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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13] 기자와 고추종자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7-18 19:54:32 ] 클릭: [ ]

시장에서 건강식품으로 소비자들의 눈길을 끄는 파프리카(皇冠甜椒)를 볼 때마다 나의 마음이 뿌듯하다. 가끔씩 친구들에게 ‘기자와 고추종자’를 화제로 사업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중한 수교 전기인물 한성호선생을 취재하고 있는 필자.

내가 처음 ‘기자’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은 도문중학교 졸업식에 참가했을 때이며 기자의 직업을 좀 더 깊이 알게 된 것은 지난 세기 60년대 농촌에서의 사회주의교양운동을 할 때이다.

1963년 도문중학교(당년 연길현 4중이였음) 제 16기 졸업생으로 그 때는 도문중학교가 초중반과(조, 한족 반), 고중반 (조선족반)이 함께 있는 상당한 규모의 민족련합 학교였으며 초,고중이 겸비한 고급 중학교였다.

그 때 졸업식에서 선배 졸업생 대표로 김동기선배님 (《길림일보》 연변주재 기자, 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으로 있었음) 이 장백산에서 국민당 특무를 잡던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 발언을 하고 본기 졸업생 대표로 당년에 도문중학교 뢰봉학습 모범생이였던 내가 ‘붉은 마음으로 새 농촌건설의 훌륭한 일군이 되겠다’는 내용의 결심발표를 했다.

나의 발언이 끝나자 열렬한 박수가 터지고 김동기선배님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자기가 주석대에서 받았던 꽃묶음을 나에게 안겨주며 굳은 악수로 고무격려해주었다.

이렇게 나는 그 날 졸업식에서 처음으로 기자라는 부름을 듣게 되였다. 그리고 기자의 직업을 좀 깊이 알게 된 것은 지난 60년대초에 전 주 농촌에서 진행한 사회주의교양운동 때였다.

그 때 나는 고향인 왕청현 석현진 수남대대 7대 (달라자)에서 정치 대장직을 맡고 활약했다. 우리 마을에 온 사회주의교육공작대가 바로 키 크고 인물이 잘 생긴 연변인민방송국의 서명준기자였다.

서기자는 우리 마을에 오기 전에 수남대대 고려툰(지금의 흥진)에 파견되였다면서 그 때 고려(高丽)가 너무나 가난하여 잘살아보라고 그가 나서 고려마을을 흥진(兴進)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위풍이 당당한 서기자는 한동안 농민들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생동한 실례로 기자라는 직업의 사회책임을 감명깊게 들려주었다. 바로 이런 과정으로 기자라는 직업을 그렇게도 부러워한 나다.

그런데 행운이라 할가, 아무튼 필자가 김동기기자와 서명준기자를 알아서 꼭 20년 만에 《연변일보》사 도문 주재기자로 선정받고 지금까지 한눈 팔지 않고 기자사업에 충직하고 있다.

1986년 12월 26일에 농촌취재를 할 때의 이야기다.

이날 필자는 남새농사로 한해 순수입을 만원 이상 올렸다는 도문시 홍광향 달라자촌의 남새기술원 리명달을 취재하면서 “농민들의 절박한 수요가 무엇입니까?”고 물었다. “우리 농민들은 돈만 보고 살지 않습니다. 청년들을 조직하여 문화실을 꾸려야 하지요”로 말문을 열었다.“우리들에게 요긴한 것은 과학기술 전수와 정보입니다. 전 시에서 오이농사 생산량이 우리 집이 제일 높은 셈입니다. 지난해에 오이 포기당 60여개씩 달렸는데 대부분이 절로 떨어지다보니 나중에 한포기에서 평균 10개 밖에 뜯지 못했습니다. 이런 실정을 알고 과학기술 부문에서 단위당 수확고를 높일 수 있는 기술을 농민들에게 전수해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고 했다.

“자료를 보니 산동성 이남현에 외국에서 수입한 단고추 품종이 있다고 하는데 고추 하나의 평균 무게가 250그람, 심지어 750그람이나 되는 고추도 있답니다. 관련 부문에서 우리에게 이 고추종자를 제공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리명달의 말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귀로에 오른 나는 리명달이 농민들의 절절한 요구를 대표해서 말한 것이다고 생각했다.

하여 1987년 1월 10일 《연변일보》에 <우리 농민들은 돈만 보고 살지 않습니다>는 제목의 톱기사를 발표하고 그날 신문과 함께 산동성 관련 부문에 변강 소수민족 기자의 신분으로 산동성에서 변강의 소수민족 농민들을 부유의 길로 나가도록 도와달라는 절절한 편지를 올렸다.

과연 2월 16일에 이남현 남새연구회 주순(朱順)이라는 녀성이 회답편지와 함께 한알에 십몇전씩 팔았다는 미국 ‘황관단고추’ 종자 40여알을 부쳐왔다. 고추종자를 받던 날 나는 기자의 영예감과 자호감으로 흥분되여 밤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이렇게 40알의 고추종자가 리명달의 몇년간의 고심한 끝에 달라자에 뿌리내려 <리명달이 오이보다 더 무거운 고추를 생산한다>는 소식이 신문, 방송, 텔레비죤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몇년 후 이 고추는 길림성 우량고추품종으로 평선되였다.

1988년 2월 12일, 도문시인민정부에서는 전 시 총화대회에서 시정부의 문건을 발부하여 “도문을 홍보하는데 모든 정력을 바친 오기활기자에게 ‘공을 기입’(記功一次)한다”며 표창하였다.

이 소식을 1988년 2월16일 《연변일보》가 “연변일보사 력사에서 지방정부의 표창을 받은 기자가 오기활기자가 처음이다.”는 내용으로 1면 기사에 올렸다.

기자란 무엇인가? 수십년간의 체험으로 나는 “기자는 사회의 제1목격자, 공익과 민의를 뒤받침하는 ‘백성의 고발자’, 미움을 사랑으로 이끄는 조애사(助愛士), 백성의 ‘기원’을 서로 전달해주며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라고 정의한다.

바로 기자였기 때문에 많은 선진인물과 영웅인물을 제때에 발견하고 홍보하여 사회주의정신문명 건설에 기여할 수 있었고 기자였기 때문에 여러가지 비리를 폭로, 비판할 수 있었으며 기자였기 때문에 ‘이웃절’을 발기할 수 있었다.

나의 좌우명은 “참다운 언론인으로 금전과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지 말고 흙탕에서 피지만 오염을 모르는 평생 ‘련꽃기자’로 되련다”이다. / 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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