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수기 67] 아버지를 그리며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3-21 16:45:58 ] 클릭: [ ]
2021년 1월 21일, 아버지는 길림시의 모 병원에서 95세를 일기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데다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소속 서란시 로간부국당위와 아버지께서 근무한 적이 있는 서란시조선족제1중학교에 알린 외에는 그가 늘 마음에 두고있는 동지들과 친척친우, 그의 제자들에게는 알리지 못했다. 부득불 우리 형제자매와 7명 손주가 우리 방식대로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보내게 되였다.

 아버지 김광(金光), 1976년 서란현조선족제1중학교 운동장에서

아버지는 당조직 생활을 얼마나 중시하고 동지들과의 감정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간소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당조직, 동지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기 싶어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눈길을 보는 듯 했다. 나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위로해드리고 나의 죄송스러운 마음을 달래려고 모든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2016년 아버지의 90세 생일을 맞으며 가족과 함께.

오늘(2021년 3월 10일)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49일이 되는 날이다. 이날은 또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신 후 맞게 되는 제23번째 되는 제사날이기도 하다. 두개 기일이 겹치다 나니 나의 가슴은 쥐여뜯는 듯이 아파 오래동안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글로 담아 아버지를 추모하려고 필을 들었다. 아버지와 함께 근무했던 동지들과 친구, 제자들이 이 글을 읽고 평범하고 위대한 아버지의 일생을 되새겨주었으면 하는 소망도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김광(金光)이고 본명은 성래(圣来) 이며 본교(本教)라고 부른 적도 있다. 음력 1926년 5월 19일에 일본침략자에 의해 강점당한 조선 충청남도 공주군 신안면의 한 지주집 머슴의 자식으로 태여났다. 1938년 12세 때에 2년 먼저 중국으로 건너온 아버지를 찾으러 떠난 어머니를 따라 조선에서 위만주국으로 왔다. 당시에 ‘사가방(四家房)'이라고 부르는 길림성 서란시에 정착했다.

처음에 어린 아버지는 당지의 한 신문사의 신문팔이로 집 살림을 보탰다. 나중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간난신고를 거쳐 생활이 좀 펴이게 되고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아버지를 학교에 보내게 되였다. 1941년 15세 때 아버지는 위만 길림성서란국민우급학교(伪满吉林省舒兰国民优级学校)를 졸업하고 1945년 19세 때 위만 길림성사도학교 특수과(伪满吉林省师导学校特秀课)를 졸업했다.

1945년 8월, 일본의 투항과 함께 위만주국도 멸망하게 되였다. 아버지는 광복 후의 조선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서란에 남았으며 중국조선족으로 생활하게 되였다. 중국공산당이 인솔하는 부대가 동북에 진출한 후의 1946년 1월 아버지는 혁명사업에 참가했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서란현조선민주청년동맹 소년부 부장으로 있으면서 인민정권 설립, 인민무장 확장, 민주개혁 실행에 적극 뛰여들고 국민당 토비 숙청, 동북인민해방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위해 지원했다. 1946년 5월, 인민정부의 배치에 따라 아버지는 민족간부 후비력량을 양성하는 교육분야에 전근하게 되였는데 서란현성관(城关)조선족소학교 교원으로 되였다.

1948년초, 동북인민 해방전쟁이 치렬하게 진행되는 당시 아버지는 서란구조선족중심소학교 교장을 담임하게 되였다. 그해 7월, 22세의 아버지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전반 생애를 결정하는 참신한 정치적 생명을 얻게 되였다.

1952년 7월부터 항미원조전쟁과 농업, 개인수공업, 자본주의 공상업에 대한 생산자료 사회주의개조 기간에 아버지는 인민정부의 배치로 서란현 소성(小城)조선족완전소학교 교장을 담임하게 되였다. 1953년, 아버지는 길림성교육행정간부학교에서 반년간의 학습도 했다.

1956년초 30세의 아버지는 서란현조선족제2중학교당지부 서기 겸 교장을 담임했다. 생산자료소유제의 사회주의 개조, 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사회에로의 과도, 전당 정풍과 반우파 투쟁, 대약진과 인민공사 등 운동중에서 초급 민족교육으로부터 중급 보통 민족교육 분야에로의 사업 전이를 완수했다.

1959년부터 33세의 아버지는 서란현조선족제1중학교당지부 서기 겸 교장을 담임하게 되였다. 이 기간 나라에서는 3년 곤난 시기를 겪었고 선후 ‘4가지 숙청'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사회주의교육운동을 진행한 데 이어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였다. 일련의 중요한 국가 정치생활에서 아버지는 자기를 단련하고 당성을 제고시켰다. 1963년, 아버지는 중공길림성당위선전교양당학교(中共吉林省委宣教党校)에서 반년간의 학습을 마치고 중공서란현위 문교당위 위원,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되였다.

1968년말부터 1969년말까지 아버지는 당의 호소를 받들고 서란현 진교공사 영안대대 광복소대(镇郊公社永安大队光复小队)에 정착했다. 농업 생산로동을 거쳐 아버지는 허심하게 빈하중농을 따라배우고 직접 농촌 생활을 체험하고 농민들의 실제 상황을 알아보았다. 1970년초 44세의 아버지는 본직을 회복하고 서란현조선족제1중학교당지부 서기 겸 교장으로 있었다. 아버지는 한패 또 한패의 지식청년들을 농촌에 보냈다. 당중앙 11기 3차 전원회의 후의 개혁개방을 맞이하게 되였고 1986년에 옹근 40년의 직업 생애를 마치고 영광스럽게 리직휴양했다.

40년이란 혁명사업에서 아버지는 1958년과 1985년에 두차례 서란현 우수공산당원으로 선정되였으며 오래동안 서란현교육학회 리사로 계셨다.

지난 세기 80년대 교육분야 로간부들과 함께 산동을 고찰하면서.  

리직휴양한 후 이에 앞서 계획했던 학교 교수건물 건설 사항을 걱정한 아버지는 한가롭게 집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재직 때와 마찬가지로 성, 지구, 현 정부의 해당 부문과 학교를 다니며 교수 건물 건설 자금 락착을 위해 뛰여다니고 교수건물 건설 프로젝트를 다그쳐 가동, 건설해 사생들이 하루 빨리 새 건물에 입주하도록 동분서주했다. 당시 이 교수 건물은 서란현에서 처음으로 새로 건설한 중학교 교수 건물이였다.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는 곳이면 될 수 있는 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리직휴양한 후에도 아버지는 서란현조선족제1중학교 지도층 사업을 힘써 지지하고 지도층들의 방문을 열정적으로 접대함과 아울러 함께 당의 민족교육 정책을 학습하고 깊이 있게 리해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교직원들의 사업 상황과 실제 생활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서란현 도시와 농촌에서 온 학생들의 심리 특점도 파악했다.

리직휴양한 후의 수년간 아버지는 서란시조선족제1중학교의 발전을 념두에 두고 학교 운영에서 부딪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서란현 경내의 기타 조선족중소학교의 교육사업에 관심을 두고 여러가지 기회를 빌어 각 학교를 방문하고 실제 상황을 알아보고 제때에 현정부와 관련 부문에 반영했다.

 

2018년에 서란현조선족제1중학교 1968년급 학생 졸업 50돐을 맞으며.

근 40년 당령을 가진 리직휴양간부로서 아버지는 새로운 귀속인 서란시로간부국당위의 조직 활동에 중시를 돌리고 주동적으로 당조직에서 조직하는 정치, 학습 활동과 여러가지 문체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당의 로선, 방침, 정책을 제때에 학습하고 리해했으며 국내외 중대 형세를 알아보기 위해 자비로 간행물을 주문해서 읽었다.

아버지가 걸어온 95년은 평범하고 소박한 인생이지만 비범하고 위대한 힘을 부여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 그가 남긴 중임을 떠메고 그이께서 인정한 길을 따라 계속 앞으로 전진하도록 나를 격려하고 있다.

1986년 리직휴양 전, 서란현조선족제1중학교 교정에서.

아버지의 일생은 중국조선족의 형성과 발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민족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심혈을 기울여 분투한 일생이다. 그는 기타 많은 조선족들처럼 일본침략자의 강점을 당한 조선에서 출생하고 생활의 핍박에 의해 중국에 이주하였다. 행운스러운 것은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중국공산당은 동북 각지에서 인민정권을 건립하고 민주개혁을 실시했는바 아버지네는 토지를 분배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사업일터도 배치받았다. 게다가 재중국 조선인들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주어 중화민족 대가정의 평등한 일원으로 되게 했다.

아버지는 자기 개인과 가정 운명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은 전체 조선족들의 운명을 개변한 전제하에서 이루어졌음을 가슴 깊이 느꼈다. 전체 조선족 운명의 개변은 또한 근대 이후 무수한 우리 민족 혁명자들이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혁명에 뛰여들어 영용하게 싸운 결과임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아버지는 중국공산당 민족정책의 지도 아래 전반 조선족들의 번영 발전을 위해 온갖 심혈을 다 기울여 사업했으며 이는 또 매 조선족마다 반드시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 같은 고도의 사상 경계가 있었기에 아버지는 옹근 40년이란 시간과 정력을 조선족 기초교육 사업 발전에 몰부었고 당과 나라를 위해 수많은 민족간부 후비인재를 양성하는 일터에서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일해왔다는 것을 나는 심심히 느꼈다. 아버지가 사업에 참가한 초기에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인민정부가 아버지에게 맡긴 임무가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큰 의의가 있다는 것을 가슴속 깊이 느낀 그였기에 아버지는 아무런 원망도 없이 소학교 교원부터 시작하여 민족교육 사업의 첫 발자국을 내디뎠다.

아버지의 일생은 초심을 잊지 않고 당의 사명을 명기하며 자각적으로 당중앙의 권위를 수호하고 창조적으로 당의 민족정책이 실제에 락착되도록 힘 써온 일생이다. 아버지는 혁명사업에 참가해서부터 당의 민족정책의 관심 속에 꾸준히 당의 교육과 양성을 받았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조선족이 없으며 그의 충실한 일생도 없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었다. 하여 그는 건국 후 력차의 정치운동 세례에서 특히 ‘문화대혁명’가운데 공평하지 못한 대우를 받았어도 자기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진리를 수호했다.

오히려 그는 늘 자각적으로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의 기본 립장, 관점과 방법으로 현실 속의 문제를 분석하고 당의 로선, 방침, 정책의 높이에서 주동적으로 담당하고 창조적으로 민족교육 사업을 했다. 1980년 내가 대학에 입학하여 고향을 떠날 때 아버지는 당을 따르고 학습에 게을리지 않으며 하루 빨리 당조직에 가입해야 하는 필요성을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셨다. 그 때 그 시절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던 얘기가 오늘도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내가 첫진으로 학생당원이 되였다는 희소식을 아버지에게 알렸을 때 아버지는 그렇게도 기뻐하셨다. 아버지는 “당원의 표준에 따라 꾸준하고 엄격히 자기에 대한 요구를 높이며 자각적으로 당중앙의 절대적인 권위를 지키며 실제에 결부하여 창조적으로 당조직에서 맡긴 각항 임무를 완수할 것”을 신신당부했다.

아버지의 일생은 인민군중들과 밀접하게 련결시키고 모든 것은 인민의 리익으로부터 출발하며 일심전력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한 일생이다.

지난 세기 90년대 중기 연길에 있는 작은 딸과 함께.

언젠가 아버지는 평생 잊을 수 없고 미안했던 일을 나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50년대말 어머니가 할빈 병원에서 신장 절제수술을 하게 되였는데 아버지가 서란현조선족제1중학교 지도직무를 맡은 지 얼마 안되고 게다가 국가 3년 곤난시기여서 학교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교직원들의 생활문제도 해결해주어야 하는데 아버지의 판단과 결정이 수시로 필요한 때였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지 못하고 학교 동료한테 위탁하여 어머니를 동행해서 병원에 가도록 했다. 이 일 때문에 내가 아버지에게 원망의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가정 일은 뒤로 하고 당과 나라, 인민군중들의 리익을 위해 혁명사업에 뛰여든 수많은 로혁명가들을 생각하니 나는 아버지를 리해하게 되였다.

‘문화대혁명'기간 아버지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투쟁을 받게 되였다. 그는 자기가 짊어져야 할 책임은 과감히 짊어졌으며 절대로 사생과 종업원들에게 덮어씌우지 않았다. 하여 교직원들의 존중을 받았으며 학생들도 아버지를 좋아했다. 특히 온 가정을 데리고 농촌에 내려갔을 때이다. 어려운 생활형편에서도 촌민들은 명절을 쇨 때마다 아껴 먹으며 모아둔 쌀을 남몰래 우리 집 앞에 갔다놓군 했다. 아버지께서 당지 농민들과 깊은 감정을 쌓았기에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1986년에 리직휴양해서부터 2020년까지 아버지는 34년 동안이나 눈이 오나 비가 내리나 줄곧 게이트볼을 쳤다. 령하 20도가 넘는 엄동설한에도 실외에서 게이트볼을 쳤다. 아버지는 여러가지 애호와 취미가 있었다. 낚시를 좋아했고 젊었을 때는 길림지구 스키 우승도 따내였다. 70주세 되는 해에는 서란현소방대와 함께 체능측험에 참가했으며 서란현 중로년 장거리 뛰기에서도 여러번 1등을 한적도 있었다.

2019년 당 창건 98돐을 맞으며 리퇴직간부 당지부 활동에 참가한 아버지(앞줄 왼쪽으로 5번째).  

아버지는 신체단련을 견지했을 뿐만 아니라 흉금도 넓었다. 늘 자기 걱정은 하지 말고 사업을 잘하라고 자식들에게 부탁했다. 나는 아버지의 신체가 매우 건강하다고만 생각했다. 4대가 함께 사는 집에서 자손들의 효도를 받으며 100세 축수연까지 치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참혹했다. 내가 60세 나이를 먹도록 다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의 6일 밖에 아버지의 곁을 지키며 시중들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만일 래세가 있다면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딸이 되련다. 아버지는 영원히 나의 마음속 깊숙이 묻혀있으며 나는 영원히 아버지를 사랑하리라!

“아버지, 어머니, 저 세상에서 부디 편안하게 잘 보내세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량호한 품덕과 고상한 정조는 내더러 진정한 사람이 되라고 영원히 채찍질하고 격려할 것이다. 아버지를 기억하시는 친척친우들과 그의 제자들이 함께 아버지를 회억하며 아버지의 평범하고 위대한 일생을 되새기게 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 글을 남긴다.

/김옥자 북경에서(2021년 3월 10일)

0

관련기사 :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