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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125]부친의 마음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1-21 14:49:52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3)

▩리호송(연길)

1998년 아버지를 모시고 찍은 가족사진

생활 속에서 때론 례사롭게 스쳐보낸 일들이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가슴을 파고들 때가 있다. 나는 습관 대로 최근에 나온 《경계선(警戒线)》잡지를 펼쳐들었는데 〈어린이들을 위하여 인생의 좋은 길잡이가 되자〉는 제목의 글이 특별히 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똑 마치 살아계시는 아버지가 나한테 교육을 주는 것만 같으면서 아버지가 더욱 사무치게 그리워났다.

젊었을 때에는 딸을 키우고 사업에 정신을 몰두하다 나니 아버지를 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현재 사업도 잘되고 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 편이지만 날이 갈수록 아버지가 나한테 돌린 남다른 관심만은 잊을 수 없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는 아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내가 모시려고 하여도 거절하고 우리 집에 오지 않고 줄곧 혼자 생활하고 계셨는데 우리 형제들의 지꿎은 권고에 못이겨 재혼하여 후로친과 행복한 만년을 보내시다가 암으로 2년 전에 끝내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치였다.

우리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과 완연히 다른 특성이 있었다. 남자라면 모두 술을 반기는데 그는 술과 담을 쌓고 살았다. 하여 술친구가 없었다. 반면에 담배골초인데 일반 권연이나 황연은 슴슴하다고 옆초를 말아서 피웠다. 그는 유모아를 모르고 성격이 강직했다. 평소 책읽기를 즐기며 과묵한 편이지만 일단 이야기만 꺼내면 마디마디가 ‘경구’가 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다른 특성은 한어 구변이 좋고 글을 잘 써서 이웃이거나 아버지가 잘 아는 사람들이 한어로 된 글을 몰라서 찾아오면 번역도 하여주고 혹시 그의 손을 빌어 편지 봉투에 주소를 쓰군 하였는데 글씨체가 선비의 기품이 넘친다고 선비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여가만 있으면 나와 형제들에게 어른에 대한 존경과 식사례절, 생활례절을 가르치고 특히 본과 조상, 고향을 잊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힐 지경으로 가르쳐주었다. 하여 동네어른들을 만나 고개 수그려 인사하면 “누구 아들인지 부모님들이 잘 가르쳤구나.”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어른들이 무슨 리씨인가고 물으면 얼음에 박 밀듯이 “전주 리씨, 익조패이고 고향은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 상하동입니다.”고 신이 나서 줄줄 말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좀처럼 칭찬하지 않았고 외려 바깥에 나가 체신을 잘하고 착한 사람이 되여야 한다고 늘 당부하였다. 언제나 자식을 세상에 내놓아 단련시키면서 강하게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버지였다. 아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엄격한 아버지, 늘 입버릇처럼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장래에 소궁둥이만 두드린다.”고 나를 독촉했다.

내가 여덟살 나던 어느 날 저녁이였다. 아버지가 불현듯 나의 손목을 잡아끌고 영화 관람을 갔다. 전에는 그렇게 영화구경을 가고 싶어해도 나를 데리고 다닌 적이 없었다. 나는 하늘을 날듯한 기분으로 따라갔는데 제목은《영웅의 아들딸》이였다. 주인공 ‘왕성’의 영웅적 형상이 나의 어린 가슴을 쳤다. 헌데 아버지는 묵묵히 영화만 보면서 눈굽을 찍는 것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너는 이제 크면 꼭 군대에 가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공부를 잘하거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하여 나는 장차 군대에 가는 것이 꿈이였다.

소학교 시절 마을에는 동갑내기 친구가 몇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한데 모여 쏘다니며 놀았다. 그러다가도 싸움하여 맞아서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는 나를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다짜고짜로 온돌의 비자루를 거꾸로 거머쥐고 나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고래고래 소리친다. “집에서 가만히 공부나 할 것이지 왜서 밖에서 불안만 피우니? 다시 싸움만 하면 종아리를 분질러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늘 타이르는 말씀이 “놀음에 탐내지 말고 공부해서 큰사람이 되여라.”는 말씀이였다.

사실 장가 들기 전까지도 나는 아버지를 몹시 두려워하였다. 아들은 반드시 아버지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되게끔 봉건적 사상으로 가득찬 아버지라 할가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말대꾸만 몇마디 해도 “되지 못한 놈” 죄로 아무런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 간혹 내가 산수문제 풀이에 띄워 어떻게 해야 할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어쩔 바를 모를 때면 어머니와 물으면 다가와 살랑 깨우쳐주시는데 옆에 있는 범 같은 아버지가 무서워 감히 물어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다짜고짜로 나를 불러놓고 “사내녀석이라는 것이 그런 문제도 풀지 못하구 이후에 무슨 일을 하겠는가?”고 혼쭐이 나게 훈계를 받기도 하였다. 일상생활에서 작은 흠점이라도 발견하면 당장 고치라면서 쩍하면 나를 훈계했다.

지난 세기 70년대 초는 집집마다 모두 식량이 모자라며 세월을 보냈다. 그 때 우리 집은 시골에 내려가있었다. 여름철이면 식량 곤난이 더하여 동갑내기 친구들은 무리를 지어가지고 늘 부근 농촌의 채소밭에 가서 서리를 하였는데 좌우간 굶은 놈이 뭘 가릴 것 없이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서리하였다. 후에는 담이 커서 총을 들고 과수원을 지키는 원예농장까지 사과배를 서리하러 갔다가 발각되여 죽을 둥 살 둥 도망을 하는데 같이 간 친구가 끝내 달아나지 못하고 붙잡혀 된욕을 보았다. 나는 간이 콩알 만하여 가슴을 두근거렸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일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갔다. 하루는 내가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잔뜩 성이 나서 다짜고짜로 나의 멱살을 거머쥐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호령한다. “너 이 녀석이, 집에서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백주에 어디로 쏘다니면서 나쁜 짓만 하느냐? 네 하는 꼴이 감옥에 가겠다…” “이놈 자식, 세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가고 바늘도적이 소도적 된다.” 어디에서 주어서 손에 쥐였는지 빨래방치로 나를 사정없이 마구 때렸다. 나는 진짜 혼뜨검이 났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가 자라는 아이들이 다 그렇지 어떻겠는가면서 아버지를 꾸지람하였다. 그 날 이웃들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말려서야 일은 끝났다. 그 후부터 아버지와 불구대천의 ‘원쑤’가 되고 부성애에 실망을 느겼다.

소학교 5학년 시절의 일이다. 학교에서는 겨울을 나기 위하여 사생들을 동원하여 와룡동으로 땔나무하러 갔는데 나는 아프다는 핑게로 청가를 맡고 집에서 놀았다. 그 날 면바로 늦잠을 자다가 아버지와 맞띄워 “오늘 왜 학교에 가지 않고 늦잠을 자고 있니?” 하고 차중을 했다. 나는 일의 자초지종을 말하면서 흘깃 아버지를 쳐다보았는데 이전의 그 무서운 엄한 눈빛이 서려있었다. “네가 공부할 의력이 없으니 로동할 의력도 없는 거지. 당장 학교에 가라!” 나는 두말없이 도시락을 싸들고 울며 겨자 먹기로 십여리 길을 걸어서 와룡동에 도착했다. 하루 로동에서 온몸이 흠뻑 젖고 기진맥진하여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온몸이 해나른해났다. 저녁때가 거의 되여 우리는 나무가지 한짐씩 새끼로 동여지고 학교로 돌아왔는데 길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 후부터는 아버지가 나에게 하라는 모든 것이 마뜩잖게 다가왔으며 아버지의 옳은 행실도 꼴미워 그가 집에 계시기만 하면 구실을 대고 피하여 친구 집에 가서 공부를 하거나 놀음을 놀았다. 나중에 어머니가 찾아다니며 불러서야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당의 11기 3차 전원회의 후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학교에서는 과학지식을 학습하고 사회적으로 지식인을 존중하는 열조가 기세찼다. 초중에 올라가니 가르치는 과목이 소학교와는 판이하게 달라 이것이 중학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기초지식이 부족해 초중과목을 공부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게다가 문을 열고 학교를 운영하다 보니 쩍하면 로동을 하여 좀처럼 공부할 겨를이 없었다.

다른 과목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한어공부에서 병음을 몰라서 애를 먹었다. 그 때는 돈을 주고 선생을 청할 수도 없고 과외 복습반도 없었다. 유일한 희망은 아버지와 큰누님이였는데 큰누님은 우리 형제들의 본보기였다. 비단공장에 출근하는 큰누님은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하여 소학교에서 추천을 받아 한족학교인 시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북경대학 동방언어계 조문전업에서 학습하면서《중조사전》편찬에 참가하였었다. 나는 아버지와는 두려워 말을 못하고 누님과 청을 들었는데 누님은 쾌히 승낙하고 출근하면서 짬짬이 시간을 리용하여 근 석달 동안 나한테 병음 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도 차근차근 가르쳤다. 학습성적은 눈에 띄게 제고되였으며 더우기 리과에 흥미를 가졌고 반에서 성적도 좋았다. 논 자취는 없어도 공부한 공은 남는다고 학교에서 반을 재편성할 때 중점반에 편성되고 초중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중점고중에 진학하였다.

고중 2학년 시절의 일이다. 부대에서 학교에 고중생을 대상하여 군대모집을 나왔다. 나는 자기의 꿈을 실현할 기회가 왔다고 신나서 선참으로 달려가 신청하고 이 소식을 집에 돌아와 아버지한테 알렸더니 무척 기뻐하시면서 지지하였다. 신체검사를 끝마치고 정치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중 어느 날 아버지가 학교로 불쑥 찾아와 나의 신청을 철회하였다. 리유는 내가 독자라는 것이였다. 그러나 나는 어린 시절부터 굳혀온 군인 꿈을 접을 수가 없어 계속 군대에 간다고 고집을 부렸다. 피 끓는 열혈 사내라면 꼭 부대라는 이 용광로 속에서 단련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나를 앉혀놓고 생각을 바꿔보라면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복했다. “백만 군대를 축소하고 현대화한 정예부대를 건설하는데 고중도 졸업 못하고 군대에 가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지금은 개혁개방 시기이므로 공부만 잘하면 장래에 유용한 인재로 될 수 있다.” 아버지가 강경하게 나오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군에 가려는 꿈을 아쉽게 접고 다시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내가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정법사업에 몸 담근 후에도 아버지는 각별히 신경을 써주었다. 이전의 간단 조폭한 교육방식을 떠난 그의 관심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일이라면 언제나 열정적으로 밀어주었고 용기와 패기를 갖도록 힘을 북돋아주고 내가 좌절 속에서 락관적으로 현실을 대하고 곤난을 전승하도록 가르쳤고 자기 수양을 쌓고 특세를 부리지 않고 사건처리에서 절대로 회뢰를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아버지는 1934년 4월에 연길에서 태여났는데 1952년 연길시제2중학교를 졸업하고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호소를 받들고 참군하여 지원군 번역관으로 되였었다. 후에 당과 정부의 추천으로 심양에서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흑룡강성 녕안현과 길림성 서란현에서 각기 교편을 잡았다. ‘문화대혁명’ 때는 얼토당토 않는 죄명으로 투쟁을 받고 농촌에 내려가 촌서기까지 했다. 후에 다시 직장으로 돌아와 당무사업을 하다가 정년퇴직하였다.

자식이 사회에서의 표현은 부모의 교양과 갈라놓을 수 없다. 내가 인간으로 성숙하는 과정에 아버지가 준 깨우침과 가르침은 나의 심장 속에 영원히 간직되여있을 것이다. 나에게 이런 훌륭한 아버지가 계신 것으로 자랑과 긍지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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