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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123]찬 기후 속에서도 뜨거운 정은 있었다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1-16 15:18:11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1)

▩김규칠(화룡)

1974년 7월, 화룡현 동성공사 해란소학교 제5회 졸업 기념사진. 앞줄 왼쪽 세번째가 필자.

해마다 청명, 추석이면 나는 어김없이 진정부 소재지 동네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해란촌에 있는 어머님 산소로 찾아간다. 해란촌은 전에 내가 15년 남짓 때묻은 정든 고장이다. 이곳에서 교편을 잡고 나어린 학생들과 호흡을 같이했고 아들딸을 낳고 어머니를 모셨다.

1966년 7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는 해에 화룡현 동성공사 중심소학교에서는 원래 중심소학교 분교였던 해란촌 소학교를 정식 독립학교로 명명하고 교원을 물색했다. 그런데 이 학교로 가려는 교원이 없어 학교 지도부에서는 골머리를 앓았다. 설비가 부족한 건 말할 것도 없고 혼자서 여러개 과목을 맡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두세개 학년 복식 교수를 해야 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이미 전에 민반 녀선생 한분이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해란강에 목욕시키러 나갔다가 한 학생이 선생이 지정한 범위를 벗어나면서 익사하는 바람에 아이의 부모에게 모진 구타와 된욕을 당하고 정신타격을 받아 정신병으로 사망한 일이 있었다.

또 남자선생 한분이 대리로 갔는데 룡정으로 영화 구경 갔다가 학생 한명이 잃어져 온 동네사람들이 룡정시내를 훑다 싶이 했건만 찾지 못하니 그 선생은 속을 태우다 못해 마침 기차가 오는 것을 보고 철길에 뛰여드는 것을 사람들이 제때에 발견하고 구한 일이 있었다.

잃어졌던 학생은 이튿날 연길현 동성공사 해란촌에서 찾았다. 우리 고장은 화룡현 동성공사 해란촌이여서 두 촌은 현명이 다를 뿐 공사와 촌 이름까지 똑같아 구별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선생은 혼쌀 먹고 다시는 분교로 안 가겠다고 나눕는 바람에 학교가 비게 될 형편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분교를 독립학교로 설치하니 선생이 적어도 3명은 있어야 했는데 3명은커녕 한사람도 구하기 어려웠다.

이 시기에 나에게는 속타는 일이 있었는데 이 문제만 해결되면 내가 가겠다고 자원했다. 사연인즉 나는 화룡현 동성 시골에서 교편을 잡고 있고 우리 부모는 왕청현 시골에 있었는데 10여년 병환에 계신 어머니를 호리하시던 아버지가 세상 뜨니 아들인 내가 모셔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안해가 소속된 생산대 대장에게 제기했으나 당장에서 거절당하였다. 나는 생각다 못해 량식을 주관하는 간부를 찾아가 도시호구로 넘겨달라고 사정했다. 그 간부는 단마디에 “안된다”고 잘라말했다. 그 시기 농민을 도시호구로 넘긴다는 것은 참으로 락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였다. 나의 아이들도 태여나면서 국가 배급을 타먹는 나의 호구로 올린 것이 아니라 농민인 안해 쪽으로 넘기는 때였으니까.

내가 해란소학교로 가려는 전제조건으로 그 곳에서 우리 부모를 받겠다면 가겠다고 자보하니 교장선생은 너무도 반가와서 “내가 힘써보겠으니 우선 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였다. 그 때 마침 각 촌 지부서기들 회의가 있어 교장선생은 해란촌의 지부서기를 만나 나의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로지부서기는 “부모를 안다는 게 선생이지 부모를 모르는 게 선생이요? 우리 받겠으니 보내시오.” 하더란다.

나는 막무가내로 얼마 안되는 이사짐을 꿍져가지고 해란촌에 갔다. 우리는 들 집이 없어 처음에는 8평방 되나마나한 남의 웃방에 있다가 낡은 흙벽 집 우사 사양실로 이사를 했다. 사양실을 뜯고 가마를 걸 부엌과 온돌을 놓고 나니 비좁기 말이 아니였다. 할수없이 나는 이깔나무로 사다리식 틀을 짜고 이불과 일부 세간을 올려놓으니 식구 여섯이 다리를 펴고 겨우 누울 수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하루에 10여차씩 간풍을 일으키는데 풍이 일 적마다 온몸의 신경이 졸아붙으면서 소변이 나와 까래밑이 마를 사이가 없었다.

그 시기 안해가 소속된 생산대는 1958년 대약진 시기에 팔포강 골안의 산재호들을 모두 이사시켜 해란촌에 내려와 집체로 가정별로 새집을 짓고 한개 생산대를 이룬 동네였는데 인심이 아주 후하였다. 먹을 식량마저 변변치 못한 형편이였건만 나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어쩌다 반반한 음식이 생기면 들고 오던 일들이 50년 세월이 지났건만 지금도 눈앞에 보는듯 잊을 수 없다.

하루는 대장이 나를 찾아와서 “우리 생산대의 대무회의에서 토론이 있었는데 회의실 삼아 선생께서 드실 집을 지으려 하는데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이구! 이런 감사할 변이라구야. 대장께서도 아시다 싶이 우리 어머니는 환자이다 보니 집이 어지럽고 지린내가 떠날 사이 없으니 여러 사원들께 페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말만 들어도 감사합니다. 그러니 그저 회의실로만 하십시오. 우리는 들 수 없습니다.”고 사양하였다.

그 후 사원대회에서 토론을 붙이니 사원들은 “선생이 들 집을 모여들어 짓되 로력은 우리가 대고 재목을 선생이 부담하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하여 그 해 집을 짓게 되였다. 생산대에서는 전문 목수재간이 있는 로인 네분과 사원 몇을 떼내여 재목과 구들돌 및 흙을 날라오고 (집터는 모래땅이여서 전문 외토를 실어와야 했다) 서까래를 얹거나 외를 엮고 흙을 바르는 일들을 사원들이 모여들어 하여 아주 훌륭한 6간 초가집을 지었다.

나는 비좁게 살다가 너른 초가에 드니 숨이 활 나와 살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감사한 마음이 뼈속까지 스며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1969년 문화대혁명이 고조되여 파벌싸움이 심한 세월 속에서도 이런 훌륭한 초가를 지어준 시골 인심에 저도 모르게 감사의 눈물이 날 때도 있었다. 감사한 일은 이 뿐만이 아니다.

1972년 아들애가 태여나면서 심한 병으로 매일과 같이 병원놀음을 하다 나니 안해는 생산대의 일에 나가지 못해 우리는 무거운 빚에 깔려 허덕였다. 이 때 대장을 비롯한 대무위원들은 또 한차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당시 나는 월급 39원을 받는 국가공무원이였는데 (안해와 아이들은 모두 농촌호구) 생산대에서는 공적금 150원으로 우리 집 빚을 일부 감면해주었다. 농민들은 옹근 1년 하루도 빠짐없이 일해도 가을에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손에 거퍼 10원 돈도 쥐여보지 못하는 때였으니 그 150원이라는 돈은 참으로 천문수자나 다름없었다.

이 못난 선생도 자기들 자녀의 선생이라고 받드는 그들의 성의는 참으로 각골난망이였다. 더구나 ‘공자를 비판’하고 교원은 ‘고린내 나는 아홉째’로 몰리는 세월의 찬 기후와는 무관하게 이처럼 뜨거운 정으로 품어주는 그들의 후더운 인심은 내 일생의 영원한 빚으로 남았다. 문화대혁명! 그 거세찬 풍랑 속에 계급투쟁을 일상 과업으로 삼고 인심이 박할 대로 박한 가운데서도 이런 따뜻한 구석이 있었다.

환자인 나의 어머니를 받아준 아량 깊은 로지부서기의 드넓은 흉금은 그렇게도 따스했고 분망하 가운데서도 내가 들 집을 지어준 시골 농민들의 정은 나에게 사악한 마음을 버리고 남을 사랑할 줄 알게 가르쳤고 손톱이 닳을 정도로 일해도 헐벗고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면서도 나에게 동정의 손길을 내밀어 빚을 덜어준 그 은덕은 영원히 나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있을 빚일 것이다. 순박하고 후더운 시골 인심은 나로 하여금 티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도록 말없는 교육을 주었다.

아, 해란촌! 누구나 가기 싫어하던 해란촌에 정작 가보니 세상에 이런 좋은 고장이 얼마나 되랴 싶었다. 세외도원이 따로 없었다.

해란촌은 화룡시와 룡정시를 경계로 한 풍경이 수려한 비암산 아래 푸른 물 흐르는 해란강을 뒤배경으로 앉은 오붓한 동네이다. 또한 해란강 젖줄기로 살진 70리 평강벌이 룡정시를 사이두고 끝나가는 동네이기도 하다. 마을 앞남산은 웅장하고 위엄스런 ‘범코숭산’이 하늘을 향해 입을 짝 벌린 호랑이가 푸른 숲을 입에 물고 소리 지들듯한 금강산 같은 절승경개로 하여 내 마음속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새겨져있을 것이다.

찬 기후 속에서도 뜨거운 정이 깃들었던 땅! 해란촌이 더욱 번영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무릉도원으로 될 것을 충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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