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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21]공화국과 동갑임을 무한한 영광으로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0-18 09:26:08 ] 클릭: [ ]

 

백세 시대인 요즘엔 칠십나이는 삶의 지혜를 빛내는 황금 시절이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두번째 봄이다.

공화국 창립과 동갑인 나의 칠십년 인생을 되돌아보노라면 어린시절과 그림같은 고향의 풍경이 내 머리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해에 두만강 상류인 화룡현 로과향 흥남촌에서 칠남매중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6살을 먹던 해 가족을 따라 소발구에 앉아 감자와 조 농사를 짓던 강장골을 떠나 10리 쯤 떨어진 곳에서 어린시절과 청춘시절을 보냈다.

학생들과 함께 있는 필자 김동운.

나는 감자 섞인 조밥과 콩보리밥만 먹다가 11살에 처음 이밥을 먹어보았고 12살에 처음 사탕을 먹어보았으며 14살에 처음 전등불을 보았고 16살에 처음 기차를 타보았다.

나의 아버지는 낫 놓고 기윽자도 몰랐지만 자식들에 대한 기대는 남달리 컸다. 간혹 도회지에 갔다가 집에 돌아 올 때면 공책과 고무지우개,연필을 사다가 나의 손에 쥐여주면서 웅심 깊은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때를 잘못 만나 공부를 못했는데 너나 공부를 잘하여 나라의 유용한 사람이 되여라.”

“예, 공부를 잘하겠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깊은 뜻은 잘 몰랐지만 자신 있게 대답하군 했다.

아버지는 가끔 날 데리고 두만강변에 고기 잡으러 갔는데 아버지가 반두질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나의 눈앞에 우렷이 떠오르군 한다.

“동운아! 반두를 잘 대고 있어라. 아버지가 돌밑에 숨어있는 물고기들을 몰아올테니”

아버지는 바지가랭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고기들이 있음즉한 곳을 찾아 두발로 내가 꼭 잡고 있는 반두 앞까지 물고기들을 몰고 와서는 손짓을 하면서 얼른 반두를 쳐들라고 하였다. 그러면 나는 반두를 쳐드는데 그 때면 아버지가 얼른 다가와서 거들어주셨다. 함께 반두를 들어올리고 물이 빠진 그물 안을 들여다보면 돌종개, 버들치 등 여러가지 고기들이 팔딱거렸다. 그 때마다 나는 환성을 올리군했다.

어린 나한테는 두만강에서의 고기잡이가 즐거운 놀이였지만 농사일에 지친 아버지에게는 많은 식구들에게 맛 있는 한끼를 마련하는 로동이였으리라.

꽤 많이 잡힌 물고기를 다래끼에 담아가면 찬거리로 저녁끼니를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에 함박꽃같은 웃음이 피여났다.

“우리 동운이 이젠 다 컸네. 아버지 도와 고기잡이도 잘하는구나”

“어머니, 올해 겨울엔 아버지를 따라 산에 나무하러도 갈게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호기롭게 말했다.

“참 장하구나, 그래 힘 자라는 대로 많이 돕거라.”

어머니는 일손을 재우쳐 고기밸을 따고 맛 있는 물고기탕을 끓였다. 석유등잔불을 켜고 오손도손 밥상에 둘러앉아 맛 있게 물고기탕에 조밥이라도 배불리 먹는 날은 온 집안에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날이여서 실로 시골의 잔치판을 방불케 했다.

나는 집에서 수십리 떨어져있는 남평중학교에 입학하여 공청단에 가입하였고 1970년 2월 28일, 21살 혈기방장한 청춘시절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진붉은 당기앞에서 장엄하게 선서하던 그 감격적인 시각을 회상하면 가끔 가슴이 울렁거리군 한다. 그해 8월 첫 로농병학원으로 추천받아 연변대학 정치학부에 입학하였다. 나는 당의 따사로운 해빛을 한몸에 안고 열심히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조직의 통일배치에 따라 장춘시 구태에 있는 영성탄광자제중학교에서 정치교원으로 사업의 첫발자국을 뗐다.

그 때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 18개 사업, 기관 단위에서 21번의 직무변동을 거치는 복잡하고도 기나긴 사업려정을 겪어왔다.

첫 사업터가 연변지역을 벗어나니 나를 키운 고향과 가족이 마냥 그리웠다. 내가살던 고향에서 청춘의 삶을 빛내보길 바랐으나 개인의 욕망보다 조직의 배치가 더 중요했다. 하여 산 설고 물 설고 낯 선 타고장에서 사업의 첫 악장을 엮어나갔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꿈을 품고 간절히 기대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니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찾아왔다.

장춘 지식청년과 교환조동을 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생겼다. 나는 고향인 화룡현 와룡중학교에 전근되여 정치교원 겸 공청단서기로 활약하다가 현당위 조직부의 발령을 받아 용화공사 무장부 부장으로, 1년 후에 공사당위 부서기, 혁명위원회 부주임으로 있게 되였다. 1976년 5월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제3기 청년간부양성반에 참가하였고 그 해 년말에 공사당위 서기,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등용되였다. 그 뒤 선후로 화룡현 숭선공사 농촌공작대 조장, 공청단 화룡현위 서기, 현당위 위원에 임직, 1983년 공청단 주위로부터 제11차 전국공청단대표대회 대표후선인으로 추천받기도 했다.

1986년 9월, 화룡현당위 선전부 부부장으로 발탁된 지 1년도 안되여 화룡현당위 선전부 부장의 중책을 짊어지게 되였다.

1990년초 화룡현당위 상무위원으로 임명받은 후 농촌에서 대문화건설을 틀어쥐여 농민들의 종합 자질을 높여야 한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기했다. 반년간의 시간을 들여 조사연구를 하고 론문을 써서 농촌 대문화건설을 지도했다. 그 때 제기한 관점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상사업을 강화해 정치자질을 높이고 법률보급을 잘해 사회안정을 보증하고 도덕교양을 잘해 조화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신원대오건설을 틀어쥐고 통신사업을 추진시켰다. 2년간의 노력을 거쳐 전시 통신원대오를 50명으로 부터 200여명으로 늘였다. 그중 20여명 골간들이 사람마다 100편 이상의 원고를 써서 주와 현 매체에 발표하도록 했다. 그리고 통신원대오 양성훈련을 적극 틀어쥐여 자질을 높였다. 현에서 해마다 한번 내지 두번 강습반을 꾸리고 각 향진에서도 해마다 한차례 이상의 강습반을 꾸려 통신원들의 자질을 높였다. 당시 매체에 발표한 화룡현의 원고의 질과 량이 전 주적으로 앞자리를 차지했다.

화룡현당위 선전부 부장으로 있은 몇년간 나는 새로운 형세에 맞추어 선전사업의 새 길을 열심히 탐색하였다. 깊이 있는 조사연구를 거쳐 농촌 대문화건설에 관한 내용과 방법, 견해를 내놓고 착실하게 실행하여 농촌발전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 기간에 나는 길림성 모범선전부장으로 당선되여 표창받기도 했다.

룡정시당위 부서기로 있은 2년 반 동안에는 농촌, 문화교육, 정법사업과 군중단체사업을 맡고 농촌형세가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시기에 뒤따른 문제들을 연구,해결하는 데 모를 박았다. 그리고 ‘새로운 형세하에 어떻게 경제발전을 틀어쥘 것인가’는 과제를 놓고 반년 남짓이 조사연구를 진행한 후 <소성진(小城镇)건설을 강화하고 현역경제 돌파를 적극 추진하자>는 제목으로 조사론문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소향진 건설의 의의와 내용, 조치 등 3개 측면의 문제를 보다 깊게 분석하고 끄집어냈다. 특히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룡정시의 향진건설을 3개 층차로 나누어 분별하여 기획, 지도해야 한다고 견해를 내놓음으로써 당시 룡정시의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놀았다.

내가 룡정에 뿌리를 내리고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조직에서는 나더러 왕청현 현장 사업을 맡으라고 하였다.

‘가는 곳마다 새로운 모순과 곤난이 있을 것인데 왕청으로 가는 게 옳은가? 사업은 투쟁이다. 곤난을 두려워하면 어떻게 사업한단 말인가? ’나는 고민 끝에 조직의 배치에 복종했다.

왕청현 현장으로 있는 기간은 3년 3개월 3일이였다. 왕청에 부임하자 마자 가정에는 둘째 딸애의 공부문제로하여 걱정거리가 생겼다.

언제나 나의 사업을 군말없이 묵묵히 지지해주던 안해였지만 사춘기를 넘기며 공부하는 딸애들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나도 딸애의 공부문제로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였다. 나는조리정연한 어조로 말하였다.

“나도 딸애들이 전학을 하면 공부에 지장받을 거라 생각하오. 하지만 왕청인민들이 자식을 공부시키는 학교에서 왜 내 자식은 공부시킬 수 없겠소? 현장인 내가 자식을 데려오지 않으면 왕청인민들에게 뭐라고 교대하겠소? 현장은 전 현의 코기러기이니 모든 면에서 이신작칙해야 하오.”

“하긴 그래요, 남들이 적응하는 학교에 우리 애들이라고 왜 적응하지 못하겠나요? 왕청에 가자요.”

마침내 안해는 나의 말대로 했다. 딸애도 잘 따라주고 학습, 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나는 아무리 사업이 다망하여도 학부모 회의에 참가하고 휴일이면 딸애들과 함께 시내돌이도 하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지금 박사공부를 마치고 북경 모 대학에서 부교수로 있는 큰딸과 박사학위를 따고 연변병원에서 부주임 의사로 근무하는 둘째 딸을 생각하면 건강하고 훌륭하게 성장한 두 딸한테 기특함과 고마움을 금할 수 없다.

왕청현 현장으로 갓 부임되였을 때 왕청현은 길림성 5개 현중의 하나, 연변에서 유일한 국가급 빈곤현이였다. 당연히 빈곤탈출이 첫째가는 임무였다.

1997년 현장으로 부임되여 첫번째로 한 일이 바로 왕청 시가지에서 천교령에 이르는 도로를 닦은 일이였다. 이 공사는 자금이 엄청 많이 드는 공사인데 현정부에는 자금이 없었다. 나는 관련 지도자들과 일부 책임자들을 이끌고 몇달간 10여차례나 주와 성 및 국가 관련 부문을 찾아가 반복적으로 공사 필요성을 간곡히 말하였다. 반년간의 노력 끝에 대상이 락착되고 6,000여만원의 자금도 유치되였다.

근 2년간의 시공 끝에 왕청에서 천교령에 이르는 도로가 완공되였다. 이는 왕청현의 발전 뿐만 아니라 그 후 왕청현 도로건설에서도 소중한 경험을 쌓게 되였다. 이 무렵 왕청현은 정부사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하기에 어려울 정도로 재정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는 단시일에 해결하기 어렵지만 반드시 참답게 감원건설을 연구하고 틀어쥐여야 한다고 판단한 나는 근 1년간의 시간을 들여 기층에 내려가 조사하는 한편 기회를 잡고 감원체계를 세우는 중요한 과제를 둘러싸고 연구했다. 현당위 리론학습중심조회의에서 <왕청현 감원건설을 가일층 강화할 데 관한 사고>라는 제목으로론문을 내놓았다. 론문에서 제기한 4개 면의 감원건설을 틀어쥐여야 한다는 견해를 지침으로 삼고 사업을 적극 추진시켰는데 당시 현의 감원건설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빈곤현의 현장으로 있으면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보람도 있었다. 관리는 백성의 질고를 념두에 두고 항상 백성의 리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실천을 통해 깊이 체득했다.

1998년 8월의 어느 날, 갑자기 대싸리같은 큰비가 쏟아졌다. 불길한 예감이 번개마냥 머리를 쳤다. 그 때 공교롭게도 심장병이 도지고 감기까지 걸린 나다. 현병원에서는 무조건 며칠 동안 입원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한참 망설이고 있을 때 하마탕향에서 홍수가 져서 위험하다는 급보가 전해왔다. 호주머니에 약을 넣고 병원문을 나서려는 나를 “아니 이러다가 큰일 나겠습니다. 입원치료를 해야 합니다.” 병원 원장이 간곡한 어조로 만류했다.

나는 약을 먹고 해당 일군들을 거느리고 인츰 홍수방지 제1선에서 지휘했다. 그 때 우리는 꼬박 이틀간 싸워 홍수 피해를 막아냈다. 그런데 묘하게도 감기가 나아진 것이다.

“우리가 홍수와 용감히 싸우니 감기란 놈도 무서워 벌벌 떠는구만.”

내가 롱조로 말하니 모두들 웃음보를 터뜨렸다.

퇴직한 후 2012년부터 나는 연변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을 맡고 있다. 새세대관심사업에 혼신을 다해온 지도 어언 7년이 되였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지만 나라에서는 나에게 전국 새세대관심사업 선진개인이라는 분에 넘치는 영예를 안겨주었다.

룡정현당위 부서기, 길림성정부 북경주재 판사처 부처장, 룡정시당위 부서기, 왕청현당위 부서기, 왕청현 현장, 연변주 인대상무위원회 당조 위원, 비서장, 연변주 인대상무위원회 부주임 등 여러 직무를 리행한 나로서 실로 생각하면 할수록 감개무량하다.

공화국의 70년과 같이하면서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 농경사회에서 태여나 ‘문화대혁명’이란 혼란시기를 거쳐, 학습, 성장하여 사회주의건설에 뛰여들고 개혁개방의 세찬 물결 속에 합류하여 위대한 중국꿈을 이뤄가는 새시기를 맞이하였다.

날따라 륭성발전하는 조국은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기 위해 힘찬 도약을 하고 있다.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여보니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만수천산을 다 넘어왔건만 나름 대로 보람찬 삶을 살아온 시대의 행운아라는 긍지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공화국과 동갑인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긴다. / 김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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