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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63 ]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나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1-11 09:58:03 ] 클릭: [ ]
 

필자 김경희 

“어머니, 아버지의 어느 점이 마음에 들어 결혼하셨습니까?”

“응, 너 아버지는 선생님이셨구 아주 깔끔하구 멋졌어.”

“아버지, 어머니의 어느 점이 마음에 들어 결혼하셨습니까?”

“허허, 너 엄마 얼굴이 몹시 희였단다. 머리태 치렁치렁 하구…”

“어머니, 아버지가 그러시던 데 어머니의 얼굴이 특별히 희였답니다.”

“응, 한번은 달밤에 산책 나갔는데 신 끈이 풀어졌길 래 허리 굽혀 끈을 맸지, 그 때 너 아버지께서 뭐 하는가며 머리 돌려 묻더구나. 내가 머리 들며 ‘예, 곧 갑니다’고 대답하는 데 너 아버지가 ‘분 발랐소?’ 하지 않겠니? 그 때 살림에 언제 분 같은 거 만져나 봤겠니?”

“아버지, 어머니 그러는 데 아버지 아주 멋졌답니다.”

“허허, 그래서 너 엄만 내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주었지. 팥으로 메주를 쓴다 해도 곧이 들을 정도였단다. 허허~~~”

이렇게 한없이 우러르는 마음과 옥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서로 결합되여 주렁주렁 딸 넷을 낳아 키우신 나의 부모들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태양과 같은 따뜻한 사랑을 주셨고 어머니는 부드럽고 끈질긴 사랑을 주셨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혼자 로임으로 할머니, 어머니, 우리 형제 넷 일곱 식솔이 살았다. 살림이 어려워도 아버지에게서 언제 한번 그늘 진 얼굴을 보지 못했고 “힘들다” 란 말 한번 들어본적도 없다.

그래서 더더욱 ‘아버지는 태양 같은 분이시다’ 고 느끼군 한다.

나는 워낙 어릴 때부터 아버지 꼬랭이였다. 남달리 몸이 약해서인지 아버지도 류달리 나를 챙겼다. 아마도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나서 두달 만에 급성 페염에 걸려 더는 구할 길 없는 죽은 몸이라고 땅속에 파묻으러 갔다가 요행 되살아나 마음이 더 아파서였을 것이다.

1967년생인 내가 흑룡강성 계동현 신봉중학교 소학부 1학년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는 신봉중학교 중학부 3학년에서 교편을 잡았다. 춘하추동을 아버지의 새끼 손가락을 잡고 량태머리를 달싹이며 걷다가도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면 어느새 아버지의 등에 업힌 나였다.

소학교 1학년에 입학해서 겨울에 접어드는 11월 중순의 어느날, 학교에서 1학년 참관수업을 했다. 교탁에 서서 애들을 이끌고 주산을 놓는 나는 몹시 긴장해서 그만 바지에 오줌을 누고 말았다. 뜨끈한 오줌이 다리 안쪽을 타고 흘러내려오는 것을 느끼며 주산을 놓는 내가 자꾸 몸을 흠칫흠칫 떠는 것을 눈치 챈 아버지는 주산 놓기가 끝나기 바쁘게 애가 열이 난다고 선생님에게 청가 맡고는 곧장 나를 업고 집으로 내뛰였다. 덕분에 나는 감기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한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소학교 4학년 때에 수학 참관교수를 하는데 응용문제를 풀게 되였다. 나는 선생님이 배워준 방법과 다른 방법으로 식을 세워 풀고는 선뜻이 손을 들고 나가 흑판에다 산수를 풀이를 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내가 푼 문제에 ‘×’ 표를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 틀렸다고 하니 의견은 제기할 수도 없구, 기가 푹 꺾여 온 하루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녁에 집에 돌아갔는데 아버지는 내가 풀던 식에서 선생님께서 푸는 식으로 유도하고 선생님께서 풀던 식에서 내가 풀이하던 식으로 유도해 답을 써내려갔다. “이봐, 답이 같잖아. 니가 풀이한 식이 틀린 건 아니야. 맞아, 단지 좀 복잡해서 선생님께서 미처 니 뜻을 몰랐던 것 같아. 머리 잘 썼네, 우리 딸! 기억해, 산수는 답은 정해져있지만 방법은 여러가지란 걸!” 그 때부터 나는 신심이 있었고 어려운 문제에 부딛쳐도 두렵지 않았다.

 
필자의 아버지, 어머니

매번 랑독랑송 경연에서 1등을 하여 상으로 책을 받아오고 학기마다 최우등생, 3호학생으로 뽑혀 상장을 받아올 때마다 아버지는 언제나 한쪽에 자리하고 서서 큰 박수를 보내셨다. 아버지가 지켜주셔서 언제나 마음은 든든하였다.

1979년도 내가 소학교 5학년에 다닐 때 아버지는 계동현 계림중학교 고중 3학년 교원으로 전근하게 되였다. 아버지의 꼬랭이인 나는 아버지가 계시는 계림중학교로 가겠다고 떼를 써 1980년도에 계림중학교로 전학했다. 그런데 몸이 약한 체질이라 12월의 어느날 열이 39.6도까지 올라갔다. 학급담임으로부터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바로 나를 자전거에 태워서는 현병원에 가 입원시켰다. 된감기에 걸렸던 것이다.

1992년 내가 북경해군병원에 한달반 입원해 있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려관에서 달려와서 온 하루 나를 보살피다가 저녁 산책까지 마치고서야 려관에 돌아가군 하셨다. 어느날,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병원 울안을 산책하다가 문득 껍질이 없어보이는 이상한 나무가 나의 눈에 띄였다. 호기심에 아버지께 물었더니 아버지는 나의 손을 꼭 잡고 손에 힘을 주었다가 느슨히 풀면서 시로 화답하셨다.

큰 나무는 큰 껍질에 둘러싸이고

작은 나무는 작은 껍질에 휩싸여있는데

뜰 앞의 자형나무는 껍질 없이도 해를 나네.

아버지께서 차분히 읊으시는 시를 들으며 나는 그 당시 뒤 말을 잇지 못했지만 그 나무가 자형나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그 자형나무를 통해 나에게 견강하고 굳세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당시 아버지는 나를 간호하시느라 체중이 10여근이나 줄었다. 그러나 늘 웃음 띤 얼굴로 병마에 시달려 삶의 용기를 잃은 나에게 힘을 주시던 아버지의 그 모습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홀로 버는 아버지 로임에 매여 일곱식솔이 살라니 변변치 못하게 살았다. 어머니는 생활에 보탬하려고 팔이 쑤시게 하루에 가마니를 몇십장씩 짰으며 재봉 솜씨가 좋은지라 눈뿌리 빠지게 아기띠랑, 베개모랑 만들어서는 다리 시큰하게 이촌 저촌 다니며 팔았다. 그리고 닭과 오리 기르고 돼지를 기르며 바삐 보내셨다.

어머니는 내 몸이 약하다며 아침마다 가만히 먼저 나를 깨워서는 따끈따끈한 닭알찜을 먹였다.

농사 일에 나갔다가 어슬녘에야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꿀 맛나는 저녁밥을 먹고 언니가 설겆이를 하고 어머니는 돼지죽을 주고 닭 먹이를 주고 내가 방을 닦으면 하루 일과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어머니는 또 재봉틀앞에 앉아 베개모며 아기띠를 만드는 일에 밤 새웠다.

환절기 때마다 어머니는 오공이나 숙지황을 넣은 닭찜을 해서는 내가 통째로 먹도록 했다. 어머니는 뜨개 솜씨도 뛰여나 일주일이면 털실 옷 하나씩 척척 만들어졌다. 이쁜 무늬에 수놓이까지 한 털실 옷을 입고 나서면 동네 어른들이나 아이들이 모두 이쁘다고 감탄이 그치지 않았다. 여름에는 아롱다롱 칠색 단이나 꽃천들로 치마를 만들어주셨는데 아이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군 했다. 사실은 천 쪼각을 모아서 만든 치마였는데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가 돋보였다.

겨울이면 어머니가 농사일을 하지 않기에 품을 들여 엿을 달여서는 가락엿이랑 오꼬시랑 만들었는데 우리는 겨울 내내 마음대로 먹었다.

메주를 쑬 때는 삶은 콩을 실에 꿰매여 꿰맨 메주콩을 눈밭에 묻고는 앞마당 이끝에서 저끝까지 왔다갔다 가며 메주콩이 얼어붙기를 기다리는 재미 또한 그럴듯 했다.

저녁이면 또 어머니가 닦아준 고소한 해바라기씨를 까며 아버지의 구수한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봄이면 어머니는 천지 꽃을 훑어다가 꿀단지에 담그어 땅속에 100일간 묻어둔다. 기관지에 좋다고 해서 나를 먹으라고 해마다 정성껏 담그시는 어머니이시다.

내가 사범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10월이 다가오자 어머니께서 털실바지를 손수 떠 보내왔다. 어느날 인가 씻어서 널어놨는데 누가 훔쳐가고 없었다. 나는 전보로 이 소식을 어머니께 알렸고 어머니는 이틀만에 털실바지를 새로 떠서는 보내왔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에게 참 죄스럽고 내 마음이 아픈 일이다. 16살이나 되였는데 전보까지 보내면서 야단이였으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해 늦가을, 촌에서는 집체로 농민들에게 벽돌집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촌에서는 아버지가 월급쟁이라며 어머니의 몫은 없었다. 게다가 공수가 모자란다고 쌀도 주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돼지한테 죽을 준다는 것이 그만 발을 빗디디여 어머니는 돼지굴 벽에 얼굴이 긁기면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돼지굴 옆에 누워있었다. 쌀이 똑 떨어져 아침식사를 대충 하고 학교 간 남편과 자식들이 점심 밥 먹으러 왔다가 고추짠지, 파짠지로 요기하고 집을 나서는 우리의 뒤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쓰렸을가!

그 뒤로 아버지는 계동현연수학교 교수연구원으로 전근하고 언니와 나는 련이어 대학에 가게 되였다. 그 쯤에 아버지는 단위로부터 집을 지을 보조금을 받아 벽돌집을 짓게 되였다.

아버지는 부교수로 있다가 퇴직하고 어머니와 함께 큰딸, 둘재딸, 셋째딸의 자식은 계동서 봐주고 소주에 있는 막내딸의 자식은 소주에 가서 아기를 봐주셨다.

그리고 싱싱한 남새를 보내주고 입맛 돋구는 ‘엄마 맛’의 된장, 고추장, 떡…, 지금도 챙져주시는 아버지, 어머니이시다.

아버지, 어머니는 이제는 여섯 손군을 둔 80고령의 로인이 되였다. 이제는 우리 자식들이 아버지, 어머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련다.

“죽어도 원이 없구려. 자식들 덕분에 태국도 가보고 한국도 가보고, 계림산수며 운남 대리며 둘러보고 진갑은 물론 결혼 50주년 경축행사도 치르고 말이다. 뭐 더 바라겠니? 너무 행복하단다.”

아버지,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시며 만족하신다. /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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