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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71]그 시절 그 동네 그리고 정 많은 사람들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4-06 15:38:55 ] 클릭: [ ]

 추운 겨울이 지나고 완연한 봄날을 맞이한 이 때 나는 가끔 창가에 기대여 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한손에 손군의 손을 잡고 다른 한손에 손군들의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는 장면을 내려다본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근 60년전의 천진란만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친구 강정옥(뒤줄 첫번째) 함께  기념 사진 남긴 필자(뒤줄 오른쪽 첫번째)

어릴 때 우리 집은 연변조선족자치지주정부 (지금의 시정부) 서쪽 하남가 3거에 있었다. 우리 동네는 주정부 가족 주택이였는데 붉은 벽돌에 양철지붕을 한 줄집이였다. 매호에 20평방쯤 되고 그 때는 집집마다 애들이 많았다. 애들이 6, 8명 되는 집도 있었는데 그 비좁은 집에서 10명이나 살았고 어떤 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3대가 같이 살았다.

연길시건공소학교에 다닌 나는 학교에 갈 때 삼삼오오 모여서 우리끼리 함께 학교에 다녔다. 나는 매일 아침 제일 앞줄에 사는 정옥이네 집에 갔다. “정옥아~ ” 하면 “들어오너라” 하는 대답과 함께 제꺽 문을 떼고 들어간다. 그러면 정옥이의 아버지는 언제나 환한 웃음을 짓고 반기면서 우리를 훌쩍 들어올려 내려놓군 했다. 그러는 정옥이의 아버지가 좋았다.

강정옥 아버지 강성준과 어머니 채인숙

정옥이 아버지의 이름은 강성준이고 연길시편직물공장 공장장이였다. 그는 연변대학을 다니다가 참군하여 항미원조에 나가 공까지 세운 2등 잔페군인이였다. 후리후리한 키에 짙은 눈섭아래 부리부리한 두눈을 가진 화끈하고 후더운 분이였다.

매년 겨울 학교에서는 난로를 놓는데 담임교원을 도와 정옥이의 아버지는 업여 시간을 리용하여 난로를 가설해주고 책걸상을 수리해주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우리들에게 가끔 항미원조 시기에 격은 이야기 등 혁명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들더러 사회주의건설의 훌륭한 후계자가 되라고 당부했다.

혹간 애들 사이에 모순이 생기면 그는 언제나 단결하라고 우리를 인도해주군 했다. 어느 한번 정옥이는 당시에 류행이였던 천지꽃색 베르벤또 만또를 해입고 학교에 왔다. 그 때 모두 어렵게 생활하는 형편이라 새옷을 입어도 눈에 띄는데 고운 만또는 입었으니 류달리도 애들의 눈을 사로 잡았다. 어쩌다 예쁜 새 옷을 입은 정옥이는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며 업간 시간에 마음껏 뛰놀고 즐겼다.

그런데 맙시사! 하학하고 집에 돌아온 정옥이는 옷 뒤에 잘드는 칼로 기다랗게 쭉 찢어놓은 것을 발견했다. 너무 아까와 정옥이는 저도 모르게 엉엉 울기까지 하였다.

 강정옥(뒤로 세번째줄 왼쪽 세번째), 필자(앞줄 왼쪽 두번째) 동학들과 함께

정옥이는 그냥 넘어갈 성격이 아닌지라 동학들과 함께 세밀한 조사를 거쳐 우리 반 한 남학생의 ‘걸작’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정옥이는 무작정 옷을 들고 남학생 집으로 달려갔다. 확실히 그 남자애가 한 짓이였다. 그 남자애의 어머니는 너무 미안하여 련속 정옥이를 위안하고 저녁에 정옥이의 부모를 찾아와서 사과하면서 새로 옷을 지어주겠다고 하였다.

기실 어쩌다 딸애에게 비싼 새 옷을 해입혔는데 입고 간 첫날에 옷이 찢어졌으니 정옥이 부모님의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그러나 정옥이의 아버지는 철 모르는 애가 한 짓인지라 정옥이를 설득하여 기워입게 하고 그 애를 꾸짖기는커녕 앞으로 그애와 더 잘 보내고 잘 놀도록 정옥이를 인도하고 앞으로 그런 일을 하지 말도록 남학생을 타일렀다. 만또는 곱게 기웠지만 째진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오후 하학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함께 모여 소조공부를 했다. 우리는 약 1시간가량 숙제를 한 후 밖에 나가 실컷 놀았다. 낮에 놀고도 성차지 않아서 저녁 밥 먹고는 또 주정부 울안의 널찍한 곳에서 놀았다. 돌 차개를 노는 애들, 고무줄 놀이를 하는 애들, ‘꽁기’ 노는 애들, 술레잡이 등을 노는 애들로 저녁과 일요일이면 주정부 울안은 애들의 놀이터로 되였다. 그 때는 주정부 울안을 제집 드나들듯 마음대로 들어가놀았다.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애가 없었고 정부 울안의 나무가지 하나 제집으로 가져오는 애들도 없었다. 어른들도 우리를 내쫓지 않았으며 가끔 주장들이랑 급 높은 간부들도 만날 수 있었는데 애들은 서로 앞다투어 소선대 대례를 하군 했다. 그들은 우리를 여간 귀여워하지 않았다.

방학이면 우리 동학들의 오빠, 형님들인 고중생 리송애 오빠 리명준, 임무성의 형님인 임상룡 등은 자원적으로 우리들의 과외보도원이 되였다. 그들은 아침에 우리를 조직하여 아침운동을 시켰다. 휘휘 늘어진 수양버들가에 모여서 손풍금 잘 치는 무성이 형님 임상룡이 손풍금을 타며 우리들에게 노래를 배워주기도 하고 우리는 손풍금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했다. 낮에는 명준 보도원 오빠를 비롯한 보도원들의 지도하에 방학숙제를 하고 유희 경연도 펼쳤다. 우리와 한 주민 소조인 주장 울안의 로혁명가인 교수기 부주장의 부인 김선, 그리고 우리 동학인 황룡호의 어머니도 우리들에게 혁명전통교육과 항전 시기 자기들이 직접 격은 혁명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동네는 8호가 한줄인 줄집이였는데 어느 집이나 울바자가 없었다. 아침 저녁이면 어머니들이 뒤마당에 풍로불을 피워놓고 밥을 짓고 아버지들은 앞마당 자그마한 밭에서 남새 심고 옥수수 같은 농작물을 심었는데 그 역시 가관이였다. 동네 어머니들이 자기 집 오이, 도마도, 홍당무우 같은 것들을 들고 나와 나누어먹으며 한담도 했다. 텔레비죤이 없는 세월이라 모여서 한담을 하는 것도 또 하나의 풍경선이였다.

가을이면 겨울 김장 준비로 집집마다 배추 천여근씩 들여오는데 어머니들은 모여서 물 긷는 사람, 배추 나르는 사람, 배추 씻는 사람, 독에 넣는 사람 등으로 분공하여 한집 한집씩 김장 배추를 씻었다. 우리 어머니는 출근하다나니 같이 배추를 씻지 못했지만 마음씨 고운 어머니들은 우리 집 배추도 빼놓치 않고 꼭꼭 씻어주었다.

아버지들도 동네일에 자원적으로 나섰다. 겨울에 우리는 밖에 있는 뽐프 한대로, 후에는 뽐프 대신 상수도 한대로 집집이 물을 길어마셨다. 물이 흘러 얼면서 주위의 얼음 높이가 점점 올라가 물 긷기가 힘들어지면 잔페군인인 정옥이 아버지 강성준을 비롯한 아버지들이 괭이를 휘두르며 얼음을 껐다. 우리 동네는 일만 있으면 누구나 자각적으로 함께 하는 동네였다.

나는 그곳에서 중학교 다닐 때까지 살았는데 집열쇠를 가지고 다닌 기억이 없었고 어느 집에서 물건이 잃어졌다는 말을 들어본적도 없었다. 정말 로인들이 존경받고 아이들이 사랑을 받고 서로 도와주며 사는 화기애애한 동네였다. 그리고 뛰놀고 즐기는 떠들썩한 애들의 목소리가 귀맛 좋게 들리는 동네였다.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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