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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만필]봉오동 게릴라 대장을 만나다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8-23 16:31:50 ] 클릭: [ ]

  김혁

[김혁의 독서만필]
― 《홍범도 장군》을 다시 읽으며

봉오동(凤梧桐), 오동나무에 봉황이 깃드는 마을이라는 그 곳에 여러번 다녀왔었다.

연길─도문 고속도로로 달려 장안턴넬과 소반령턴넬을 지나면 도문 리정표가 보인다. 이어 도문 나들목에서 왕청 방향의 리정표를 따라 1키로메터 가량 가면 도로 오른쪽에 수남촌(水南村) 패말이 나온다. 길을 따라 곧바로 올라가면 봉오동저수지가 나타난다. 소나무가 우거진 더기에 봉오동기념비가 세워져있다.

2007년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가 이곳을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정했고 2013년 6월 도문시인민정부에서 기념비를 세웠다.

문학도 시절, 문우들과 함께 들놀이로 이름도 우미한 봉오동으로 자주 갔었고 우람한 저수지 댐 우에서 사진도 많이 남겼었다.

지금은 수몰지로 되여버린 릉곡지변(陵谷之变)의 이곳에서 멀리 갓모양의 봉우리가 보이는 지점이 한낱 포수 출신이였던 홍범도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쳐 승전고를 울렸던 봉오동전투의 현장이다.

100년전 세상을 놀래운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핀 사적지의 현장인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은 현재 민속, 관광, 홍색근거지 건설을 접목하면서 현재 새 농촌건설 년속(年速)이 제일 빠른 촌으로 거듭나고 있다.

봉오동전투를 승전에로 이끈 주역의 생평을 다룬 책이 있다. 《홍범도 장군》, 연변주정협 문사자료위원회의 편찬으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1991년에 펴냈고 책의 저자는 강룡권이다.

 《홍범도 장군》, 홍범도의 흉상이 그려진 인물전 표지.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 조선 평안북도 자성(慈城)에서 출생, 호는 여천(汝千),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수렵과 광산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일찍 의병들의 봉기에서 자극을 받고 산포대(山炮队)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게릴라전을 벌려 격파한 전적을 갖고 있다.

1910년, 고향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점령되자 부하들을 이끌고 중국 동북으로 건너와 약 400명의 부대를 편성한 뒤 갑산, 혜산, 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험한 산악지형에 익숙한 반일대오는 게릴라식 전투로 일본 정규군들을 무찌르는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1920년 6월,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일본군 19사단 소속부대, 아라요시 중위의 남양경비대가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 일대에 침입하였다.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은 봉오동에서 3일간의 치렬한 전투를 벌렸다. 이 맹격전에서 일본군 150여명을 살상하고 보총 60여자루와 기관총 3정 및 권총과 탄약 등 무기를 로획하였다. 봉오동전투는 민족의 항일무장대오가 동북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첫번째 큰 전투였고 또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둔 전투로 기록된다.

같은 해 10월에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부대와 함께 청산리전투에서 또 한번의 승전고를 올렸다.

1921년 홍범도는 로씨야의 흑하자유시(黑河自由市)로 이동하여, 레닌의 협조를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반일대오의 실력양성에 힘썼다.

이후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짓다가 1937년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극장 야간수위로 일하다가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1962년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기치》의 기자들과 한인들의 주도로 크질오르다 중앙공동묘역으로 이장하였으며 흉상과 3개의 기념비를 세웠다. 또 말년에 거주하던 집은 력사기념물로 지정되였고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거리’로 지정되였다.

전설적인 게릴라 대장 홍범도의 이야기는 항간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레닌이 선물한 모젤 권총을 지니고 사진을 남긴 홍범도

1922년 1월 모스크바 크레믈리궁에서 열린 ‘쏘련 원동 공산주의혁명조직 제1차 대표대회’에 52명 조선인대표가 참가하였는데 회의가 페막되던 날 동궁에서 홍범도는 레닌의 접견을 받고 또 모젤 권총을 선사받았다.

몇해전 조선족 원로 촬영작가 황범송이 《길림신문》을 통하여 자신이 몇십년간 깊숙이 소장하고 있던 귀중한 사진을 세상에 공개하였는데 그 사진에서 홍범도 등 조선독립군 장령들이 레닌의 접견을 받는 장면을 보게 되였다.

《홍범도 장군》의 저자 강룡권을 뵌적 있다. 1999년경 할빈의 어느 간행물에서 주최한 ‘한얼’실화문학상에서 필자와 강룡권선생은 함께 수상하게 되였다. 받은 상이 말단의 동상이였지만 무척이나 겸허하신 선생은 사학연구는 해온지 오래지만 문학상은 처음이라며 무등 기뻐하셨다.

그리고 몇달 못되여 강룡권선생의 비보를 듣게 되였다. 사비를 털어 자전거로 동북3성의 력사사적지 답사를 누비던중 선생은 과로를 못이겨 료녕성 어느 촌부락의 도로변에 쓰러지신 것이였다. 민족에 대한 소명의식을 안고 《동북항일운동 유적답사기》 등 저서를 펴냈던, 일명 ‘자전거 사학자’로 불리던 선생의 객사에 모두들 커다란 슬픔을 표했었다.

요즘 해외에서 봉오동전투를 소재로 영화를 펴내여 화제이다. 하지만 엔딩장면에 홍범도 장군이 피끗 얼굴을 비치는, 실존인물의 일대기와 삶의 방식을 픽션에 기대여 펼친 오락이 가미된 영화보다는 발로 뛴 고증을 거쳐 력사의 진실을 극명하게 풀이해낸 저서에 더욱 손길이 간다.

우리가 잊고 지냈던 이 땅의 아름다운 산하와 거친 풍광 속 장엄한 사건과 인생을 실사로 담아낸 이런 책들은 현세의 후손들에게 진한 감동과 교훈을 투척할 수 있다는 면에서 빠질 수 없는 쟝르로서의 매력을 지닌다.

‘살신성인’의 사학자가 펴낸 《홍범도 장군》은 비장과 비운으로 점철된 파란 많은 인생을 보냈던 게릴라 대장 홍범도를 세세하게 그려냈다. 또한 봉오동전투의 현장을 낱낱이 답사하면서 그 민족의 항일운동사에 중후하게 기록된 전역의 면모를 밝혔다.

책의 권말에는 <홍범도 장군의 전투경로와 쏘련에서의 만년생활>, <홍범도 장군 사망설에 관한 고찰>, <홍범도 장군 년보>를 부록으로 실었다. 또 쏘련작가동맹 회원이며 공훈상예술가 칭호를 받은 동포작가 채장춘이 각본을 쓰고 당지에서 오래동안 무대에 올랐던 희곡 《홍범도》도 별첨하여 사료와 인물전으로서의 완정성을 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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