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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11] ‘북신케케’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6-21 17:00:06 ] 클릭: [ ]

◈룡정의 중심소학교에 입학한 애들은 우월감에 젖어있었고 북신소학교 학생들에게는 ‘북신케케’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었다

◈통일시험이 있을 때면 학교와 학교 사이 치렬하게 경쟁, 선생님들은 어떻게든 중심소학교를 이겨보려고 공부를 엄청 시킨다

◈ ‘어린시절의 케케가 영원한 케케’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어린시절의 경험이 ‘북신케케’들에게 사회에 서 도태되지 않는 의력을 더 키워준다

‘북신소학교’동창들과 함께 있는 필자 김해란 (왼쪽 두번째)

‘북신케케’하면 1980년대초에 룡정현(현재는 룡정시)에서 소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라면 익숙할 법한 별명일 것이다. ‘북신’이라 함은 ‘북신소학교(현재는 당시의 신안소학교와 합병 되여 없어진 상황)’를 가리키는 것이요, ‘케케’라 함은 ‘멍청한 놈’이라는 비속어에 해당되는 말이다.

1970년대초는 전국적으로 출생률이 최고봉에 달한 시기였다. 이때 태여난 애들이 소학교에 입학할 때쯤인 70년대말, 80년대초에는 소학교 진학생이 너무 많아 만 7세가 안된 애들은 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소학교도 시험을 봐서야 당지의 좋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됐다. 룡정현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룡정시실험소학교, 당시는 룡정현중심소학교라 불렀는데 룡정현에서 으뜸가는 소학교로 급부상하면서 이 학교에 자식을 보내려는 학부모들이 많았다.

그러나 교실이 제한 되여있다보니 중심소학교에서는 시험을 본 후 ‘인재’들을 고르게 되였다. 그러다 보니 좋은 유치원(글공부를 가르치는 유치원)을 나온 애들은 시험자격이라도 가져서 시험을 볼 수 있었지만 나처럼 농촌유치원을, 그것도 공부보다는 붉은 꽃이나, 뻥튀우기를 타기 위해 억지로 유치원에 다니는 애들에게는 시험장에 들어갈 자격도 없었다.

이렇게 우리는 북신소학교나 신안소학교에 자동으로 편입된다. 아직 경쟁이란 단어의 뜻도 모르는 우리는 그렇게 인생의 첫 ‘락오자’로 되였다. 한편 중심소학교에 입학한 애들은 자신들이 월등한 ‘종족’이라도 된듯 우월감에 젖어있었다. 바로 그런 시기에 어디서 누구에게서부터 유래되였는지는 몰라도 북신소학교 학생들에게는 ‘북신케케’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생기게 된 것이다. 아무리 ‘케케’라 해도 ‘케케’라고 부르면 가만 있을 턱이 없다. 어떻게든 중심소학교 애들을 비하해야 겠는데 딱히 떠오르는 마땅한 별명을 지을 수가 없어서 맞받아 ‘중심케케’라고 욕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해서 웃음이 나오지만 그 때 우리들은 더없이 진지했고 더없이 결사적이였다. 이는 단순한 별명문제가 아닌 자존심 대결이였기 때문이다. 간혹 길에서 마주치게 되면 서로 눈을 부라리면서 ‘케케’라고 말싸움 했다.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으면 공공장소의 벽에다 분필로 비뚤비뚤 ‘중심케케 머저리!’를 써놓는다.

이튿날 그곳에 가보면 ‘중심’이라는 단어가 희미하게 지워져있고 그 우에 크고 굵게 ‘북신’이라는 글자로 바뀌여있었다. 어느 한번 중심소학교에 다니는 애가 북신소학교에 다니는 애들 셋과 말싸움 하다가 지게 되자 화김에 동네집 벽에 ‘북신케케’라는 글을 쓰다가 그 집 할머니의 지팽이에 얻어맞을 번한 적도 있었다. 근데 이런 기싸움은 애들 뿐만이 아닌 교원들에게도 있었다.

어른 세계는 고작 분필로 락서나 하는 싸움이 아닌 학습, 운동에서 지지 않으려는 승벽심으로 나타났다. 현 통일시험이 있을 때면 학교와 학교 사이에서 치렬한 경쟁을 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어떻게든 중심소학교를 이겨보겠다고 공부를 엄청 시켰다. 하루 숙제가 단어, 구절, 심지어는 과문까지 10번, 20번 쓰기, 수학문제풀이 5,6장은 기본이다. 똑똑하고 글씨를 빨리 쓰는 애들은 그나마 임무를 완성하지만 나처럼 글도 모르고 학교에 입학했거나 느린 애들은 학급의 문제학생이 되였다. 연필을 지는 자체가 버거워 글을 쓰는 속도가 느린 데다가 처음 쓰는 글이라 쓴다기보다는 그린다고 함이 더 적절했으리라.

아무리 저녁 늦게까지 초불 밑에서 앞머리 그을려가면서 써봐도 숙제는 다 완성하지 못했다. 그렇게 이튿날 학교에 가면 숙제를 완성하지 못해서 벌을 받기가 일쑤였다. 자연히 숙제하기 싫어지고 공부가 싫어졌다. 그런 나같은 애들을 담임선생님은 어떻게든 공부시켜 보려고 나머지 공부를 시킨다. 특히 오후 마지막 수업에는 문제풀이를 다 한 애들부터 귀가시켰다. 그러는 선생님이 얄밉고 싫었지만 집에 가기 위해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주어진 임무를 완성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렇게 하기를 2,3년, 어느 순간부터 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풀리지 않던 수학문제들이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통일시험에서도 중심소학교 못지 않은 성적을 따냈다.

경쟁은 학습에서 뿐만이 아니였다. ‘6.1’맞이 현 운동회가 있는 해에는 한달전부터 전교 사생 뿐만 아니라 학부모까지 동원되여 움직였다. 운동선수들은 운동련습에 정력을 쏟았고 기타 학생들은 응원준비에 열을 올렸다. 선생님들은 통일복장에 응원형식, 세절적인 부분까지 일일이 체크했다. 그러다가 시합 며칠전부터는 학부모들까지 동원되여 응원도구를 만든다. 이를테면 짝짝이, 손에 드는 해바라기꽃, 머리에 다는 분홍리봉... 이러한 절차들은 다 비밀리에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대방에 비밀이 루설되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공부에서만 뒤쳐진 애들이 있는 건 아니였다. 응원하는 데서도 뒤쳐지는 애들이 있었다. 응원할 때 구령에 맞춰 절주 있게 박수를 쳐야 하는데 그나마 ‘하나 치는 박수’, ‘둘 치는 박수’, ‘셋 치는 박수’까지는 괜찮았지만 ‘3.3.7 박수’에서 문제가 생겼다. 박자를 맞추지 못하거나 하나를 더 치는 녀석들이 꼭 있었다. 그러면 전교 학생들이 집단 벌을 받게 된다. 처음보다 더 크게 손벽을 치면서 ‘하나 치는 박수’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정식 응원 때에는 짝짝이를 손에 끼고 치지만 련습할 때에는 맨손으로 손벽을 치다보니 손바닥이 빨갛게 되면서 얼얼하다가 아파난다. 그런데 몇몇 애들 때문에 반복적으로 련습하다보니 짜증이 났다. 자연히 ‘3.3.7 박수’에서는 긴장이 되고 긴장이 되다보니 더 틀리게 된다.

그 때 어느 선생님에 의해 구호가 생겨났다. “용감히, 싸워라, 북신선수 나간다!” 이 구호에 맞춰 손벽을 쳤더니 틀리는 이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 구호를 만들어낸 분에게 ‘노벨평화상’을 줘야 할 것 같다. 운동에서 늘 져오던 우리들이 어느해던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기적적으로 1등을 한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70후 세대를 시대의 행운아라고 한다. 물론 앞세대에 비해 고생을 덜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70후세대들에게는 소학교 입학부터 시작하여 ‘채에 걸리워내는’ 운명이 따라다니게 된다.

1983년, 전국적으로 소학교를 5년제로 정하느냐 6년제로 정하느냐는 시험단계에 들어섰다. 하여 우리들은 또 한번 시험을 보고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 후로도 우리는 학업에서, 직장에서 많은 시험을 보면서 학교에, 사회에 적응해나갔다.

‘어린시절의 케케가 영원한 케케’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어린시절의 경험이 ‘북신케케’들에게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는 의력을 더 키워준 것 같다. 그 때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북신케케’들은 각자 맡은 분야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올해 설을 맞으면서 상해, 청도에서 일하고 있는 동창들이 고향에 와서 만남을 가졌다. 술잔이 몇순배 돌고 나니 자연스럽게 튀여나온 말- “북신케케!”, 그 시절 듣기만 해도 대노했을 이 말이 오늘에 와서는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 그 말속에는 우리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으니깐! / 김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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