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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58] 아버지의 빈자리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9-29 16:38:37 ] 클릭: [ ]

오늘도 나는 거실 중간의 쏘파 안자리에 누워서 하늘 나라로 가신 아버지의 따뜻한 온기를 되찾으려 애쓴다. 항시 우리에게 따뜻하고 상냥하고 인자하신 아버지의 숨소리를 새삼스레 떠올리면서 지나온 세월 태산같은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에 마음은 어느덧 그리움으로 꽉 차있다.

부모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 필자(뒤줄)

1962년 하방정책(下放政策)으로 할빈병기공장에서 설계사로 근무하던 아버지는 자식들을 조선족이 집거한 연변에서 키워보려는 욕심으로 좋은 일터를 그만두고 안도현 중평촌으로 하방하여 농촌에 뿌리 박게 되였다. 그 때로부터 아버지는 농민이라는 간고한 직업을 택하게 되였다. 얼마 안되여 큰딸인 내가 태여났고 뒤이어 남동생 둘이 세상을 보게 되였다. 우리 삼형제는 아버지, 어머니의 품속에서 우리말을 배워가며 행복하고 즐겁게 자랐다.

아버지는 우리 3남매 중에서도 나를 제일 예뻐한 것 같다. 해마다 가을에 공량을 바치러 공사 마을에 갈 때면 늘쌍 공량수레 앞자리에 나를 앉히고 갔다. ‘개눈깔’ 사탕도 사주고 고무신도 사주었는데 어린 나이지만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것이 왜 그리도 자랑스럽고 행복하고 좋았던지…

그 후 아버지는 공사 사방기업 회계로 있었고 수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출장 다니는 일이 빈번했다. 출장다녀올 때면 늘 나에게 줄 선물을 잊지 않고 사왔다. 하여 나에게는 녀자애들이 부러워하는 머리댕기가 가지각색으로 수없이 많았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나는 아버지가 내 인생의 최고였으며 아버지만 있으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아버지의 존재는 나에게 하나의 큰산이였으며 넓은 바다와도 같았다. 그러는 아버지에게 나는 조금이라도 보답해드리고 싶었고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본래 술을 아주 반가와했다. 나는 아버지의 술안주를 한가지라도 더 챙겨드리고 싶어서 하학 후면 애들이 모여 줄뛰기를 놀고 숨박곡질 놀음을 놀아도 놀지 않고 그 시간에 강변으로 달려가 가재 잡이와 개구리 잡이를 해서 아버지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맛 있는 술안주를 해드렸다 그리고 초봄 싸늘한 봄바람이 부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끝을 불어가면서 묵은 덤불을 헤치고 채 녹지 않은 언땅을 뚜져가면서 봄달래를 캤다. 그러면서 혹시 큰 달래가 보이면 아버지께서 기뻐하며 큰 달래를 드시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는 내가 작은 일을 해도 “우리 딸이 최고야, 우리 딸이 한 반찬이 제일 맛 있구나.”라고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칭찬과 사랑에 나는 무지무지한 행복을 느끼면서 래일도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려야지 하며 다짐하군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더없는 사랑과 관심을 주면서도 품덕교양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엄격하고 직설적이였다. 한번은 내가 과일을 먹고 싶어서 친구들과 같이 과수원에 가 돌배를 훔치러 갔다. 늦은 밤 돌배를 한가방 가지고 집에 들어서는데 아버지에게 발각되였다. 아버지는 그 즉시로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고 다른 사람의 물건에 절대 손대면 안된다고 호되게 꾸짖었다. 그 때는 과일이 귀한 때라 과수원의 개를 피해가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뜯어온 돌배인데 먹어보지도 못했다. 이 일로 하여 나는 새롭게 인생도리를 깨닫게 되였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이다. 아버지는 우리 학교에 초빙되여 수업을 맡게되였다. 수학 교수중 측량 부분을 아버지가 맡았다. 실외 교수에서 상냥하고 차근차근 위치측량법을 가르쳐주시는 아버지 덕분에 학생 모두가 흥이나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지금도 우리 동창들은 아버지를 많이 외우고 있으며 아버지의 교수법을 극찬하고 있다.

수학과 한어 공부에서 곤난에 봉착할 때마다 아버지는 나의 훌륭한 과외선생님이 되여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내가 중등전문학교에 입학했을 때이다. 태질이 심한 딸이 침대에서 굴러떨어질가봐 아버지는 직접 학교에 와서 침대 옆에 널판자 하나 더 놓아주면서 밤에는 벽쪽에 붙어서 자라고 신신당부했다. 처음 집을 떠난 내가 여러모로 걱정이 되였던 것이다.

2년간 외지 생활을 하는 동안 아버지는 연길에 오실 때마다 어머니가 해준 맛 나는 음식을 가득 가지고 와서 한 침실 친구들과 나누어먹게 하였다. 그래서인지 침실 친구들은 저도 몰래 아버지를 기다리게 되였고 아버지가 오면 모두 열정적으로 맞이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생활에서 나의 든든한 후원자였고 정신적으로 훌륭한 계몽선생이였으며 사업에서는 까근하고 세심한 재정 업무 선배였다.

내가 공소사에 분배받아 회계로 있을 때 아버지는 오랜 재정 업무 실력자로서 계도 계산, 년말 계산 순서를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1985년 농촌정당 때 예비당원인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내가 응당 갖추어야 할 립장을 수립해주었으며 당전의 정치형세를 투철하게 파악하고 정당은 그 무슨 한사람을 공격하는 수단이 아니라고 가르쳐주었다. 아버지는 또 초심을 잊지 말고 주관 회계라는 중대한 직책에서 자기 역할을 충분히 잘 발휘하게끔 이끌어주었다.

아버지는 나의 성장과정에서 등대와 같은 존재로서 나의 앞길을 밝혀주고 인도해주고 넓혀주었다.

지금 내 나이 50대 후반이지만 지금도 아버지의 가르침과 지도가 많이 수여되고 또 그리워진다. 아버지의 그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진다.

아버지는 나의 영원한 멘토이다! / 남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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