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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116] 잊을수 없는 공안군에서의 나날들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12-21 14:01:55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44)

▩최병성(장춘)

길림성 내위영 시절 전우들과 함께(앞줄 좌2가 영장 박효조, 좌3이 교도원 정영일, 뒤줄 우2가 필자.)

나는 삼척 돌각담 하나 변변히 쌓아올리지 못한 채 나이 수자만 올라갔지만 80성상 오랜 세월에 잊지 못할 일이나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 더구나 60여년 전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길림성 내위영(内卫营)에서 근무하던 나날들과 그 때의 전우들은 평생 잊을 수 없다.

1956년의 봄이였다.

벼꽃이 한창 피여 ‘사마귀를 받’을 그 무렵, 일본해에서 올리 부는 태풍이 벼대마저 휘감아 태를 쳐놨으니 하늘과 물어 무슨 소용이고 땅을 쳐봤자 무슨 소용이랴. 이렇게 찍어놓은 흉년에 아버지는 소를 몰고 왕청 무방 목재판에 가서 한푼이라도 벌었고 어머니와 나는 산을 헤매고 들판을 헤쳐가며 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풀씨와 산나물을 채집했다. 하여 그럭저럭 그 해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그 때는 사영기업은 공사합영으로, 개체농호는 초급사, 고급생산합작사에로 이어지는 사회주의개조의 거센 물결을 타던 무렵이였다.

그 날 나는 인민정부의 혜택으로 겉옥수수 한마대와 두병 두개를 밀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민병대장을 만났다. 그가 하는 말이 래일 영화관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으니 참가하라는 것이였다.

집마당에 도착해 어머니와 함께 량식을 부리우는데 어머니는 내 어깨를 툭 치면서 “이 량식이면 햇풀이 나올 때까지 씨종자를 붙일 만하겠구나!” 하시면서 “고생에는 배고픈 고생이 제일 섧니라.”라고 하셨다. 순간 나는 어머님의 한많은 지난날들을 생각하니 코마루가 찡해났다.

다음날 어머니가 지은 아침밥을 먹고 어머니에게 회의에 갔다 오겠다 하고는 영화관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회의군들은 그런대로 꽤 모였고 무대 앞 높은 곳에는 붉은 천 프랑카트에 노란색으로 된 ‘의무병역제 좋다(义务兵役制好)’란 글발이 조명등에 반사되여 더더욱 두드려져 보였다. 훈춘현 병역국 태룡선 부국장은 연설에서 이번 처음 시작되는 의무병역제는 중국인민해방군이 현대화, 정규화에로 다그치는 근본이며 세계무대에서 우리 군이 강대해졌음을 과시한 것이라면서 전 현 모든 적령 청년들은 용약 등록하고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군할 것을 소리높이 호소하였다.

그리고 특대 희소식을 알렸는데 상해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한참 떨어져있는, 국민당 잔여부대가 둥지를 틀고 있던 일강산도에서 화동군구 참모장 장애평 장군의 지휘하에 륙해공군 협동 립체 작전으로 잔여군을 깨끗이 소멸하고 일강산도를 완전 해방했다는 것이였다. 장내에는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장개석의 대륙반공의 꿈은 또 한차례 박산났다.

그 다음날 각 구를 단위로 한 소조토론이 열렬히 진행되였다. 40여명 적령 청년들은 한결같이 등록표에 서명했으며 우리 가두에서는 박창길, 문인걸, 최태호, 박근양, 최병성(나), 우정득 6명이 정치심사에 합격되여 신체검사를 받게 되였다.

현당위 구락부를 림시로 칸을 막고 군복 차림의 군의들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청년들의 이름을 불러들이군 했다. 내 차례가 되여 대답하고 체검실에 들어섰다. 한 녀성 군의가 흰 위생복 차림에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군의의 말대로 옷을 벗었더니 팬티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였다. 나는 놀란 나머지 목구멍까지 올라온 외마디소리를 겨우 삼켜버렸다. 군의는 나의 머리끝부터 발바닥까지 발톱사이며 두드러진 곳과 깊은 홈채기까지 빠짐없이 세심히 검사했다.

그 해 초봄, 아직 겨울기가 채 가셔지지 않은 우수 경칩 계절의 어느 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입대통지서를 받아안았다. 입대통지서를 들고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벽에 걸려있는 형님의 렬사증을 바라보는 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신병훈련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신병련 지도원 최수산동지가 나를 불러 영 구락부로 즉시 가라고 지시했다. 구락부에는 처음 대면하는 로병들 외에도 함께 입대한 전경호와 조창기 동무가 있었다. 지도원의 지시에 따라 도착보고를 올렸다.

길림군구 제3차 문예공연 대회에 참가할 종목 련습이 그 날부터 시작되였다. 15일간의 밤낮 없는 간고한 련습을 거쳐 마침내는 5월초에 장춘군인구락부 무대에서 길림성 내위영의 민족 특색이 짙은 문예종목을 선 보이게 되였다. 공연에서 조선족의 아름다운 민족복장은 은을 내며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불러일으켰다.

성군구 정치부와 대회 주비처는 이번 경연에서 우수 종목을 선정해 항미원조 전선에서 싸워이기고 귀국해 길림성에 주둔하고 있는 ‘가장 사랑스런 사람’들과 각곳에 널려있는 후방병원 그리고 묵묵히 국방건설에 이바지하고 있는 군사단위들에 위문공연을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새로운 종목을 더 연습해 보충하기로 했다.

길림군구전사공연대가 해방군 제1사격장 위문공연을 목적으로 기차로 백성자를 향해 이동하던 중이였다. 공연대 로(鲁)대장이 문득 나를 불렀다. 그는 나를 보고 놀라지 말라면서 어머니가 사망하셨다는 비보를 전하는 것이였다. 과연 ‘청천벽력’이였다. 아버지와 동생들 그리고 동네 분들에게 맡겨 어머니를 하늘나라에로 보내게 된 이 불효자식의 속은 터졌다. 기차는 레루 우를 미끌며 삼단 같은 검은 연기를 풀어헤치고 사정없이 달리는데 고동소리만 길게 오래도록 저 하늘에 메아리쳤다.

우리 부대의 명칭은 중국인민해방군 공안군 길림성 내위영(독립영)이였다. 당시 길림성의 공안군으로는 장춘에 28퇀이 있었고 길림에 29퇀이 있었으며 연변에 우리 내위영이 있었다. 길림성 내위영은 영장으로부터 전사에 이르기까지 95% 이상이 조선족이였다.

영장은 박효조(대위, 조선족)였고 교도원은 정영일(대위, 조선족), 부영장은 함매당(상위, 한족)이였다. 참모장 김응덕(상위, 조선족)이 련장을 겸임한 제1련은 연길시 사회 집법과 군인 규찰을 책임졌었고 홍봉석(상위, 조선족)이 련장을 맡은 제2련의 주요 임무는 길림성 제3감옥(연길감옥)의 외부 경위와 로동개조 기름공장 외부 경위를 책임졌다.

우리가 소속된 2련 1패는 자치주당위와 주정부, 연변분군구의 기관 경위와 큰 기념행사 때의 대회장 안전 경위를 담당하였다. 김인필(상위, 조선족)이 련장을 담당한 제3련은 안도현 십기가 로동개조농장 범인들의 안전 생산을 보장하는 외부 경위를 맡았는데 비교적 간고한 곳이였다.

박영장을 비롯한 내위영의 전체 골간들은 항일전쟁, 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서 혁혁한 공훈을 떨친 영웅들로 뭉친 지휘관들이였다. 박영장의 일화는 매우 감동적이였다. 1942년경 어느 개인 회사의 자동차에 짐을 가득 싣고 료녕성 반금 쪽으로 운전해나오는데 일본침략군 놈들이 마구 달려들어 총부리를 박효조의 가슴팍에 대고 자동차의 짐은 팽개치고 일본침략군 물자를 싣고 열하성 승덕 쪽으로 가자고 하더란다. 울며 겨자 먹기로 순종해 가던 도중 8로군의 습격을 받아 일본군은 전멸당하고 당시 박효조는 팔로군에 입대하여 일본놈들과 맞서 항일을 하게 되였다 한다. 해방전쟁 시기엔 소화 장군의 찌프차를 몰았고 경위원으로서 공로도 많이 세웠다 한다.

우리 1패의 전사들은 경위 임무를 착실히 집행하면서 정치 학습과 군사 훈련을 계획에 따라 진행했다. 정치 학습에선 주로 참군 동기가 불순한 신병들의 사상문제를 해결하였다. 신병들은 ‘총만 들면 적들과 한바탕 싸워보자’는 생각이 많았다. 제2련 차지도원의 말은 지금도 인상 깊다.

옛날 한 포수가 있었는데 자기에게 덮쳐드는 사자는 쏴눕혔는데 뒤에 숨어있던 호랑이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것이였다. “하기야 동무들은 전쟁 년대에 나서 자랐기에 듣는 것이 전쟁이야기요, 보는 것이 전투편 영화였지요… 강한 야전군도 있어야 하지만 공고한 후방 안전군도 있어야 최후 승리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학습을 통해 신병들의 눈은 다소 밝아진 것 같았다. 우리는 또 여유시간을 짜내 군중공작의 일환인 겨울 한철 길가의 두엄 줏기와 시내 변소 치기를 하여 교외 최죽송농업사 및 민주촌 여러 농업합작사에 거름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 해의 음력설을 맞이하게 되였다. 온 나라가 들끓는데 연길시도 례외가 아니였다. 중요 임무를 집행하는 우리 패도 지위 정문에다 붉은 초롱을 건다, 족자를 써붙인다, 유희장을 마련한다 법석이는데 지도원동지가 오더니 1반장 천재식, 2반 부반장 박동훈과 우리 몇몇 전사들을 불러 특별임무가 있으니 사상준비를 하라고 했다.

섣달 그믐날 나는 로동복을 입고 주덕해 서기네 집 마당에서 광주리에 석탄을 담아 보일러실에 옮기는 일과 나무를 패고 마당을 쓰는 등 잡일을 하면서도 고도의 혁명적 경각성으로 수장 보위와 요원 안전을 보장했다.

한주간 임무시간이 끝나던 날, 주덕해 주장의 부인께서는 우리를 조용히 부르시였다. 단란한 혁명가정 식솔들과 무릎을 마주하고 앉은 우리로서는 너무나 송구스러웠고 가슴은 높뛰였다

주덕해동지께서는 손수 차잔을 우리 앞에 밀어놓으시면서 “동무들 그간 수고했소.”라고 치하했다. 천재식 반장과 나는 전사의 직책을 배운 그대로 “인민을 위해 복무합니다!”라고 웨치자 주덕해동지는 손을 들어 우리를 앉으라고 하시면서 “동무들은 부모 형제와 떨어져 부대 생활을 하느라고 부모가 그립고 고생스럽겠지만 좋은 날이 꼭 올게우. 혁명하는 데는 지위의 높고 낮음과 분공이 다를 뿐이지 모두가 혁명동지요!”라고 친절하게 말씀했다.

이렇게 전사들의 마음을 꿰뚫고 자상하게 이야기를 해주시던 주덕해 주장의 온화한 모습은 무거운 감동으로 남아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있다.

주덕해동지는 당시 중국인민해방군 대교 직함을 수여받은 연변분군구 제1정위이시며 자치주 제1서기 겸 자치주 주장이시였다.

길림성 내위영의 나날은 나의 혁명과 건설 사업의 첫걸음이여서 더더욱 인상 깊고 그 때의 전우들이 항시 그리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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