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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119]추억에 실린 생일날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12-26 13:35:33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47)

▩리희숙(안도)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길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시로 머리 속에 떠올라 걸어온 인생의 자취를 더듬어보게 한다.

생일이 다가오면서 나는 너무 일찍 저세상에 가버린 남동생을 그리며 뼈저린 후회와 자책에 찢기는 가슴을 움켜쥐고 그리움에 젖은 참회의 눈물을 또 흘리게 된다.

아! 저세상에 간 남동생은 지금도 이 못난 누나를 그리며 원망에 젖은 하소연을 하고 있지나 않을가?

나의 사색은 저도몰래 지나온 인생을 아프게 더듬어오른다.

1950년대 그 세월, 째지게 가난한 우리 가정의 중임을 떠멘 어머니는 한끼를 에우고는 다른 한끼 걱정에 한숨을 지었었다.

바로 내가 다섯돐 생일을 맞던 그 날 아침이였다. 정지목에 누워 신음하던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시더니 한참 후에 비틀거리며 들어오셨다.

“아니, 엄마 불편한 몸으로 어디에 갔다 오셔요, 할일이 있다면 저를 시키지 않고.”

“희숙아, 너 벌써 셈이 드는구나. 오늘은 네 생일이야. 아무리 없어도 생일이야 쇠여야지. 해줄게 없구나. 옛다, 닭알 두알을 얻어왔으니 너절로 삶아먹어라. 나 불편해 누워야겠다.” 하며 어머니는 정지목에 누우셨다.

어머니는 배를 끌어안으며 몹시 바빠하셨다. 이마에서 구슬땀이 방울방울 돋았다. 엄마에게서 받은 닭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린 나는 어쩔 바를 몰라하였다.

엄마가 잡숫지 못해 기진맥진한 거라고 생각한 나는 닭알을 쥔 채 숙모네 집으로 달려갔다.

“작은엄마, 울 얼마 몹시 아파해요. 아마 배고파 그럴 거예요. 이 닭알로 죽을 써주세요.”

“그래? 그럼 아침불도 못 땠겠구나. 이번 달이 너 엄마 해산달인데. 어디 가보자. 내가 가서 죽을 끓여줄게.”

작은엄마는 집에 있는 좁쌀을 쪽바가지에 담아들고 나와 같이 우리 집으로 왔다.

바로 그 날 어머니는 남동생을 낳았다. 다섯해 전 이날 아침에 내가 태여났는데 신기하게도 동생도 이 시각에 태여났다.

이렇게 나와 남동생은 신통하게도 음력 10월 9일 한날 생일이 되였다. 어머니는 모든 사랑을 나와 동생에게 몰부으셨다.

온 나라가 대식품으로 주린 창자를 달래던 60년대 초의 어느 해 생일이였다. 그 날 아침 어머니는 찬서리를 맞으며 가을 달래를 캐여다가 무쳐놓고는 “그래도 너희들 생일인데 색다른 음식을 해주어야지.”라고 말씀하시고는 부랴부랴 강건너 한족집에 가서 강냉이떡 네개를 얻어왔다.

“생일을 잘 쇠여주자 해도 마음 뿐이지 방법이 없구나. 어서들 먹어라.”

점심에 강냉이떡 두개씩 나와 동생 앞에 놓아주며 어머니는 서글프게 웃었다.

“어머니 고마와요.”

나는 어머니 목을 부여안고 볼을 비비였다. 동생은 떡을 집어먹으며 “야 참 맛있다. 누나도 어서 먹어.”라고 하였다. 나는 동생이 맛있게 먹는 것을 지켜보다가 떡 하나를 집어들고 어머니도 같이 잡숫자고 하였다. 어머니는 한족집에서 먹고 왔기에 배부르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떡을 절반 끊어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애두 참, 니 앞에선 어쩔 수 없구나.” 하면서 어머니는 나와 같이 강낭떡 반개씩 먹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떡 두개를 게눈 감추듯 먹어버린 동생은 내 접시에 남은 떡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더니 “누나 빨리 먹어. 그럼 나 학교 가…” 하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남은 강냉이떡을 남겨두었다가 저녁에 학교에서 돌아온 동생에게 주었다. 떡을 손에 쥔 동생은 퐁퐁 뛰며 “세상에 우리 누나가 제일이야.”라고 하였다.

그 때 동생보다 다섯살 우인 나는 동생을 몹시 귀여워하였고 동생도 나를 몹시 따랐다.

나는 식사 때마다 죽 한그릇이라도 동생더러 더 먹으라고 밥술을 먼저 놓았고 누룽지나 색다른 음식이라도 생기면 두었다가 동생에게 주군 하였다. 해마다 죽물이라도 겨우 마시며 생일을 쇠여도 마음은 몹시 즐거웠다. 가난이 사랑을 낳고 사람을 일찍 철들게 한다더니 가난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던 그 때는 어머니의 포근한 사랑의 품이 있어 모든 역경을 이겨 나가게 하였으며 고생속에서도 생활은 즐겁기만 하였다.

나도 어머니 품성을 닮아서인지 동생이 그토록 사랑스러웠다. 혈육의 애틋한 정을 그 무엇으로 도 형용할 수 없었다. 우리 오누이는 학교를 나와 사회에 진출하면서부터는 함께 생일을 쇠지 못하였다. 개혁개방 후 우리 형제는 저마끔 대상자를 찾아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었다. 생활도 많이 펴이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 무슨 보이지 않는 장벽이 가로막혔던지 우리 오누이는 한날 생일을 한번도 함께 쇠여보지 못하였다.

나는 생일 때마다 아래 동생들을 연길에 있는 동생 집에 보내고 나는 자식들을 데리고 집에서 쇠였다. 그럭저럭 하다가 우리는 연변 땅에서 한번도 생일을 함께 쇠여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1999년말 연길에서 동생을 만났다. 우리는 서로 반가와하며 동생이 산 국수를 맛있게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나! 어릴 때 누나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았지만 누나 생일에 한번도 가보지 못해 죄송하오. 새천년에 우리 함께 생일을 쇠여보기요.”

“아니, 내 잘못도 있다… 그래 니 말이 옳다. 다음 생일은 우리 함께 쇠여보자. 혈육의 정이 더 뜨겁게.”

그 날 나와 동생은 굳게 약속하고 갈라졌다. 그런데 청천벽력이라 할가, 새천년 7월 연길시방역소에서 사업하던 동생이 간암후기라는 진단을 받을 줄이야! 나는 련며칠 울고 울었다. 나와 동생의 지나간 인생사가 영화필림마냥 자꾸 눈앞에 떠오르면서 나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나는 병상에 누운 동생을 간호하면서 자책과 후회의 눈물을 머금고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동생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누나, 지난날 누나에게 미안한 점 많았소. 가난에 모대기며 살 때는 형제간 정이 두터워 부모 맞잡이로 생각하고 살았소. 그런데 생활이 좋아질수록 무엇을 깨치지 못한 것 같소. 지난날을 감감 다 잊은 탓이지… 왜 함께 생일 한번 쇠여보지 못했던지. 어머니 품에 있을 때는 달래무침에 겨떡, 강냉이떡, 나물죽들이 얼마나 맛있고 구수하고 마음만은 즐겁던지. 누나 집에 가면 누나가 끓여주던 토장국이 그립소. 저세상에 가서라도 누나 생일을 축하해줄게오.” 동생의 절절한 하소연이였다.

“다 내 탓이야. 꼭 병마와 싸워이기고 옛말을 하며 함께 생일을 쇠자꾸나.” 나는 목멘 소리로 겨우 말을 이었다.

내 동생은 가기 전날 초저녁부터 극심한 동통이 오기 시작했다. 극심한 아픔으로 입술이 다 갈라터지고 속이 타번지는 것 같아 약수물과 얼음덩이를 련속 공급하였으며 점적주사도 동시에 두곳에 꽂았다. 그래도 동생은 여전히 침대에서 몸부림쳤다. 극심한 아픔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어 피가 났지만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은 “너무 아플 때는 소리라도 좀 치렴.” 하고 말했지면 동생은 “소리 치면 옆방 환자들은 어쩌냐.”는 것이였다. 죽음의 경각에도 남을 생각하는 내 동생이 우러러 보이면서도 가슴이 터질듯 아팠다. 대신 아파주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도 안타까왔다. 형제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며 동생은 또 “내가 죽은 후에라도 병원 안에서 크게 울지 말라.”며 곁의 환자들을 배려하는 것이였다.

아! 이것이 국가 공무원으로 몇십년 사업해온 내 동생의 진실한 내면이였으며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고스란히 드러난 선한 모습이였다.

2000년 10월 10일, 며칠 남지 않은 생일을 앞두고 사랑하는 내 동생은 47세를 일기로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나는 후회와 안타까움에 젖은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는 내 동생아, 이번에는 꼭 너와 함께 고향에서 멋진 생일을 쇠자 하였는데 어쩌면 이렇게 먼저 가느냐?” 하며 넉두리를 하였다.

아, 아- 사람들은 언제나 무엇을 잃은 후에야 그것의 소중함을 절절히 느끼는가 보다. 지금 우리 남은 형제들은 생일과 명절을 꼭 함께 모여 쇤다.

저세상에 너무 일찍 가버린 동생을 차마 못 잊어 후회와 아쉬움, 서글픔을 여기에다 이렇게 적는다.

오! 추억에 실린 우리의 생일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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