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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128]나는 자랑스런 조선족이다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1-28 13:31:27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수기 응모작품 (55)

▩남걸 (목단강)

재직 시 일터에서의 필자

2018년 음력설 기간에 일본에서 살고 있는 아들과 딸 집에 놀러 갔다 돌아온 후부터였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구입하거나 도서관 열람실에서 학습자료들을 찾아 보거나 서점에서 필요한 책자들을 펼쳐 볼 때마다 복무원들이 다가와서 상냥하게 웃으면서 “선생님은 일본사람입니까?”라고 조용히 물어 본다. 그때마다 나는 멋적게 웃음 지으면서 서슴없이 공손히 “아닌데요. 저는 중국 조선족입니다.” 라고 떳떳이 신분을 밝힌다.

그러나 온몸에 용기와 패기, 끓는 피가 흘러넘치던 젊은 시절이였더라면 “예, 그렇습니다.” 라고 뻔뻔스레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깃들어있다.

20세기 70년대 중반, 내가 의과대학을 다니던 시절에 학교에는 상해, 북경, 천진을 비롯하여 항주, 녕파, 온주, 할빈 등 곳에서 온 지식청년 학생들이 수두룩했는데 그중에는 맞춤한 키에 오똑한 코, 이쁘장한 얼굴, 피부색이 해맑고 총명 령리한 쇼리라는 상해 녀학생이 있었다. 그의 아릿다운 모습과 귀엽고 깜찍한 행동거지는 ‘학교의 꽃’으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었고 숱한 남학생들의 애간장을 은근히 태웠다.

그 당시 168센치메터 작달막한 남자키에 몸매도 가냘픈 나는 그 누구를 감동시킬 만한 인격도, 용모도 없었고 뛰여난 교제술도 말주변도 없었다. 게다가 의지가지 없는 조선족 고아인 데다가 아무런 빽도 없는 미운 새끼오리였고 불행아였다. 대신 연구생을 졸업할 때까지 학습성적만은 전 학년, 지어 전교에서 1, 2등을 차지했다. 하다 보니 그는 나의 학습성적에 반했고 나는 그의 미모에 반했으니 그야말로 ‘랑재녀모(郎才女貌)’였다. 우리는 수많은 동창생들의 시기와 질투, 부러움 속에서 학습시간 외에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그는 나에게 열심히 상해말을 가르쳤으며 ‘옷이 날개’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완전 ‘상해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만들어 놓았다.

그와 사귀던 3년간 우리 병원 환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병원의 령도, 의사들과 간호사들도 모두 나를 ‘상해사람’이라고 불러 주었는데 그 때마다 나의 기분 또한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았으며 서슴없이 뻔뻔스러운 ‘상해사람’ 행실을 했다.

그런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은 진짜 그른 데가 없었다. 1978년 삼촌이 생산대 대장으로 있는 신안진 한 마을에서 ‘김보미’라고 부르는 60대의 할머니가 ‘간경화복수’로 우리 병원에 입원했는데 ‘제 버릇 개 주랴’고 나는 당시 병증세가 위중하여 신음하고 있는 할머니에게도 조선말을 하지 않고 중국사람들조차도 알아듣기 힘든 상해말로 병증세를 문의했던 것이다. 40년 세월이 흘러간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아도 그 당시의 너무 한심하고 어처구니 없었던 처사에 저도 모르게 낯이 뜨거워난다.

달포가 지나 김보미 할머니는 병환이 호전되여 퇴원하게 되였는데 생산대 대장이였던 삼촌께서 퇴원 수속 밟으러 병원에 오셨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조카의 체면을 고려하여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으셨고 오직 돌아오는 새해 음력설 휴식 기간에 향촌으로 놀러 오라는 부탁만 남겼다.

음력설이 다가오자 기쁜 김에 나는 ‘상해대상’을 친척들에게 자랑하려고 가슴이 뿌듯하여 쇼리를 데리고 향촌으로 놀러 갔다. 삼촌은 시골을 마다하지 않고 놀러 와 주었다며 무척 반가와했다. 삼촌은 막내딸인 나의 사촌녀동생에게 “쇼리를 데리고 나가서 조선족 마을을 구경시켜 주거라” 하면서 밖으로 내보내고는 나와 마주앉았다.

삼촌은 “얘, 듣는 소문에 의하면 너 상해말을 하며 상해사람으로 산다지? 그래 상해 말이 그렇게도 욕심나고 듣기 좋더냐?”라고 했다. 나는 겁나고 부끄러워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했다. 삼촌은 계속하여 “만약에 하늘나라에 가신 너의 아버지, 어머니께서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상심하겠니? 뿐만 아니라 워낙 성격이 과격하고 날카로운 너의 아버지께서는 가문의 망신이라고 너를 남씨 집안에서 즉시로 쫓아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 “너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모두 조선족이니 너는 완전무결한 조선족 후손이라는 이 점을 꼭 명심하고 모든 일에서 참답게 처사해야 하느니라.” 라고 조용히 타일러주셨다. 그러시면서 ‘푸성귀는 떡잎부터 알고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안다’는 속담을 꼭 명심하라고 교육하셨다.

그 날 삼촌은 나를 크게 책망하지는 않았지만 그이의 말씀을 듣는 순간 갑자기 랭수를 머리에 끼얹듯이 번쩍 정신을 차리게 되였다. 그렇다. 나는 철두철미, 에누리 없는 조선족이다. 그런데 어찌 자기 민족을 잊을 수가 있었을가? 참 말도 안되는 일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슬기롭고 부지런하며 례의 바르고 부모를 존경하며 효심이 갸륵한 민족이다. 또한 형제간 이웃간에 우의가 좋고 의리를 중히 여기며 서로 함께 잘 어울려서 지내는 자랑찬 민족인데 내가 여직껏 이것을 깜박 잊고 살았다는 점을 뼈아프게 느꼈다. 이에 깊이깊이 반성하면서 앞으로는 민족의 문화와 례절을 잊지 않는 훌륭한 조선족의 후손으로, 인정받는 좋은 의사로 되리라고 다짐했다.

‘마음이 풀어지면 하는 일이 가볍다’고 나는 병원의 학습, 사업, 생활에 모두 참답고 열심히 림했다. 간호사들의 검사에만 의뢰하지 않고 내가 맡은 병실에 들어설 때마다 항상 청진기, 수은혈압기, 체온기를 휴대하고는 맡은바 30여명 환자들의 혈압, 맥박, 체온을 정규적으로 손수 체크했다. 이렇게 환자들의 모든 검사 결과들을 손금보듯 장악하고 있었기에 다른 의사들보다 치유률이 높았다.

나는 우리 병원에 배치되여오는 실습생들과 연수생들도 책임지고 엄격히 요구하고 가르치며 그들에게 솔선 모범을 보였다. 하기에 내가 배양한 의학생들과 ‘림상연구생’들은 배치된 각 병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모두가 속한 시일 내에 각 과의 주임으로 발탁되거나 책임 주치의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으며 해마다 의과대학교 연구생원에 우수한 인재들을 수송하였기에 대학교 령도측으로부터 여러번이나 ‘훌륭한 지도교사’로 표창을 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의무과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우리의 민요 〈아리랑〉과 〈도라지〉 를 배워주었고 단위 문예공연 때마다 시조선족예술관 선생님들을 초청하여 〈반갑습니다〉 등 노래 반주에 맞추어 조선족 무용을 배워 무대에 올림으로써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은 건 물론 시 병원 계통 ‘우수종목’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설명절, 보름 맞이 행사 때마다 조선글로 주련을 써 병원 중심지 뚜렷한 곳에 걸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의학에 종사한 40여년 동안 항상 훌륭한 조선족 의사로 되려고 노력하여왔고 또 조선족 후손으로 떳떳이 나섰다.

‘일단 활을 들었으면 유력한 한발을 쏴야 하고 생활의 목표가 결정되였다면 추호의 동요도 없이 용감히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하면 된다’. 이것은 나의 행동지침이다.

이렇게 나는 우리 병원에서 한개 방면의 권위로 자리매김했으며 2017년 정식으로 퇴직한 현재는 목단강시 조선족작가협회, 조선족탁구협회, 조선족로년대학, 조선족합창단, 조선족중학교동창련합회 등 우리 문화와 생활의 계승자로 맡은 바 직책을 나름 활성화하면서 열심히 뛰여다니고 있다.

나는 나를 조선족으로 낳아주신 부모님과 매번 내가 힘들어하거나 무지몽매할 때 나를 옆에서 지켜봐주고 옳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이상분들과 고마운 스승들에게 항상 깊이 감사한 마음이다.

그리고 오늘도 목청껏 웨치고 싶다. “나는 자랑스런 조선족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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