉은 기와를 얹은 덩실한 기와집에서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살아가고 있는 촌민들의 얼굴마다에 웃음꽃이 활짝 피고 촌민마다 나라 정책이 좋다고 엄지를 내든다.

우리 집도 정부의 혜택으로 비가 새고 내굴내를 먹고 목숨을 잃을 번했던 낡은 초가집을 새 벽돌집으로 바꾸게 되였고 그 집에서 7년 세월을 보낸 지난해에는 또 파가이주에 들어 현재는 50여평방의 새 아빠트에 이사와서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다.

지금 남편은 70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건강한 몸으로 공농촌 촌민조 조장과 공농촌로인회 회장으로 맡은 바의 사업을 열심히 하여 촌민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51세 때에는 청년시절부터 갈망해오던 입당도 하고 룡성진 모범공산당원으로 당선되는 영예도 받아안았다.

천성이 부지런한 남편은 지금도 건강한 몸으로 맡은 바의 사업을 열심히 하면서 여가시간이면 터밭도 가꾸고 봄이면 산에 올라 산나물도 뜯고 8월이면 산으로 버섯 따러도 다니면서 충실한 로년을 보내고 있다.

구전한 가전제품에, 앞산의 사시절 바뀌는 경치가 그대로 아름다운 풍경화가 되여 해살 밝은 아빠트 창문에 비쳐드는 새 층집에서 꿈만 같은 행복한 생활을 누리면서 나는 종종 어려웠던 지난날을 떠올리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정부의 도움으로 그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넘긴 우리 부부다. 이렇듯 내가 힘들어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친척과 형제 이웃 분들 그리고 한병실에 있었던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분들의 형상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영원히 내 가슴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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