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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15] 군인, 내 평생의 특별한 인연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7-31 17:03:53 ] 클릭: [ ]

인생의 90고개를 돌이켜보면서 늘 많은 걸 총화하고 느끼게 된다. 올해 91세인 나는 로당원이며 한평생 교육사업을 떠나지 않았다. 한편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군인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이 계속 이어졌다.

오늘은 ‘8.1’ 건군절이다. 뒤이어 건국 70돐을 맞이하게 되는데 나의 인생에서 군인과의 특수한 인연이 새삼스레 떠오르며 격동을 금할 수 없다.

 

필자 박록순

1930년대 여섯살 때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된 나는 머슴살이를 지내던중 큰아버지의 지지로 2년 반의 소학공부를 마치고 연길현 덕신구 장동촌에서 동년시절을 보냈다.

그 때 외지에서 최정옥이라는 언니가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아래집 조씨네 사랑칸에 이사왔다. 정옥언니는 가만히 나한테 그의 아버지는 항일 구국군에 참가하여 유격구에 갔다고 하였다. 정옥언니와 그의 어머니에게서 나는 처음 유격구의 녀성군인 등 항일유격대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들이 정말 부러웠다. 정옥언니와 나는 좀 크면 같이 유격구에 찾아갈 타산으로 지도를 찾아놓고 축소거리를 재여가면서 갈길을 탐색하였다. 기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둔한 타산이였다. 이것이 아마 나의 군인과의 인연의 싹이라 하겠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끝내 항일전쟁승리를 맞이했다. 나는 열심히 공부를 했고 학습성적이 학급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했으며 특히 수학을 잘해 소문이 났다. 그 후 장동소학교 담임 박철선생님의 도움으로 룡정명신녀자중학교에 입학하여 계속 공부를 하게 되였다.

1946년 해방전쟁시기 로해방구인 우리 연변에서 많은 청년들이 해방전쟁에 뛰여들어 남정북전에 참가하고 서슴없이 자신의 청춘을 바쳤다. 1947년에 이르러 우리 청년학생들도 전선지원에 동원되였는데 군대로, 담가대로, 간호원으로 용약 뛰여들었다.

우리 룡정명신중학교도 례외가 아니였다. 우리 학교에서는 100여명의 녀학생들이 간호원대에 참가하였는데 나는 선참으로 신청했다. 우리는 퍼붓는 비를 무릅쓰고 15일간 강행군을 하여 돈화, 교하, 하수림자를 지나 야전군 전후병원이 주둔하고 있는 화전현 홍석에 이르러 그 곳 전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간호했다.

전쟁이 치렬하다 보니 전선에서는 부상병들이 련속 락역부절히 들이닥쳤는데 나처럼 어린 처녀애들이 그 부상병들을 돌본다는 것이 실로 쉽지 않은 일이였다. 처음에는 부상병들의 찡그리는 얼굴과 흉한 상처를 보니 무섭기도 하고 구역질도 났다. 그리고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를 몰라 망설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것이 괜찮아지고 팔과 다리가 끊어지고 몸을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병들을 보면서 오히려 이들이 더없이 미덥고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게 생각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장개석과 국민당 반동파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슴을 불태웠다.

하루는 복부에 큰 부상을 입은 신동일이라는 부상병이 전선에서 내려왔다. 나와 김인숙이가 책임지고 밤낮 가리지 않고 알뜰히 간호했다. 한달후 다시 전선으로 가지 못하는 전사들을 제대시켰는데 신동일이도 그 속에 들었다. 전선으로 다시 나가지 못하고 집으로 가는 그의 모습이 애처로와 나와 김인숙은 가지고 갔던 미시가루에 엿을 타서 밤샘 태석을 만들어 그가 집으로 갈 때 길에서 자시라고 드렸다. 큰 중상을 입고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던 신동일은 너무도 감격되여 눈물을 금치 못했다.

1949년 10월 20일, 나는 연길현당정간부학교를 졸업하고 태양구 중심소학교 교사로 배치받았다. 이렇게 졸업배치를 받으러 룡정에 왔다가 뜻밖에도 후방에 돌아간 신동일이를 만났다. 그런데 일이란 참 묘하게도 그는 금방 내가 배치받은 태양구 당위에서 조직위원으로 사업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몹시 반가와하면서 빨리 태양구로 오라고 하였다. 나도 너무 기뻤다.

내가 태양구 중심소학교 교사로 간 후 신동일은 나를 무척 관심해주었고 사업상 무슨 곤난이 없는가고 자주 물어보군 했다. 수시로 찰떡이며 돼지고기며 닭을 잡아가지고 부인, 아들과 함께 나를 찾아와 많은 관심을 주었다.

시집 갈 나이가 되자 항미원조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전업하여 돌아온지 1년이 안되는 잔페군인 김국성이란 분을 소개해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연길현 기업공사 행정고 고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만나보니 남자답게 생긴 넓적한 얼굴에 착해보였다. 자세하고 진지한 마음씨를 가진 분이지만 모두 전선에서 중상을 입은 그의 신체를 두고 근심하였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달랐다. 전선에서 부상병들을 간호한 적이 있는 나는 목숨을 걸고 조국을 위해 싸운 모든 분들을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게만 여겨왔다. 오늘 이렇게 김국성이라는 분을 만나게 된 것이 더없는 영광으로 느껴졌다. 신체에 대한 걱정 따위는 념두에도 없었다. 앞으로 한평생 내가 책임지고 돌봐주면 되니깐. 특히 부모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나를 시원시원한 성격의 시어머니 될 분이 잘 지지해줄 것 같아서 더욱 기뻤다. 하여 1953년에 나는 김국성이와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 김국성이는 1946년 4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에 시험보고 입학하였다. 아버지의 원쑤를 갚으려고 열심히 배우고 꾸준히 훈련하여 1947년 2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7월 우수한 성적으로 군정대학을 졸업했다.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141사에 배치되여 422퇀 3영 8련 정치부 지도원 직을 부임했다. 이때부터 그는 적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가렬한 전투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겪으면서 중국의 8개 성을 전진하여 ‘료심전역’, ‘평진전역’, ‘중경해방전역’ 등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950년 4월 28일 그는 상급의 명령으로  조선으로 나간 그는 1950년 7월 1일 서울 노랑진 전투에서 폭탄 쪼각에 가슴이 뚫려 심한 중상을 입었다. 희생된 걸로 여기고 전우들이 추모하고 있을 때 한 전우가 숨이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 병원에 호송되여 9차례의 수술을 거쳐 목숨을 건지게 된 그다. 몸이 좀 회복되자 다시 전선으로 나갈 것을 신청했으나 신체 때문에 가지 못하고 1952년 5월에 제대하여 어머님이 계시는 룡정으로 돌아왔다.

결혼 후 시어머니와 같이 생활하면서 나를 친딸처럼 끔찍해하시는 시어머니의 관심하에 1960년대부터 룡정진신안소학교 교장직무으로 있다가 1986년 연길시건공소학교 부교장직에서 리직했다.

시어머니를 통해 항일렬사이신 시아버지의 비장한 투쟁경력을 알게 되였다. 시아버지 김명호는 세동생과 함께 개산툰 항일유격대 대원으로 왜놈들과 싸우며 ‘검정눈’이란 별명으로 소문이 났다고 했다. 1932년 반역자의 밀고로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여 삼형제가 하루에 같이 살해되였다.

시동생 김국태는 추천받아 1955년 8월부터 1961년 7월까지 할빈군사공정학원에서 공부하고 우리 나라 제1기 구쏘련 전문가가 배양한 박사이며 1961년 11월 서안 국방과학 618항공연구소에 배치받았다.

김국태는 연구소와 국내 관련 분야의 골간으로 활약하다 항공공업부 제618연구소 부총공정사(군관)로 사업하였다.

이러고 보니 어릴적 군인 꿈을 품기 시작하여 전방 군인병원의 간호원을 거쳐 제대군인과 결혼하고 시아버지 또한 항일렬사이며 시동생도 군사시설 관련 전문가로 있으니 군인과의 인연이 나의 일생을 동반한 것이다.

군인의 용감함과 분투정신, 충성과 높은 규률성이 한평생 나의 정신적 동력으로 되였다. 이것이 나의 인생의 크나큰 긍지와 자랑이다. / 박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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