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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122]그것은 믿음 자체였다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1-16 14:40:05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0)

▩신기덕(장춘)

글의 주인공 박정양선생님

이 세상에 돈이 존재하여 사람들을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만든다. 부유하다와 가난하다도 그 돈을 기준으로 하여 나뉘여지며 도적과 강탈 사건도 많은 경우 그 돈 때문에 생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 돈을 벌고저 동분서주하고 있으며 따라서 돈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매일마다 그치지 않는다. 필자가 적는 이 이야기도 돈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 몇번 쓰기를 그만두려다가 마침내 꼭 써야겠다고 생각되여 이렇게 필을 들었다.

때는 지난 세기 90년대였다. 당시 연변1중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나에게 자기 집은 얼마나 아득한 리상이고 얼마나 신성한 존재였는지 모른다. 1991년도에 지인의 신세로 운수가 좋게도 수교가 건립되기 전에 한국에 다녀오게 되였는데 그 때의 내 한달 로임이 210원이였다. 그런데 한국에 가서 벌게 되니 하루에 나의 한달 로임을 벌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울방학을 리용하여 얼마간 벌고 와서 1993년도에 드디여 연길시 부동산(房産)에서 관리하는 50평방짜리 작은 집을 마련하게 되였다. 그 때의 기분은 정말 하늘을 날아예는 기분이라고나 할가? 그런데 그 이듬해에 연변1중에서 집을 짓게 되였는데 나는 이미 집이 있다는 원인으로 그 집을 살 자격을 잃고 말았다.

참 비참한 현실이였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그냥 그 집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채로 있는데 문득 나의 집이 면적이 너무 작기에 다시 고려할 수 있다는 희망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하여 나는 더 고려할 사이도 없이 76평방짜리 집을 신청하게 되였다. 그런데 나는 다시 희망에 불타오를 새도 없이 새로운 고민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당장 3일 동안에 내가 신청하는 집의 값에 해당하는 6만 1000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바쳐야 하였다. 머리가 너무 복잡하여 잠도 설치고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심신의 큰 고통을 처음 절감하는 순간이였다.

우리 부모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리고 형제들도 부유하지 못했다. 친구중에 비교적 괜찮게 나가는 둬명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돈을 꾸기는 싫었다. 자존심도 문제로 나섰지만 ‘친구와 형제를 버리지 않겠으면 그들에게서 돈을 꾸지도 말고 그들에게 돈을 꾸어주지도 말라’는 세속적인 말들이 자꾸 머리에 떠오르면서 어찌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이렇게 속을 태우던 끝에 떠올리게 된 분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연변대학에서 우리에게 글을 가르쳐주시던 박정양선생님이였다.

박정양선생님은 우리에게 중국문학사를 가르치셨는데 성격이 서글서글한 분이시였다. 그리고 연변1중에 실습생들을 보내게 되면서 좀더 자주 만나게 되였다. 하기에 너무 가까운 사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이튿날 나는 선생님께 전화로 점심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만나는 순간까지도 어떻게 말을 뗄가 근심이 태산 같았다. 이튿날 식당에 마주앉아 아직 먹을 채도 청하기 전에 나는 아예 돈에 관한 말을 대담히 꺼냈다. 나의 자세한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선생님은 이렇게 근심스러운 일을 마음에 품고 어떻게 식사를 하겠는가고 하시면서 아예 나를 잡아끌고 밖에 나왔다.

사실 선생님의 로임도 높지 못하였다. 사모님께서 한국에 가서 번 돈이 좀 있을 뿐이였다. 그는 집에 도착하여 얼마가 수요되는가를 알아보고는 아예 저축통장을 가지고 함께 중국은행에 가서 5000딸라를 꺼내주었다. 그 때의 딸라 값은 높았으므로 중국의 인민페로 5만원이 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인민페로 바꾸어 잘 챙긴 다음 둘이 함께 술을 마셨는데 녹초가 되도록 마셨다. 이렇게 돈을 꾸는 일은 무난하게 해결이 되였다. 대학 때의 은사님을 찾아가 대담하게 돈을 꾸는 학생이나 그런 학생에게 두말 않고 돈을 꾸어주는 선생님이나 다 ‘연구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한달 후에 내가 이미 샀던 집을 팔고 그 돈을 다시 딸라로 바꾸어 선생님한테 돌려드리러 갔다. 그런데 내 손에 쥐여진 돈을 보면서 선생님께서는 그래 새 집에 장식도 안하고 드느냐면서 근심하지 말고 먼저 쓰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나는 그냥 4000딸라만 돌려드리고 1000딸라는 다시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빚도 물어주었지만 한가슴 가득 받아안은 믿음의 정만은 가슴에 그냥 그들먹 남아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몇년 동안 해마다 음력설이면 꼭 술 둬병을 사들고 인사를 갔었더랬는데 그 때마다 술 한병을 함께 마시고서야 나올 수 있었다.

살다 보니 필자에게도 돈을 좀 드티워달라는 사람들이 생긴다. 새로 집을 산 지금에는 빚 때문에 아예 드티워줄 생각을 못하지만 돈이 좀 있을 때에도 이것저것 많이 생각하게 되는 건 참으로 어쩔 수 없었다. 그 때마다 나는 박정양선생님을 머리 속에 떠올리게 된다. 면목을 좀 아는 당돌한 학생이 와서 돈을 5만원이나 꾸자는데 아무 말도 없이 드티워준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믿음 그 자체였다. 그리고 돈을 꿔가는 사람한테 마음이 편하도록 풋풋한 웃음을 보여주던 그 헌앙한 모습이 지금도 거룩하게 클로즈업되여 우렷이 눈앞에 다가온다.

필자 신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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